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와 탕평정치 논쟁

 정조가 국왕을 중심으로 한 탕평정치를 내세우고 국정운영의 능동의 주체로서 성왕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숙종조 이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당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정조는 당쟁을 "풍파","잡배들이 주먹을 휘두르는 난장파", 또는 "야료(惹鬧)부리는 일"로 보고 정쟁이란 "(선비들의 )원기(元氣)가 부실하여 (소인의)객기(客氣)가 침범"할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조의 당쟁관은 붕당들이 각종 정변에서 권력 투쟁의 전위 조직으로 전락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당쟁기'로 불리는 선조 이후의 정치 과정에서 각 붕당은 '공론을 형성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잘 다스리도록 돕는다'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각 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역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붕당정치는 구양수의 '진붕론'이나 주희의 '군자를 진용시키고 소인을 물리친다.'는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려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 역기능이 노정되었다. 특히 붕당의 성립근거인 공론정치까지 왜곡하는 등 그 폐단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 노론의 '군자당론'과 당쟁의 극단화

 '군자유붕론'(君子有朋論)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붕당관을 계승한 노론은 숙종조 말기와 영조조 전반기에 일당적 지배체제를 구축한 가운데 '노론=군자당, 기타=소인당'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당론화하고 있었다. 즉 "모든 일에는 두 편의 나뉨이 있으니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그르게 마련이다. 옳은 것은 천리이고 그른 것은 인욕이므로 옳은 것을 지켜서 잃지 말 것이며 그른 것은 남김없이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송시열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구양수나 주희의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붕당정치론으로 내재화시킨 조선왕조 나름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즉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붕당론이 군주나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져 실제적인 정치이념으로서 작용했는데, 선조가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 같은 군자당론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문제점을 드러냈다. 왕권의 심각한 약화와 당쟁의 이념전쟁화가 그것이다. 우선 '임금도 군자의 당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붕당 정치론의 논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학(聖學)의 기준에 못미친 국왕에 대해 반정할 수 있다는 사림의 논리와 결합하여 국왕의 입지를 매우 좁혀놓았다. 16세기전후의 사화라는 정치적 시련 속에서 오히려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이들 사림세력은 정·주 성리학에 입각하여 수기치인의 학, 즉 성학을 국왕의 자격조건으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국왕도 주희가 세운 대일통의 의리(宗法·禮義)를 따라야 한다는 논리로 왕권의 약화와 신권의 강화를 정당화하였는데, 이는 결국 임금과 각 붕당을 대표하는 신하가 함께 통치한다는 군신공치주의로 체계화되었다(이태진, <奎章閣小史>,규장각소사, 1990, 222~225). 이 같은 사대부들의 군신공치주의와 붕당정치론에 대해 국왕들은 다양하게 반응하였는데, 숙종의 경우 선조와 비슷하게 주로 붕당을 번갈아 교체하는 방식으로 막강해진 신권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런데 숙종의 물갈이식 정국 변동은 오히려 붕당간의 대립을 가열시켰으며, 각 붕당원이 자신의 생존과 가문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당론을 충실히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과연 어느 당의 주장이 옳은가'를 판정하거나 붕당간의 대립을 중재할 수 있는 국왕의 위상이 약화된 상황에서, 서로 '순정 성리학도'를 자처하는 색목들 사이의 대립은 '의리를 내건 전쟁'으로 치닫곤 했다. 특히 왕위계승 문제가 불확실하거나 왕권이 취약한 상황에서 붕당들은 후계자 선정과 관련하여 특정한 왕위를 선택적으로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남인과 소론의  경종 지지, 노론의 영조 지지가 그것이다. 이처럼 신하들의 왕위 대한 선택적 지지는 전통적인 군신관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으로서 이 시기 '군신관계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태진, <奎章閣小史>,, 규장각소사, 1990, 226)

