1) 원 프란치스코( ? ~ 1871. 3. 25)
원(元) 프란치스코(방지거)는 수원의 대표적 순교자이다. 충청도 내포 출신으로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의 손자이며, (元) 바오로의 셋째 아들이다. 원 프란치스코는 눈먼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고, 교회의 축일과 주일 등을 교우들에게 밝히 알려주는 등 모범적 생활로 교우들의 스승이 되었다. 원 프란치스코는 베르뇌 장 주교와 다블뤼 안주교로부터 교리를 배웠고, 천주십계(天主十戒)와 칠죄종(七罪宗), 성교사규(聖敎四規), 조만과(朝晩課), 사본요리(四本要理) 등의 내용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며, 마귀, 세속, 육신 등 삼구(三仇)와의 영신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독려하였다. 병인년(1866)에 체포되었으나 배교 않고 가산만 적몰된 채 석방되었으며, 신미년(1871)에는 한사코 피신을 아니하고 체포되어,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는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하였다. 수원 옥에 함께 갇힌 밀고자를 오히려 극진히 사랑하고 자식들에게 그를 원수로 삼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며, 오히려 순교의 은인이라고 감사하였다. 자식들이 옥에 넣어준 음식을 매번 감옥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옥중에서 두 교우가 통회하고 열심한 신자가 되게 하였다. 병인박해 때 포졸 앞에서, "천주는 나의 대부모(大父母)시오, 만 백성의 대부모이실 뿐만 아니라 만왕(萬王)의 왕(王)이시요 만군(萬君)의 주(主)이시라. 천주는 만만코 배반치 못 하나니라" 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신미년(1871) 3월 25일에 수원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2) 윤자호 바오로(尹滋鎬, 1809~1868.7. 18)
윤자호 바오로는 1809년 파평윤씨 명가의 후손으로, 충청도 노성(魯城) 땅에서 나고 자라서 강경 놀미, 충주 등으로 이사했으며, 충주의 한 교우로부터 천주교를 전해듣고 입교하여 그의 부친도 입교시켰다. 신앙생활의 편의를 위해 고향을 떠나 공주 유기의 회장이 되어 교우들을 지도하였다. 교우인 밀양 박씨(密陽朴氏)와 결혼하였고, 광천(廣川) 독바위에서 객주집 머슴살이를 할 때는 주인집 여성의 유혹을 물리쳐 부부간의 신의(信義)를 지켰다. 다블뤼 주교를 도와 전교회장직에 열성을 다했으며, 명강의로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간에 명성이 높았다. 강론을 듣는 교우들에게 가난한 중에도 대추를 사서 대접했고, 교회를 위한 애긍전을 모으는 데도 열심하였다. 자신을 약탈하려는 도적들을 포졸들로부터 구출해 줌으로써 도적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인간미에 매료된 포장과 포졸들의 인정도 받았다. 수원 옥에서는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자신과 의로서 남매가 된 김 마리아가 구해준 밥을 자신은 먹지 않고 늘 동료 죄수에게 주었으며, 삿자리를 구하여 동료 죄수의 깔 자리로 마련해주는 등의 자선과 선행을 베풀다가 무진년(1868) 7월 18일 60세의 나이로, 함께 수감되었던 이치명 바오로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1968년 성직자를 포함한 그의 후손들이 그의 공적을 기려 "순교자 윤자호 바울로의 행적비"를 세웠다. 유명한 순교소설 《은화》를 쓴 윤의병(尹義炳, 1889~1950) 바오로 신부는 윤자호 바오로 회장의 후손이다.
3) 지 다태오(다두,1819~1869. 5. 23)
지 타대오(다두)는 수원 양간 용수말(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지 타대오는 그곳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교우촌 안중(인광리)의 김 발바라와 혼배하고 그곳에서 처가 쪽의 재산을 잘 관리하여 만석군 대부호로 성장했다. 1866년 재산을 노린 본읍 포교 안호범 등 박해자들에게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통회하고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1869년 4월 15일 포교 노판용에게 체포되어 진위현 감옥에 갇혔다가 수원으로 이수되어, 5월 23일 수원성 북문 밖에서 공개 처형을 당하여 51세로 순교했다. 진위 감옥에 갇혔을 때 막내 아들 춘범이 그를 찾아가 배교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오히려 그에게도 순교를 권면했다고 한다.
