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운동기(1910∼1945)

리 민족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식민지의 노예가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광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일합방으로 한국교회는 일본 식민지 당국의 직접적인 규제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이 규제 아래에서도 교회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시기 새로운 교구들이 설정되었고, 여러 선교회와 수도단체들이 진출해서 이웃을 위한 선교와 봉사의 대열에 함께 참여했다. 그리고 교회는 애국계몽운동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각종 교육사업과 문화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족을 위해 교회는 그 봉사의 자세를 굳혔으며, 참다운 인간의 해방을 위해 복음을 선포했다. 집을 잃고 병든 이들을 보살폈고, 문맹자에게 글을 깨우쳐 주었으며, 어린이를 가르치며 미래의 꿈을 키워나갔다.

  신학생의 소풍
서울 근교에 소풍 중인 신학생들.
나라를 잃은 백성이었지만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는
뜨거운 결의는 어린 신학생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용산신학교
1887년 예수성심신학교가 서울 용산에 세워져 페낭(Penang)에 유학 중이던 신학생들이  귀국하여 이곳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 묘판에서 겨레를 섬길 씨앗들이 자라고 있었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11년 대구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대구교구는 1914년 10월 3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개교했다. 옹기장이의 영혼, 농투산이의 영혼, 장사치의 영혼도 왕후장상의 영혼처럼 소중하다. 이들을 위해 참 삶의 길을 전할 예비사제들이 이곳에서 학문과 성덕(聖德)을 닦고 있었다.

덕원신학교
1920년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서는 원산 옆 덕원에 신학교를 열어 그리스도교의 철학과 신학, 그리고 예술을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전했다.
 

 

  

 대구 해성악대
  1924년 대구에서 해성악대 (海星樂隊)   가 조직되어 음악을 통한  복음전파에
  한 몫을 맡았다.
  해성악대는  대구에서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서포의 예비신학생들과 노신부
1923년 미국의 메리놀 선교회가서북지방의 선교를 위해
이 땅에 도착했다.
평양 서포에 본부를 둔 메리놀 선교사도 그들의 한국인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학교
  겨레의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교회는 일제시대에도
  꾸준히 교육운동을 지속하였다.
  초롱초롱한 저 소녀의 눈빛에서
  미래의 희망이 싹트고 있다.
  계산동성당 부설 해성여자야학원
민중 속으로 파고 든 교회는
1920년대 민중교육 운동의 일환으로 야학
(夜學)을 설립하여 근로청소년과
문맹자들을 교육시켰다.

   활판으로 간행된 교회 서적
  신앙의 자유를 맞이 하자  순교자들이 읽던
  목판본 책들도 활판으로 인쇄되어
  널리 보급되어 나갔다.
  신앙의 자유가 커가듯이 서적의
  보급도 날로 늘어갔다
 
  나바위성당  부설학교
  교회의 문화적 기능 중 교육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   고 있다. 전북 익산군  나바위성당과 같은 한적한 시골   본당에서도 교회학교를 부설하여 학동(學童) 들을 가르   치고 있었다

원산교구의 해성(海星)학교 
1930년대 원산교구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던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수녀들이 교회에서 세운 해성학교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다.


 

    효성여자보통학교 교사
   효성여자보통 학교의 건물.
   여기에서 소녀들의 키와 함께
   배움이 자라나고 있었다
 
  1930년대의   주일학교
  어린이의 교리교육은 미래의 교회에 대한 투자이다.
  1930년대 함경도 지방에서도 나이많은 회장님 들이
  어린이에게 교리를 지도하며 자신의 신앙을 전수하고 있었다
어린이와 선교사
1910년대 함경도 지방에서 선교사들이 글을 깨우쳐 가는 어린이를 대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이 어린이에게서 미래의 희망이 움트고 있다

 

  

대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부설 보육원

치열한 박해 시대에도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던 한국 교회의 전통은
이제 큰 보육원의  설립을 통해
영글어 갔다.

 

  

  성모병원
  1913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병원의 설립이 발의
  되었다.
  1935년 문을 연 성모병원은 오늘날
  한국교회 모든 의료사업 기관의 모체가
  되었으며, 박해시대에서부터 전개되어
  온 의료봉사는  이제 이 땅에서
  활짝 꽃을 피우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주교들
1920년대 한국 교회를 위해 봉사
하던 서울교구의 뮈텔(Mutel, 閔)
주교, 드브레(Devred, 兪) 보좌주교, 대구
교구의 드망즈(Demange, 安) 주교,
그리고 덕원의 사우어(Sauer, 신) 주교 등.

 

  

  드망즈 주교의 승품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되고,
  교구의 책임자에는 <경향신문> 사장이던
  드망즈(Demange, 安) 신부가
  임명되었다.
  주교로 승품되어
  명동성당을 떠나고 있다.

 

  

풍수원의 성체거동
1930년대 우리나라
신자들은 성체신심이
특히 강했다.
당시 매년 거행되던
풍수원성당의
성체거동의 모습이다.
성체신비와 위력을
전하는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경상도 용평의 첫 영성체자: 1936년 첫 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이 그들을 지도하였을 교사와 함께 합장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굳게 다문 입술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순교자들의 전통을 따르려는 굳은  결심이 서려 있다.   약현성당의 혼배: 결혼은 거룩한 성사이다. 1929년 혼배미사    를 거행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약현성당의 김윤근(金允根) 신부

 

  

  장례행렬
  죽음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착하게 살다가  거룩하게 생을 마친
  한 신도의 마지막  길이
  약현성당에서  시작되고 있다.

 

  

성가대
1920년대 서울교구의 한 본당에서
활동하던 성가대.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전한
이들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선구자들이었다

 

  

  지방본당 회장대표
  1924년 지방본당의 회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회장들은 박해시대
  부터 성직자들 못지않게 교회를 위해
  봉사해왔다.
  한국 교회의 명맥은 이들의 희생적 노력
  을 통해 이어져왔으며,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효성여자보통학교의 체육 활동
대구 효성여자보통학교의 테니스부는
전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일제시대 교회는 부설학교의 체육 활동을
통해 억눌린 겨레의 힘을
키워나가려 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1888년 한국에 진출한 이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어린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믿음을 전하려
  노력하였고, 그들의 진정한 벗이
  되고자 하였다

 

  

덕원 수도원의 아침
밝은 햇빛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의 아침.
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덕원(德源)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서는
기도와 명상, 각종 사업으로 민족복음화의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1925년 7월 5일  바티칸 대성전에서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이 있었다.
  굳센 믿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긴
  순교자들은  이제 복자위에 올라
  동포들에게 사랑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전조선(全朝鮮) 주교회의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조선에서 사목하던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조선천주교회의 앞날을 의논하며,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과 출판활동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의하였다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대회
  기쁨은 겉으로 표현 되어야 한다.
  1931년의 조선교구 설정은
  한국천주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사건이었다.
  이 고귀한 신앙을 굳게 다지게 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의 기쁨은
  신자들의 집회를 통해 표현되었다.

 

  

노기남 주교의 승품
1942년 서울교구장으로 노기남 신부가 임명되었다.
첫 한국인 주교의 탄생을 알리며, 노기남 주교 승품식의 행렬이
시작되었고, 노기남 주교는 일제 말엽의 교회 탄압과
해방 직후의 혼란을 극복하며 1967년까지 서울교구장에
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