  2) 박세채·채제공의 탕평론

박세채

채제공

 숙종조의 박세채(1631~1695)는 이러한 군신관계의 위기속에서 붕당정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론만이 군자당이라는 주장을 부정한 선국적 탕평론자이다. 박세채는 숙종 14년에 올린 시무책에서 "역대의 화란(禍亂)이 붕당에서 많이 비롯"되었다고 보고 "우리나라의 당론은 뿌리가 깊고 근본이 굳은 것이 다른 시대오 달라서 본래 모두 사류에서 나왔으나, (결국) 나누어져 배치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박세채는  "당론이 서로 격해져서 인심이 점차 어긋나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국가를 해치고 군부를 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는 " 상황이 되었음을 개탄하였다. 따라서 그는 "반드시 전일의 소견을 통쾌하게 고치어 마음과 창자를 씻고 한결같이 붕당을 타파하여 같은 덕으로 중도(中道)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정조시대 탕평파의 대표적 인물인 채제공 역시 "천하의 근심은 나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천하의 어려움도 나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삼대의 성시에서는 위로는 조정에, 아래로는 민서에, 밖으로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을 하나로 하여 그 극에 들어갔다. 그 때에는 오직 하나일 뿐이었다" 고 하여 강력한 국왕 중심의 통일된 정치를 주장했다. 정조 역시 "나의 골똘한 일념은 무조건 인정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일도 없고 , 남과 나라는 간격을 두지 않음으로써 당파가 없는 큰 단합을 이룩하는 데 있다"고 하여 자신의 "세상 다스리는 요체"가 바로 탕평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3) 탕평론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응

 이에 비해 노론 계열의 인물들은 정조의 탕평책을 외면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응교 조제로는 당시 사대부들의 탕평론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성왕의 뜻을 계술하려는 마음은 비록 간절하나 받들어 돕는 사람이 없어서 당파를 없애라는 하교만 빗발칠 뿐, 한쪽으로 기울고 반목하는 습속은 전과 다름없고,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이미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공을 등지고 사를 도모해서 문득 집안을 위한 계책을 만들어 놓은 다음, 준열한 의논이 허락되면 은연중 마치 좋은 제목을 얻은 것처럼 하며, 우리 열성조가 세워놓은 정치의 표준을 어떻게 해서든지 무너뜨리고, 성조의 (탕평의) 뜻을 따르려는 우리 전하의 의지를 반드시 저지시키고자(합니다)(11/4/11 戊申).

 "말이 탕평에 미치면 숨겨서 가리우기를 마치 부끄러운 일처럼"했다는 조제로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조 이래 추진된 국왕의 탕평책은 노론을 중심으로 한 많은 사대부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는 노론 계열의 연암 박지원이 "조금이라도 탕평책에 찬성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익을 좇는 비열한 인간으로 간주했다"고 말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붕당론에 대해 탕평론자들은 붕당이 공론을 왜곡한다는 논지로 붕당정치를 비판하였다. 예컨대 재위 15년에 사간 이운빈은 "당파의 명목이 생기고부터 아부하는 마음이 우세하여 그 취향과 의론이 서로 비슷한 자는 그저 두둔해주고 원만하기만을 요구합니다. 설혹 가볍게 충고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말하는 자는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당한 사람은 자기에게 유감이 있다고 여깁니다(15/2/13 戊午)"라고 상소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바른 말을 할 책임"조차도 "당파의 버릇과 사적으로 아부하는 폐단이 날로 심해지고 "있어서 "자기 편을 편들고 다른 편을 공격하는 " 소굴로 변질되었음을 지적하였다(15/2/13 戊午). 정조는 또한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여 비판을 하지 않는 자, 자신의 자취에 혐의가 생길까 두려워 말하지 않는 자, 추고·체직·파출·삭직등의 죄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헤아리기 어렵고 애매한 죄인에 대해서만 앞장서서 나서는 자"들을 무겁게 처벌할 것임을 밝혔다(15/1/26 辛丑).

 요컨대 정조는 노론의 이분법적 붕당관 때문에 "좁은 나라에서 색목을 이유로 사람을 버리게(0/9/22 庚寅)"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보고 , 탕평책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붕당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그는 또한 극심한 당쟁 속에서 "스스로 충신과 역적의 의리 사이에서 보존하지 못할까봐 당초부터 함구하는 것(5/2/29 壬申)"이 하나의 풍토를 이루고 있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정조가 정치의 표준을 바로 세우는 한편, "두루 포섭하고 공평하게 등용하는" 탕평의 이념을 자신의 정치적 목표로 내세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조의 정치관은 각종 탕평 조치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以熱治熱 및 大承氣湯의 방식으로 일컬어진 정조의 정치기술은 정치가로서 그의 모습을 보다 잘 보여준다.