4) 박의서 사바스(1808~1867.8.8)
박익서 사바스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중 의암공파(義庵公派)에 속하며 병인박해 당시 수원유수부 가사면 걸매리 교우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걸매리 교우촌은 행정구역상 수원유수부에 속해 있었지만, 유수부 관아로부터는 약 120리 이상 떨어진 충청도 내포지방에 속한 아산만에 위치한 섬마을이었다.
박의서 사바 회장은 평소 신자들을 격려하여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도록 안배하였으며 그 자신의 신앙생활도 철저히 했다. 그러나 관가에 체포될 당시 일시적인 유혹이 있었는데 함께 체포된 동생 원서 마르코의 권면을 듣고 곧바로 회개했으며, 3형제가 함께 순교를 다짐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 결과 박의서와 그의 동생들은 모두 수원유수부에 가서 영장(중군)의 질문에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1867년 8월 8일 박의서 사바 회장은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 등 두 동생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 분들의 순교 기념비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에 세워져 있다. 그 후손 중에서는 대전교구 박상래(朴祥來) 신부를 비롯하여, 박노헌(朴魯憲), 박성팔(朴性八), 박중신(朴仲信)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고, 집안에서는 모두 열 분의 순교자가 나왔다.
5) 박원서 마르코(1817~1867.8.8)
박원서 마르코는 걸매리 교우촌 출신이다. 그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중 의암공파(義庵公派)에 속하며, 걸매리 교우촌 박의서 사바 회장의 동생이자 익서의 형으로서 평소 성품은 약간 거칠었고 노름에 빠져 신앙생활은 착실하지 못하여 항상 형의 걱정꺼리가 되었다. 그러나 병인박해 때 삼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수원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평소와는 달리 천주교 신앙과 순교에 대한 열의가 생겨나서, "내가 평생에 천주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였는데, 오늘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하면서 즐거운 얼굴로 포졸에게 "나를 이번에 올라가거든 시간을 끌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천주와 성모께로 가서 영원히 살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을 듣고 함께 동행하던 그의 형 박의서 회장이 배교하고 살려던 마음을 버리고 함께 순교하자고 격려하였으며, 수원 중영의 영장이 천주교 신앙 여부를 묻자 그들 삼형제가 모두 신자임을 용감하게 고백함으로써 1867년 8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 분들의 순교기념비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에 세워져 있다. 그 후손 중에서는 대전교구 박상래(朴祥來) 신부를 비롯하여, 박노헌(朴魯憲), 박성팔(朴性八), 박중신(朴仲信)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이 집안에서는 모두 열 분의 순교자가 나왔다.
6) 박익서(1823~1867.8.8)
박익서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중 의암공파(義庵公派)에 속하며 수원유수부 관하 걸매리 교우촌 박의서 사바 회장과 박원서 마르코의 동생이었다. 평소 착실한 수계생활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고, 수원으로 끌려갈 때, 그의 두 형들과 함께 순교를 다짐하고 서로 격려하여 배교없이 3형제가 함께 1867년 8월 8일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이 분들의 순교 기념비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에 세워져 있다. 그 후손 중에서는 대전교구 박상래(朴祥來) 신부를 비롯하여, 박노헌(朴魯憲), 박성팔(朴性八), 박중신(朴仲信)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이 집안에서는 모두 열 분의 순교자가 나왔다. 1867년 4월 걸매리 교우촌에서는 박원서 마르코의 아내 이 마리아와 박의서의 사촌 박인서 등이 박의서 삼형제와 함께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박의서 삼형제와 함께 8월 8일 수원에서 순교했다. 1868년에는 걸매리 박의서 사바의 형수 이씨와 사촌 형수 조 모니카 등이 수원포교에게 잡혀 수원 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했으며, 같은 걸매리 출신의 장원심과 장팔보 부자가 수원 포교에게 잡혀가 수원에서 순교했다.
