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기(1945∼1984)

8.15 민족 해방은 한국천주교회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한국천주교회는 해방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해방된 민족을 위해 봉사하려는 결의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민족의 해방은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졌으며, 민족분단의 아픔은 한국동란으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해방 직후 교회는 복음을 민족에게 전하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교육 활동, 의료 활동 및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교회의 봉사는 한국동란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어 나갔다. 한편,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일어선 교회는 정식 교계제도의 설정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더욱 성숙될 수 있었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의 해에 이룩된 103위 한국순교성인의 시성은 한국교회의 순교전통과 성숙된 교회의 변모를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민족과 인류를 위한 복음화와 봉사의 책임을 다시금 확인해야 할 시점에 서있게 되었다.

해방 축하식 초대장
1945년 8월 15일 성모몽소승천첨례날 한민족은 광복되었다.
이 해방의 기쁨은 교회에도 넘쳐 흘렀고, 교회는 교육사업,
사회사업들을 새로운 의욕으로 착수하여 해방된 민족을 위한
봉사의 자세를 다져나갔다.

교회의 연합군 환영식:
1945년 9월 26일 교회는 한민족에게 해방을 선물한 연합군을 명동성당에 초청하여 환영식을 베풀었다. 이 환영식은 감사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괴(自愧)의 표출이기도 하다.

폐허와 성당
1950년,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이었던한국동란으로 우리 겨레는 또다시새로운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다.민족의 한(恨)과 증오는 파괴를 가져왔지만,이 한과 증오를 극복해 나가야 할교회가 자욱한 포연(砲煙) 속에우뚝 남아 있다.
1950년 9월 15일연합군의 인천상륙 직후답동성당

인천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원의 폐허
한국동란은 많은 교회시설을 황폐화시켰다.
인천에서 해성보육원과 해성의원을 운영하며 사회 봉사활동을 펴고 있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도 전화(戰禍)를 입어 무참히 파괴되었다.

덕원 수도원의 폐허
수도원의 웅장한 자태가 앙상한 벽면과 몇 무더기의 재로 변할 때 우리의 아픔은 더해 갔으며,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는 북쪽 형제들의 외침은 커져 나갔다.

수녀들의 피난길
그들은 평범한 아녀자가 아니다. 거룩한 수도복이 그들의 몸을 감싸주어 왔으나,  공산 치하에서 탈출하여 피난길에 나선 수녀들은 수녀복을 입을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피난길에 들어선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은 머리에 인 보퉁이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겨레의 비애를 안고 있었다.


수녀들의 귀환
1953년 휴전이 체결된 후 납치, 구금 중에도 살아남은 일부 선교사들은 석방되어 자신의 뼈를 묻을 한국 땅을 다시 찾았다.(사진:우)

군종신부들의 활동
1953년 휴전 직전, 전선에서 군종신부가 세례를 집전하고 새 영세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포화 속에서 싹튼 신앙은 포성 속에서 결실을 맺었고, 휴전 직전의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가톨릭구제회의 구호 활동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교회의 구호활동은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구호품은 전재민의 언 가슴을 녹혀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톨릭구제회(N.C.W.C)의 활동은 계속되어 이 땅의 전재 복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교계제도의 설정

1962년 3월 10일 한국천주교회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포교지의 어린 교회를 벗어나 세계교회의 일부로 어엿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한국교회는 또 다른 성장의 계기를 맞이했다.

한국순교복자 24위 시복식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1만여명의 신도들 중 24명이 복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1968.10.6)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
1969년 김수환(스테파노) 서울 대교구장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추기경의 서임은 한국교회의 경사였고, 인류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사명을 확인한 것이었다.



수녀들의 봉사활동
달동네의 수녀들. 수녀들은 병든 이웃과 자라나는 영혼을 위해 병원과 학교에서 봉사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서 본당사목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한 이의 일부가 되어 물지게를 지고 이 가파른 세상의 언덕을 오르고 있다.

 공의회와 한국교회: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났다. 공의회 정신의 도도한 물결은 이땅에도  넘쳐 흘렀고, 신도들을 향해 한국어로 집전되기 시작한 미사전례의 변모보다 더욱 큰 내적 변화를 공의회는 한국교회에 선사하였다.(1970년대 대구 계산동 성당의 미사 광경

현대의 교회와 신도들: 1982년 여름 어느 일요일 서울의 반포성당. 아파트 숲속에 들어선 도시의 교회는 단절을 강요하는 마음의 옹벽을 허물고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를 나서는 신도들의 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70년대의 한국사회와 교회

1970년대 교회에서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확인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강하게 일어났다. 기도와 시위를 통해 교회는 기본 인권을 전취하고자 했으며 민주회복을 주장하였다.(1974.11, 명동성당의 기도회)

 


70년대의 목소리
정의구현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각종 선언문과 건의서 그리고 호소문들은 70년대의 우렁찬 목소리였고 굵은 파문(波紋)을 남기고 메아리로 이어진 외침이었다.