 Ⅲ. 정조의 인사 정치

 정조시대 인사부문의 탕평책은 붕당간의 '의리'와 '인재'를 혼합조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정치에서 정당성의 의미를 중시하여 이른바 '의리의 탕평책'을 전개하였다. 의리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정조 자신의 말에서 나타난다.

 단지 탕평 두 글자만 쓴다면 혼돈하게 될 염려가 없지 않다. 〔…〕탕평은 의리에 방해되지 않고 의리는 탕평에 방해되지 않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탕탕(蕩蕩)평평(平平)의 큰 의리라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곧 의리의 탕평이지, 혼돈의 탕평이 아니다( 0/5/16 丙戌).

  여기에서 정조가 영조시대의 '혼돈의 탕평'과 구분하여 자신의 정치를 '의리의 탕평'이라고 새롭게 규정한 것은 일차적으로 영조 후반기에 탕쳥책이 "왕의 인척고 권간"에 의해 악용됨으로써 세간에서 "탕평을 주장하는 당이 옛날 당보다 심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게 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각 붕당의 명분과 개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존중해줄 때 비로소 사대부들의 국정 참여가 가능해지고 참된 성왕의 정치도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격심한 당쟁과 환국정치의 와중에서 난역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폐색되어 있는 주요 색목의 영수들 및 그 후손들을 국정에 참여시킬 때 비로소 정조 자신이 추구하는 대통합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1) 이열치열의 통치방식

 정조는 집권 후기에 접어들어 자신의 정치운영 방식을 한의학의 용어니 '이열치열(以熱治熱)'과 '대승기탕(大承氣湯)'으로 지칭하곤 했는데 전자가 숙종조의 '환국방식의 탕평책'과 대비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여조의 '완론 중심의 탕평책'에 대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국의 정치에 해당하는 이열치열의 통치방식이다. 정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숙종의 환국방식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이열치열의 통치방식으로 불렀다. 이열치열식의 통치방식이란 한 당파에서 반역자가 나오면 그를 반대당파의 반역자와 대비시켜 다스리고, 한 당파에서 충신이 나오면 반드시 반대당파의 충신과 대비시켜 표창하는 일종의 대국의 통치방식을 뜻한다. 이에 반대되는 것이'이수치열'의 방식인데 이것은 한 당파의 반역을 다른 당파의 충성과 대비시켜 반역자가 나온 당파 전원을 제거하는 물갈이 방식으로 숙종이 자주 사용한 '환국의 정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에 대해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찍이 숙종조에 있어서 당파의 습성이 점점 고질화 되어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상의 뜻에 따라 이쪽이 저쪽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이쪽만을 등용하였고, 혹은 저쪽이 이쪽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다시 저쪽만을 등용하였다. 우리 선왕조 초기에는 싸움만을 서로 일삼고 , 엉킨 감정을 풀기 어려웠다. 선대왕이 보존하고 감화시키는 교화로서 탕평책의 정사를 행하여서 후손들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나에게 남겨주었다(8/12/8 己丑).

 다시 말해서 "당파의 습성"을 깨뜨리기 위해 숙종이 "오로지 이쪽만을 등용하거나 다시 저쪽만을 등용"하는 환국의 정치를 실시하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붕당간의 격렬한 싸움을 촉발하고 대립하는 가문끼리의 감정을 엉키게 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잦은 정국 변동이 오히려 붕당들의 불안감을 조장하여 붕당 지도자들로 하여금 특정한 왕위를 선택적으로 지지하여 안전판을 구축하려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예컨대 숙종조 말기의 남인과 소론의 경종지지, 노론의 영조지지가 그것이었다.