7) 김사범(?~1866)
경기도 수원 고을 방아새골의 회장이었던 김사범은 충청도 청주의 양반 출신으로 6형제 중 맏이였다.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기에 힘썼으며, 성품이 굳세고 의연하며 교리에 통달하였다. 김사범은 산중에 거하면서 농업과 상업에 힘써 제법 살만 했지만, 비리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러 형제가 한 마을에 각거하는 중에 부친이 병이 들어 여러 해 동안 지속되자, 김사범은 약을 달여 부친께 공급하기를 끊이지 않았고, 또 밤에 병자의 곁에서 수발을 정성껏 하여 이를 궐한 적이 매우 드물었다. 이에 동네 외교인들도 김사범을 효자(孝子)라고 칭찬하였다. 부친이 죽고 난 후에는 모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기에 힘썼으며, 동생이 진 빚을 갚아주면서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산중에 사는 수십년 동안 교회 내외의 비방이 한 마디도 없었다. 병인박해 초기에 김사범이 부자로 소문 나 있었는데, 여러 동생을 위하여 관속에게 돈을 주어 체포를 면하게 해주었고, 여름에는 선교사를 자기 집에 모시고 교회 일을 돌보았다. 그러나 병인년 가을 청주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자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하고 석방되었는데, 곧이어 회개하고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내 다시 관가에 체포되어 수원 고을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을 때, 안(다블뤼) 주교를 아느냐는 물음에 수삼 년을 모시고 있었다고 정직하게 답변하였다. 이에 그곳 포고들이 그의 인격에 감동되어 죽이는 것이 아깝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막내 제수가 잡혀 그가 있던 수원 옥으로 들어왔을 때, 순교를 권하였지만 듣지 않자 오 요한이란 유다스를 설득하여 그 제수를 친가로 돌려보내 주도록 주선하였다. 한편 김사범은 함께 수원유수부 옥에 갇힌 다른 많은 교우들을 권면하여 순교하도록 신앙을 북돋아주다가, 1866년 태장 수백 대를 맞고 예수, 마리아를 크게 부르며 순교했다.
8) 김양범 빈첸시오 ( ~ 1867.9)
김양범(빈체시오)는 홍주 거더리(현재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살던 사람이다. 김양범(빈체시오)는 1815년(을해) 순교자 '하느님의 종' 김강이(시몬 124위 중 한 분)의 둘째 아들이다. 농사를 부지런히 잘 지어서 재산이 많았으나 이후 거더리(현재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이사해 공소에서 지내며 미사중 사제를 도와 복사 생활을 했다. 1866년(병인)박해를 당해 피해 달아나다가 1867년(정묘)
9) 황요한( ~1866.12.16)
황요한은 유명한 집안의 후손으로 수원 초평(현재 경기 오산시 초평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부모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차례의 박해를 피해 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가산이 줄어 생활이 어려웠다. 1867년 4월에 순교한 황 빈첸시오의 동생이다. 1866년(병인)에는 양지 응다라니(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에 살았는데, 박해가 크게 일어나 자 이웃 비신자 집에 부탁하여 처자와 약간의 전곡을 맡기고 혼자 피신했다. 그러나 그 비신자가 그의 전詢과 처자를 빼앗을 속셈으로 포졸에게 밀고했고, 이것을 모르고 처자를 데리러 온 황요한이 체포되었다. 황요한은 체포될 때 매를 많이 맞아 팔 하나가 부러지고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수원 토포청에 끌려가 1866년(병인)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에 2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0) 서여심( ? ~ 1868.4 ?)