조선교구설정 150 주년기념 신앙대회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기념신앙대회가 열렸다.
 "와서 보시오"라는 이신앙대회 표어에서처럼 한국교회는 이를 계기로 하여  적극적 선교의 자세 를 분명히 하였다.
전국 교구의 주교들이 합동으로 봉헌한 미사에서 신도들과 함께 이웃을 향한 봉사의 자세를 확인하였다.

150주년 신앙대회 기수단의 입장
교구가 설정된 이후 150년을 걸어온 한국교회의 각 교구와 단체를 표상하는 깃발들이 들어오고 있다. 영원을 향해 가는 순례의 길을 이끌어 온 이 깃발들의 행렬은 앞으로 전개될 또다른 시간대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한국인선교사의 활동
1983년 한국인 선교사가 파푸아 뉴기니아의 마당 교구에서 성당을 짓기 위해 합판을 손수 톱질하고 있다.

한국외방선교회 선교사의 활동
1975년 "한국외방선교회"가 세워졌다. 이제 한국 교회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파푸아 뉴기니아에 파견되
어 사목에 종사하며 원주민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집전하고 있다.

  103위 성인을 탄생시킨 기도의 힘: "두 사람이나 혹은 세 사람이 나의 이름을 위하여 모인 곳에는 나도 그 가운데 있으리    라."(마태 18,20) 신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한국교회는 성장해 왔다. 한국 순교자의 시성을 위해, 이웃을 위해
   그리고 민족의 화해를 위해 올리는 이 기도의 모임에 연 100만명을 웃도는 신도들이 참가하였다.

  교황과 소녀
  소녀들의 환한 마음이 1984년 5월
  한국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맞이하고 있다.
  비바 빠빠 꼬레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방문
4000년의역사 전통이자리잡은 땅,
순교자의 피가스며든 거룩한 땅,
겨레의 한(恨)과 슬픔이 서리고
긍지와 희망이 꿈튼 이 땅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입을 맞추다.
1984.5,

그리스도의 대리자 종들의 종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종들의 종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땅을 찾아 한국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과 포옹하며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200년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신앙대회 및 한국순교성인 103위 시성식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했다,"이제는 여러분이 증거할 차례입니다" 라고

 

한국성인의 탄생
1984년 5월 6일103명의 한국성인들이 탄생하였다.순교자의 장렬한 죽음 위에서 이날시성의 영광이 꽃피우게 되었다.
이를 위해 한국순교 복자의 시성을 기도하는 기도의 물결이전국에서 일어났으며, 로마의 추기경 회의에서 한국순교복자들의 시성이 청원되었다.그리고 교황과 주교들과 모든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한국순교성인에게 전구를 비는 간절한 기도가  올려졌다. 이제 순교자는 외롭지 않으며 그들의 유해는 영광의 제단 위에서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김대건 신부 유해의 입장

교황의 광주 방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5월 4일 광주대교구를방문했다.
함성과 금속성이 뒤범벅되었던 금남로의 길을 교황의 차가 지나고 있다.
소록도의 교황
가장 소외된 형제인 나환자를 찾아 교황은 소록도를 방문하였다. 병든 몸에 깃든 깨끗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교황은 먼길을 사양하지 않았다.(사진:우)

참다운봉사자의 삶을 살라
교황은1984년 5월 5일 대구에서 사제서품식을 주재하며, 사제들에게 이웃을 위한 봉사에 완전히 참여하기를 촉구했다.(사진:좌)

노동자, 농민의 만남
교황은 노동자와 농민들을 만나 노동의 참된 가치를 일깨우고, "일하는 사람"이  "일이 나은 산물(産物)"보다 소중함을 역설했다.
(1984.5.5 부산에서, 사진:우)

사목회의 의안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교회의 쇄신을 기하려는 다짐이 영글어 사목회의를 열게 하였다.
앞으로 전개될 또다른 200년의 한국교회를 전망하면서 12개 분야에 걸쳐 많은 문제들이 토의되었고 백성의 소리가 모두어졌다.

새로운 200년을 기다리며.

자료출처: 평화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