 영조는 제위 31년에 "모든 일을 통쾌하게 하면 폐단이 생긴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름지기 이를 명심하여 통쾌함이라는 한글자를 마음에 두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나주벽서사건(을해옥사)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 동안 지양해왔던 '환국의 정치'로 영조 자신이 다시 회귀하고 말았다는 자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탕평론의 정치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 즉 "통쾌한 정치'는 일시적으로 후련하고 가시적인 효과를 가져올지 모르나, 그것은 곧 또 다른 정치적 후유증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특히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동기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 정치세계를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세력으로 획일화시키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극히 위험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2) '대국의 정치'와 '소통의 정치'

왕위에 오른 정조는 이 같은 정치관에  자신의 독특한 이열치열식의 대국적 정치를 추진하였다. 즉위한 직후에 정순왕후의 동생 김귀주가 이끄는 "남당(南堂, 공흥파)"과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 이끄는 "북당(北堂, 부흥파)," 즉 대립하고 있던 두 외척 세력을 대역부도죄와 관련하여 한꺼번에 제거한 것이나, 집권 중반기에 노론이 천주교와 관련된 남인계를 공격하자 이른바 '문체반정'을 통해 노론계신하들의 학문 풍조를 속학이라 하여 동시에 견제했던 것이 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문체반정에서 노론의 정통 주자 성리학과 남인의 원시유학의 장점을 동시에 수용하여 바른 학문의 내용으로 삼았는데, 이 조치 역시 이열치열식 탕평책의 일환이었다.

 이열치열식 탕평책은 과거 당쟁이나 역모에 연루되어 침체되어 있는 정치범들을 재등용하는 '소통(疏通)의 정치'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같은 소통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치보복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고 침체되어 있는 인재를 적극 등용하려는 정조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정조는 이를 위해 역모와 관련하여 사형되는 숫자를 최소화하는 한편 대신 이들을 고향으로 축출하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연금 상태에 두는 온건한 처벌방식을 택했다. 이들은 일정기간이 지난 후 국왕의 대사면령에 따라 명예가 회복되고 다시 중용되곤 하였다. 재위 17년 정파에 구분없이 죄명을 벗겨주고 벼슬길을 터주면서 이것이 이열치열과 관련된 조치임을 정조가 밝힌 것이 그 예이다. "근일 소통시키는 일은 잘 이루어졌다. 병신년(정조 즉위년, 1776)에 역적을 다스리면서 이열치열의 방법을 썼기 때문에 그래도 남아난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수치열의 방법을 썼더라면 아마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17/4/16 戊寅 ;17/5/7 戊戌).

3) 시비론적 정치관에서 우열론적 정치관으로

정조는 이 같은 이열치열의 탕평책은 시비론적 차원에서 벗어나 우열론의 관점에서 정치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의 전환은 당쟁의 결과와 그에 따른 후유증이 심각하던 숙종 말기 박세채등에서 비롯되었다. 박세채에 따르면 정치·정책의 판단에서 중용한 것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라는 시비론이 아니라 '누구 의견이 더 우수한가' 하는 우열론이다. 즉"당세의 인재를 통해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적 조건이라면, 국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란 보다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그들의 의견을 채택하는 것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박세채의 이 같은 우열론은 주희의 기본원칙, 즉"붕당별로 의리와 인재를 분별한다"는 분별론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붕당간의 인재를 조제한다"는 이이의 절충론을 계승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열치열의 탕평책은 이이의 이 같은 절충론과 박세채의 우열론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서 이념적 대립 구도로 경직되어 있던 당시의 정국에서 벗어나 실제적 우열의 차원에서 유능한 인재를 초당파적으로 골라 쓰도록 하는 조치로 나타났다.

 정조 22년에 응교 이익모도 같은 맥락에서"인재란 다른 세대에서 빌리지 않고 결국 당세의 인재를 쓸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면서 지금 중요한 것은 "인재를 기르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재에는 크고 작고 치우치고 온전한 것이 있는데 그 중 크고 온전한 것은 진실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작은 인재의 경우도"어느 한 가지에 전념하게 하고 오래 단련시키면 반드시 "쓸모있는 인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2/1/11 丙子).

 그러나 정조시대 노론의 신하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부분 국왕의 탕평책을 반대하거나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국왕의 탕평책이 정치원칙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관직을 붕당별로 비례하여 배분해 무능한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14/3/28 戊申). 예컨대 김종수는 나아가 "군자이면서도 결함이 있는 자가 많고 소인이면서도 재주가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군자를 버리고 재주가 있다는 이유로 소인을 등용하면, 이것은 현사가 도치되고 국가가 난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여 실용적인 측면에서 부족함이 있더라도 군자만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11/17 己亥).