서여심은 경기도 양지 고을 은이 교우촌의 회장이었다. 그는 은이 교우촌을 열심한 신자들, 특히 병인박해기 집단 순교자를 배출하는 열열한 신자촌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성사생활을 돌보다가 양지 은이에서 다른 교우 여섯 명과 같이 잡혔다. 관찬 기록에 나오는 서여심(徐汝心)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경우 서여심은 다블뤼 신부, 리델 신부 등을 자기 집에 모시고 선교사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수 있게 했던 인물로서, 은이 신자들의 판공성사를 예비하고 평상시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던 공소회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원 감옥에서 1868년 윤4월 7일 이전에 옥사했으며 이 무렵 그와 같은 은이 출신의 서군실, 서대원, 서여행, 조달성 등도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11) 심원경 스테파노( ~1866.11)
심원경(스테파노)는 인천 함박이(경기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출신 양반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 중에 신자가 많았다. 신앙새활을 잘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양지 고을 사기막(현재 경기 용인시 서인구 챵지면 대대리)교우촌에서 살다가 1866년(병인) 10월(음력) 박해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천 포졸들이 심원경(스테파노)와 그의 아들 심복학에게 와서 천주교 인임을 확인하고 체포했다. 인천 관장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었으나 직접 처벌하지 않고 수원 관아로 보냈다. 수원에서 심문 당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의 형벌을 받았고, 1866년 11월(음력)에 나이 52세인 심원경(스테파노)와 20여 세인 심봉학 부자는 수원 남쪽문(팔달문) 밖 장터에서 매을 맞아 장살형으로 죽음으로써 순교했다.
12) 권중심(1825 ~ 1866)
권중심은 충청도 신창 창말의 중인 출신이었다. 권중심은 성품이 걸걸하였으며 복음을 접하고도 천주교에 쉽게 들어오지 않다가, 랑드르(洪) 신부의 권화에 힘입어 입교하였다. 입교 후 매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1866년 다른 사람을 체포하러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에게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고 자수하여 수갑을 차고 끌려갔다. 이때 아내와 아이들이 울면서 권중심의 마음을 약하게 하자, 그들에게 자신의 순교 결심을 약하게 하는 울음을 그치기를 요구하면서 아내에게,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부디 어린 것들을 데리고 살다가 만일 잡히거든 부디 배교를 하지 말고 위주치명(爲主致命)하여 아무쪼록 영원(한 곳)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이에 그를 붙잡은 포졸이 그의 말을 듣고 "제법이라"고 칭찬했다. 권중심은 곧 수원으로 끌려가서 배교없이 순교했는데, 나이는 42세였고 순교한 때는 1866년이었다.
13) 윤평심(尹平心, ? ~ 1866. 12 이전)
윤평심은 최소한 1838년 이전에 입교하여 충청도 직산(稷山) 농촌(農村) 근처에 거주하면서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으며, 자기 집에 프랑스 선교사인 오메트르 신부나 다블뤼 주교를 모시고 신자들을 인도하여 각종 성사(聖事)를 받도록 해주었다. 윤평심은 여러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는데, 직산에 거주하던 최경헌(崔敬憲), 최경희(崔敬喜), 최경원(崔敬元) 등과 여(女) 대아지(大阿只), 봉현규(奉賢圭), 한치원(韓致元, 알로이시오) 등이 윤평심에게 교우를 배운 사람들이다. 윤평심은 이들에게 성호경, 천주경, 삼종경, 십이단 등을 가르쳐 교리 지식을 깊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믿으면 죽어서 즐겁게 좋은 곳으로 간다고 내세관을 심어줌으로써 신앙생활에 확신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윤평심은 이웃에 살면서 그를 도와 교회 일에 열심하던 교우 홍창룡(洪昌龍)과 함께 병인년(1866) 12월 18일 이전에 수원진영(水原鎭營)으로 끌려가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순교의 화관을 차지했다.
14) 홍창룡(洪昌龍, ? ~ 1866. 12 이전)
홍창룡은 윤평심(尹平心)과 함께 충청도 직산에 살면서, 이웃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주는 등 교회 활동에 힘썼다. 홍창룡의 이웃에 살던 봉현규는 윤평심과 홍창룡으로부터 약 3년 동안 교리를 배우고 함께 교회활동을 한 덕분에, 평택으로 이주한 후 관가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18일 포도청의 심문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 또한 홍창룡은 이 안나를 비롯한 이웃 교우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오메트르 신부로부터 혼배성사 등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교리교사로서, 때로는 교우들의 성사집행 장소 주인으로서 열심한 교회활동을 하던 홍창룡은 윤평심과 마찬가지로 관가에 체포되어 병인년(1866) 12월 18일 이전에 수원 진영에서 윤평심과 함께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했다.
