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기(1784∼1884)

국에서 간행된 한문 교리서적들은 우리의 선비들에게 천주교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신앙의 선조들은 이를 실천해 나갔다. 이로써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창설된 다음 100여년 간에 걸쳐 교회는 혹독한 탄압에 직면하였다. 이 탄압의 와중에서도 도처에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졌고, 천주교 신앙은 민중 종교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이 시대의 신도들은 삶을 위협하는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믿음을 키워나가며, 이웃에 복음을 전했다. 이 무수한 신앙인들의 노력에 의해 한국천주교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100여년 간에 걸친 박해는 참다운 신앙의 가치를 거듭 확인해 주었으며, 혹형에도 굴하지 아니했던 신도들의 용기는 우리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순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 땅에 우뚝 서서 참다움에 목말라 하는 겨레에게 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을 길러주고 있다.

 

의주의 변문과 수구
의주(義州)는 조선과 중국을 연결 하는 국경도시였다.
의주성(城)의 변문(邊門, 사진:좌)을 통해 중국의 문물이 조선에 전래되었고, 17세기 초엽 이후 천주교 서적이 들어왔으며,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이 문으로 신앙이 들어왔다.
의주성의 수구(水口,를 통해서는 조선의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1795년 이후 선교사들이 자신의 몸을 낮추어 숨어들었다

 

의주의 변문(邊門)
이 문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스며들었고,
이 땅에 스며들었고, 북경((北京)의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조선인 신도들이 드나들었다

 

 

 

초기 교회의 신도 생활
1800년대의 신도들은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당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초라한 초막이라 한들 그 신앙의
열기를 사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옹기를 만드는 신도
박해시대 산 속에  숨어든 신도들 대부분은
화전(火田)을 일구거나 옹기를 만들며 살았다.
그들은 삶의 애환이 서린 옹기에 신앙을 담아 이웃에 전했다.

 

 

주뢰
신자들의 배교를 강요한 형구(刑具). 영조(英祖) 때에 사용이 제한되었으나 천주교 신자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기 위해 이 형구가 다시 등장했다.

상복을 입은 선교사
하늘과 사람을 대하기 민망한 상인(喪人)의 복장으로 박해시대의 선교사들은 자신의 외모를 감추고 선교에 임했다. 그들은 박해자의 무지(無知)를 곡(哭)하는 상인(喪人)이었으며, 참다운 신앙의 탄압을 슬퍼하던 사람들이었다.(사진:우)

 

 

 

족쇄

곤장과 큰 칼

길거리의 상인(喪人)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발과 함께 이 땅의 신앙 자유를 얽어 매었던 형구.
 

 

신도들이 구금되었을 때 목에는 큰 칼을 씌웠으며, 그들에게 곤장을 쳐서 배교를 재촉했고, 다른 교우의 고발을 강요했다. 그러나 신앙의 기쁨은 모든 악형의 고통을 이길 수 있었다.

당시의 거리를 거니는 상인(喪人)의
모습.


 

 

서소문 밖 네거리
지금은 기차와 자동차,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찬 서울역 염천교 부근. 이 곳에서 성인 정하상(丁夏祥,1795-1839)을 비롯한 무수한 순교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포했다.

 

새남터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땅. 이제 그 위에 순교의 비가 우뚝섰다. 성 김대건 신부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 곳에서 순교했다. 이로써 새남터는 성인(聖人)을 낳은 거룩한 땅이 되었으며,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이하여 건립된 기념 성당이 이 땅을 지키고 있다

 

김대건 신부 기념비각
25세의 젊은 나이로 피를 흘리며 순교한 성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유해가 묻혔던 미리내의 기념비각.
김대건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이며, 한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성직자의 주보(主保)이다. 지금 이 비각은 사라지고 새로운 기념 경당이 세워졌다.
그의 거룩한 믿음과 염원은 이 땅에 참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배론의 성 요셉 신학당
한국 신학 교육의 요람지이며 한국
근대교육의 출발점.
성 베르뇌(Berneux, 張) 주교는  박해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교회를 짊어질 지도자의  양성을 위해 이곳에서 신학 교육을 시작했다. (1856-1866)

 

만주 챠코우의 선교사 대기소
한국에 신앙을 전하기 위해 입국 준비를 하던 선교사들은 만주 챠코우에 있는 이 집에 머물며 순교를 각오하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다.
이 집을 거쳐간 여러 선교사들이 1866년의 박해 때 순교하였고, 베르뇌(Berneux, 張) 주교를 비롯한 10인의 선교사들은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교의 회다.

 

천주실의(天主實義)

주교요지

동양 문화에 매혹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불타던 마태오 리치 신부는 동서  (東西)의 사상을 어울러서 이 책을 지었다. 이 책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경이(驚異)로 이해되었고,  이벽, 이승훈, 권일신이 천주교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정약종(1760-1801)은 우리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하기위해 읽기 쉬운 한글로 이 책을 지었다. 복음은 모든 이에게 개방된 것이기에 양반이었던 그는 아녀자 와 상놈과 천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문자인 한글을 귀중히 여겼으며, 이로써 하느님의  진리를 전파하였다.

1864년에 간행된 천주교 서적

치열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선포는 중단될 수 없는 법. 목판(木版) 에 글을 새겨 책을 만들어 진리에 목말라하는 모든 이에게 이를 전했다.

 

재령의 신도들
신앙의 자유가 왔다.
1901년 황해도 재령의 신도들은  기쁨과 감사의 정에 겨워
참으로 오랜만에 누리게 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며
선교사와 함께 어울렸다.

 

건축 중인 명동성당
1895년 명동성당의 건축 광경.
종현(鐘峴)의 언덕 마루에 명동성당이 세워지고 있다.
신앙의 자유와 민족 복음화의 열망과 함께

 

 자료출처: 평화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