4) 대승기탕의 탕평책

 둘째, 중재의 리더십으로서 대승기탕의 탕평책이다. '대승기탕(大承氣湯)'의 탕평책이란 매우 능동적인 인사정책으로서 국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君)과 반대하는 세력(佐)을 맞서게 하되 두 정치세력을 매개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제 3의 세력(使)을 함께 등장시켜 서로 조화를 이루고 각기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정조는 오랜 당쟁으로 인재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대부의 원기가 크게 침체된 것을 당시의 심각한 병통으로 간주하고 이를 대승기탕의 탕평책으로 치료하려고 했다. 즉 "대체로 고질병에는 다소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효험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지금의 풍속을 통해서 지금의 폐단을 구원하려면 어찌 대승기탕에 좌·사의 두 맛을 가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정조실록》17/4/22 甲申) 라고 하여 '중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

 집권 초기(1/5/28)에 노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소론시파의 서명선(君)과 노론의 정존겸(佐)을 맞서게 하는 한편, 탕평당 계열의 김상철과 남인 채제공을 중재세력(使)으로 이용하였다. 집권 중반기에도 남인의 채제공(君)과 노론의 김종수(佐)를 맞서게 하는 한편 이성원·이재협등 소론세력(使)을 이용하여 중재케 하였는데 이 같은 인사 배치는 대승기탕 탕평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집권 중반기의 대승기탕 구도에 대해서 정조는 "당목이 있은 이래로 삼상이 오늘과 같은 때는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일 듯하다"면서 "스스로 자부"할 정도로 만족해 하였다.

 그러나 대승기탕의 탕평책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대승기탕의 탕평책을 추진하였다가 실패한 대표적인 예로는 재위 13년에 국왕 지지세력(시파)인 남인의 채제공을 좌의정으로, 반대세력(벽파)인 노론의 김종수를 우의정으로 맞서게 하는 한편, 소론의 이재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채제공과 김종수를 중재·조화시키려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정조는 채제공을 통해 '임오의리(사도세자가 모함을 받아 죽었다는 입장)'를 세우고 각종 경장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김종수의 비판적  참여를 통해 노론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이재협이 양자를 중재하기는커녕 오익환을 사주하여 국왕의 '탕평책' 및 '장용영설치'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정조의 의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일상적인 대간의 상소에 불과했던 오익환의 소에 대해 "말의 뜻이 참독하다"면서 이례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점, 즉 이 일은 "결코 그가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하여 오익환을 전격적으로 삭직시킨것이나(12/1/29 壬辰), 이재협에 대해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정조실록》12/2/6 己亥)"는 이유로 파직시킨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승기탕의 방식은 이열치열 방식과 마찬가지로 국왕의 탁월한 통합력과 신뢰성, 즉 성왕의 정치를 전제로 하는데 왕권이 강화된 중반에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집권후기에 들어서 장용영 설치와 수원성 건설등으로 국왕에 대한 노론 벽파의 의구심이 커지고 (신뢰성 상실), 종친문제(은언군)로 인해 노론 벽파의 국왕이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등 정국이 경색되면서(통합력 위축) 대승기탕의 탕평책은 그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5) 위민론과 서얼허통정책

이 같은 인사분야의 개혁조치에 대한 비판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추진한 정책 중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서얼허통정책이 그것이다. 노비제 혁파 노력과 함께 정조시대 획기적인 조치의 하나인 서얼허통정책은 다음과 같은 국왕의 백성관에서 그 발단을 찾을 수 있다.