15) 박선진 마르코(1836~1868)
1836년 충청도 홍주 원머리 태생으로, 부친의 엄한 꾸중과 천주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열심한 가르침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무진년(=1868년) 수원 포교에게 잡혀갈 때, "우리 죽음이 육정(肉情: 인정)에 박절(迫切)함이 없으리까? 그러나 천주님의 명령대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일이오니 부디 과히 염려 마옵시고 훗일을 조심하십시오" 라고 하여 부모를 위로하고 순교의 원의를 발하였다. 박 마르코는 수원 관가로 함께 잡혀간 사촌 박 마티아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형님이 이제는 배교하여도 죽을 것이니 굳이 위대하신 하느님을 배반하고 죽어 영원한 벌을 받으려 합니까?"하고 설득하여 옥에 갇힌 지 15일 만에 함께 순교하는 은혜를 입었다. 그들이 죽은 후 시체를 찾아 장사(葬事)하였는데, 시체가 정결한 것이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하며, 박 마르코는 순교당시 33세였다.
16) 박태진 마티아(1819 ? ~ 1868)
충청도 원머리 사람으로 1868년 사촌간인 박 마르코와 같이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원으로 끌려갔다. 수원 옥에 수감 중인 15일 동안 한번 배교하려 했으나 박 마르코의 권유로 회개하고 이후에는 굳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박 마르코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순교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박태진 마티아는 비록 한순간 배교의 유혹에 떨어졌으나 17세 연하인 사촌동생의 충고를 듣고는 다시 마음을 돌려 그 후로는 마음이 결코 변치 않았다. 사촌동생 박선진마르코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토포청에서 미루나무에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집행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박마티아는 사촌동생 박마티아와 함께 숨진 후에도 시신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깨끗하였다고 전해진다.
17) 고 야고보(1817? ~ 1866)
충청도 내포 사람으로서 젊은 나이에 천주교를 전해 듣고 교회에 입교하였다. 그는 수계 생활의 편의를 위해 산골로 이사하여 여러 교우들과 함께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갔다. 병인박해 때 죽산도호부의 포교가 와서 그와 그의 며느리 문 막달레나를 체포하여 죽산 옥에 가두었다. 당시 고 야고보는 처음부터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爲主致命)로 작심하였기에, 체포된 후 형리들의 심문과 배교 강요에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에 형리들도 고 야고보의 순교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야고보에게 별다른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후 재판관이 교체되자 고 야고보는 수원유수부로 이송되었고, 이송된 후 얼마 있다가 교수형으로 죽음을 당하였는데 나이는 50세였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 때 여러가지 형벌과 고문을 당하자 신앙심이 약해져 배교하는 등의 한계를 보인 것에 비하여, 고 야고보는 한결같은 신앙심으로 천주를 증언하였고, 마침내 순교하였으니 당시로서도 보기드문 용덕을 발휘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 심응영 뽈리 데시데라도(1884 ~1950. 9.23~26) 근현대 81위 중 1위
프랑스 남부지방 비비에교구 출생. 빠리외방선교회 선교사 신부로 1907년 사제서품을 받음.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수원성당 제 4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수원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하고' '미신을 타파하기 위한' 2가지 목표를 세우고, 공세리성당 주임신부였던 빠리외방선교회 드비즈신부를 모셔다가 설계를 하여 1932년 수원 최초의 고딕식성당인 수원성당을 건립하였다. 악마를 물리치고 미신을 타파하는 성미카엘대천사를 주보성인으로 세웠다. 처음 부임당시 본당신자수가 6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성당건립후 18년동안 사목하면서 본당신자수가 3,000명으로 불어났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소화학당을 건립하여 일본순사들의 눈을 피하가며 한글과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독립운동과 신문화 개혁운동을 펼쳤다. 1948년 천안성당으로 부임하였고, 625동난때 양떼를 두고 목자가 피난갈 수 없다고 하면서 성당에서 피난못간 몇몇 교우들과함께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굳게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피납되어 대전에서 총살형으로 순교하였다.
19) 유영근 요한( )
20) 요한 콜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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