 정조는 재위 2년 6월의 '경장대고'에서 개혁의 대의를 "선왕의 뜻"에서 찾았다. 즉 "선왕의 대도를 강구하고 선왕의 옛 법을 수복하는" 이야말로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이며, 그 것은 구체적으로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는 정치" 또는 옛 "성왕들이 백성들과 함께 은택을 누리려는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국왕의 좋은 뜻은 즉위 초반의 국정운영 방침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기강이 문란해져 당폐가 존엄해지지 못하고 언로가 막혀 강직한 말을 들을 수 없으며, 난역이 잇달아 생겨나 의리가 더욱 어두어진" 상황에서 국왕의 말이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한낱 "공언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득권세력의 반발과 저항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과 정당성이 확보될 때만이 경장정책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조시대의 개혁정책은 정조의 정치력, 즉 정당성과 권력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잇는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조가 천명한 '경장대고'에는 그의 정치관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성들을 위하고" "백성들과 함께 은택을 누린다"는 '위민의 정치론'이 그것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나 "하늘이 임금을 만들고 스승을 만든 이유는 백성을 위해서 " 라는 말 또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3/8/3 甲寅)."라는 정조의 말에서도 그의 위민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백성들과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는 함께 즐길 수는 있으나 일의 시작을 함께 꾀할 수는 없다(22/4/27 辛酉)"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정조는 백성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수혜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의 주체는 국왕과 사대부로서 앞의 탕평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중심적 역할을 국왕에게 설정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다만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는데, "안에서 나의 미급한 점을 도울 사람들은 묘당과 삼사이고 밖에서 나의 분부와 명령을 선양할 사람은 방백과 수령들(7/7/2 辛卯)"이라는 말이 그 예이다. 그는 또한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의 관계를 "달빛·구름·산하"에 비유하면서 달빛과 산하 사이에 구금이 가리지 않아서 밝은 달빛이 "산하"에 환히 비추는 것을 좋은 정치로 비유하고 있다(7/6/15 乙亥). 말하자면 "한 집안의 사람"이자 "다 같은 동포(0/9/22 庚寅)"신민들이 오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아버지이자 스승인 국왕 자신이 적극적으로 역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얼허통이나 노비제 폐지 등의 개혁 시도는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각종 경장정책 역시 그의 성왕론의 관점에서 볼 때 보다 절실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6) 정조의 '서류허통절목'과 반대론

정조시대의 서얼허통정책은 바로 이 같은 "백성은 나의 동포"요 '한집 식구로 "보는 정조의 백성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능한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는 임용방침에 따라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영조시대부터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된 서얼허통 문제는 관직의 수가 양반수에 크게 못미친다는 사실과 , 사대부 집안 내 적·서자 간의 다툼과 혼란을 이유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정조는 재위 1년 3월에 "필부가 원통함을 품어도 하늘의 화기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인데 하물며 허다한 서류(庶流)들의 원통함을 이대로 방치시킬 수 있겠는가," 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한 서류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와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을 임용하라는 '서류허통절목'을 공표하였다(1/3/21 丁亥). 그러나 이 같은 왕의 지시와 절목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제적 적용은 용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관직은 한정되어 있는데 양반수가 계속 늘어나 "백성들 가운데 사족이란 명색의 사람이 거의 10분지 4나(2/6/23 辛巳)" 될 정도로 많았던 상황에서 서류까지 자기들의 경쟁대상에 끼워줄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서얼허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가정에서 적·서자 간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사대부 가정문제에 대해 국왕이 간여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사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허통을 계속적으로 독려하는 한편(5/6/22 癸巳 ; 9/2/24 甲辰) 지속적인 서얼허통정책을 추진하여 "선천 내금위를 중인과 서얼들로 뽑도록 하고" 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 서류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는 등 적서에 구애됨없이 유능한 인재를 적극 등용하였다. 또한 재위 6년 6월에는 교서를 내려 "유임·향임에 대해서도" 서류를 소통시킬 것을 명하였다.  

 중앙에서의 이와 같은 정책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의 서얼허통은 사실상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의 '정유절목'이 하달된 지 3년이 된 시점에 있었던 영의정 김상철의 다음 말이 그 증거이다. "서류허통의 문제에 관한 윤음을 특별히 조정과 민간에 내려 보냈는데 이조께서는 대개 봉행하나 외방에서는 비록 향임·교임이라 할지라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7) 삼남지방의 적서충돌

 지방 차원의 서얼허통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부각된 것은 재위 3년 8월 황경헌등 경상·공충(충청)·전라도의 서얼 출신 유생인이 상소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우선 서얼 금고 관행이 "일개 선비인 서선의 유감과 개인적 감정"에 서 비롯된 것으로서 "삼대의 법 또는 단군·기자나 조선 국초의 법도 아님"을 지적하였다. 이들은 또한 선조 ·영조의 뜻을 이어 현재의 임금도 서얼을 "동서 양전에서 청직에 통망케"하였음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황경헌 등에 따르면 이 같은 조정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서얼허통이 지방에서는 전혀 시행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유절목'이 하달된 그 해(정조 1년)가을에 다음과 같은 '반궁의 통문'이라는 "괴상한 글"이 나돌았다는 것이다.

'작년 이후로 조정에서는 대망에 주의하지 않고 성균관의 연령별 명단기록은 이미 파기하였다.' 따라서 '각 고을의 향교와 서원에서는 글안에 기록된 이름을 베어내고 임장을 사태시켜 서류들로 하여금 향교·서원에 발을 못 붙이게 하라,'〔…〕 (이처럼)향학의 종이 한 장이 번개처럼 날아가자 삼남이 부화뇌동하여 이미 합쳐진 신 등의 유록을 베어내고 이미 함께한 신 등의 鄕案을 불태우고는 욕설을 퍼부어 쫓아냄으로써 신등을 다시는 학궁에 발을 둘여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정조실록》, 2/8/1 戊午).

  "삼남이 부화뇌동하여" 이미 통합하여 등록된 황경헌 등을 유록에서 삭제하고 향안을 불태웠다는 것을 통해서 볼 때 당시 지방에서 적·서자 간의 갈등과 대립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방의 적자 출신 양반들은 성균관에 서류 가 못 들어간다는 것을 핑계 삼아 지방의 양반 리스트라 할 수 있는 향안명부에의 등록을 거절한 것이다. 황경헌 등의 상소에 대해 정조는 "너희들의 사정이 진실로 딱하기 그지없다"  '정유절목'을 재차 강조하였다.                   

 정조는 1785년(정조9)"3조의 낭관과 해당 관사의 판관 자리"와 같은 요직에 서얼을 임명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 하교에서 성균관은 물론"청직을 제외한"모든 관직에 서얼을 허통시킬 수 있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신 가운데 3조의 낭관을 지낸 사람은 겨우 한두 사람에 그치고, 음관 가운데 판관은 전혀 미명되거나 의망 "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지적되는 것을 볼 때 서얼허통 정책은 그때까지도 실제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8) 성균관에서의 갈등

재위 15년 4월에는 성균관의 적서차별 문제가 제기되었다. 성균관 식당에서 서류 출신들을 남쪽 줄에 따로 앉게 하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정조는 대사성 유당을 불러"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준수한 자가 모두 성균관에 들어가면 왕공 귀인도 그들과 더불어 나이에 따라 차례로 앉게 하는것"인데,"당당한 성균관으로서 어찌 유독 서얼만 따로 남쪽 줄에 앉게 하고 같은 줄에 있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라고 책망하였다. 다음달에 이 문제는 채제공에 의해 다시 거론도어 '나라의 일은 평등하게, 그러나 가정에서는 차등있게'라는 원칙으로 정리되었다. 채제공에 따르면"태학의 식당에서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나이의 순서대로  동등히 앉게 한 것은 실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정치"이지만, "집안에서는 적자와 서자가 엄연히 차등이 있으니" 이점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조정에서는 재주가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서얼"일지라도 유능한 자는 적극"진출"시킬 수 있지만 , "집안에서는 적자와 서자가 엄연히 차등이 있으니 이 점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에 대해 "경이 아뢴 말이 매우 좋다. 학교는 학교이고 가정은 가정이다. 만약 이일을 끌어다가 저 일에 적용하여 분쟁의 단서를 만든다면 지금 100년을 내려온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으려는 좋은 뜻이 도리어 폐단을 만드는 빌미가 될 것이니, 서로 예로써 상대하고 분수에 따라 몸가짐을 갖게 하여 화평한 복을 다함께 누릴 수 있게 하라"고 타일렀다. 요컨대 적자와 서자의 관계는 사대부 문중의 문제로서 질서유지를 위해 차등을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유능한 인재를 고리게 등용해야 하는 국왕의 입장에서 볼 때 적·서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모두 "같은 핏줄"이요 국가라는 "한 집안 식구"이기 때문에 결코 차별을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조의 대민관은 노비 추쇄관을 혁파하고 노비제를 개혁하려 했던 노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정조의 탕평정치에 대해 알아보았다. 간략히 요약하여 평가 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조시대는 성리학적 붕당관, 즉 '공론을 형성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잘 다스리도록 돕는다'는 본래의 의미가 퇴락하고, 붕당이 각 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권력투쟁의 전위조직으로 변질되었다. 영조시대 이후 붕당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른바 탕평정치론이 설득력을 얻어간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각 붕당이 서로의 '의리'를 인정하지 않고 독존적인 붕당론만을 내세우며, 상대당의 영수를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결과적으로 "정치 안에서 친구를 사귀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정조가 "우리 나라에는 본래 병란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편당의 명목을 만들어 서로 함께 주륙을 해왔다"면서,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이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붕당간의 대결이나 애매한 모반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그것을 중재하고 시비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절대적 힘이 존재한다면, 싸움의 상태가 줄곧 계속되는 일이 그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정조가 요순시절 성왕의 정치를 재해석하여 강력한 국왕 중심의 탕평론을 주장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둘째, 이런 의미에서 정조의 탕평론은 국왕 자신이 천명한 '성왕의 정치'를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기 위한 실천방안이자 동시에 지향 이념이었다. 공평하고 중립적인 국왕이 초월적인 위치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치세력을 중재하고 시비를 판명함으로써 화해와 협력의 정치를 달성하려 한 탕평정치의 지향 모델은 일찍이 삼대 시설에 요·순을 도덕적 모범자로 규정하고 탈정치화된 국왕으로 간주하는 당시 노론 신하들의 성왕관, 즉 '성학론'을 부정하였다. 정조나 정약용 같은 성왕론자들에 따르면 요순은 "홍작에 분발하여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시켰을"뿐만 아니라, "정밀하고 엄혹하여 천하 사람을 공손하게 움츠리고 두려워 떨게 하여 일찍이 털끝만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한" '강력한 정치가'였다. 유가적 전통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로 일컬어지는 요·순을 이처럼 적극적이고 개혁지향적인 정치가로 재해석하여 자신의 개혁을 정당화하고 총체적인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려 한 정조를 비롯한 성왕론자들의 시도는 개혁정치의 정당성 확보와 관련하여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셋째, 정조는 개혁정치가로서 요·순을 재해석하면서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예컨대 그는 당쟁의 근원이 되었던 이조전랑과 한림이 통치권을 약화시키는 대신 국왕이 통제할 수 있는 이조·병조의 판서와 참판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임금과 백성 사이에서 농간부리는 중간 세력의 발호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부분의 국정을 직접 관장하여 일일이 확인하는 친정과 무일의 정치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관료제의 기강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관료제 내부의 견제장치를 무너뜨려 세도 정치 출현을 조건을 형성하였다.  양사(사간원·사헌부)와 홍문관의 언론을 주도하는 이조전랑을 국왕의 통제 아래 두고, 사관(한림)까지도 국왕의 정치적 존립기반을 오히려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국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구조와 "고가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운영 방식은 국왕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공론정치의 붕괴와 견제장치의 부재 속에서 절대화된 권력정치, 즉 세도정치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넷째, 정조는 붕당이 공론을 왜곡하는 현상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재임기간에 공론정치를 활성화하지 못했다. 오히려 관료제 기강론을 내세워 공론정치의 토대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언관의 발언권을 제한하거나 금령을 내려 사대부들의 상소 자체를 막아버리곤 했다. 예컨대 그는 인사문제나 역적토벌과 관련하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해당 사항에 대해 금령을 내려 신하들의 상소나 차자에서 언급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국왕의 자의적인 통치와 독주, 그리고 공론정치의 붕괴를 초래했다. 금령에 의해 공론이 위축된 결과 대소 신하들은 물론 언관들까지도 왕의 눈치를 살폈고, 왕의 의중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데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국왕이 자신의 총명을 믿고 자만하여 "신하들을 가르칠 상대"로 보고 비판과 조언을 받을 상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의 말을 어기지 않는 것만을 낙으로 여기는 "상황이 되었다는 장령 오익환의 상소는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정조는 붕당으로 인해 힘든 상황속에서 정권을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인생역정에서 그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다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각양각색 당에서 인재들을 모아 정치를 했던 정조의 탕평책은 현 사회를 사는 지금의 정치와 비슷하다. 다양한 정당간의 세력다툼등이 지금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를 알면 지금 현재의 일을 조금이나마 점쳐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