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1884∼1910

리나라는 1876년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는 1884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야 묵인될 수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순교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여 당시의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개화기에 이르러 우리 교회와 민족의 염원이 영글어 신앙 자유의 폭은 넓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우리 민족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고, 극복해야 할 또 다른 과제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에 교회와 민족은 일제 침략에 맞서 반침략(反侵略) 운동을 전개했고, 전근대(前近代)의 어두움을 밝히려는 근대화 운동을 일으켰다.
개화기,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는 교회의 모습과 애국계몽운동, 반침략운동에 참여했던 역동적인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 펼쳐지고 있다.

  페낭에 유학했던 신학생
1880년대에 이르러 신앙의 자유가 묵인
되었다. 교회에서는1882년부터 1892년
까지 신학생을 멀리 말레이 반도
페낭(Penang)에 보내어 교육시켰고,
페낭에서 공부하던 우리 신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숭공(崇工) 학교의 수업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절실한 민족의 열망과 함께 베네딕토회
  선교사들은 기술학교를 세웠다.
  당시 애국계몽운동 (1905-1910)에 참여
  한 교회는 학교를 세워 새 지식을
  전하기 위해 힘썼다.

 

 

  서울의 선교사들
교민조약(1899) 이후 활동이 자유로워진 선교사들이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상복에 몸을 숨겨야 했었다
  강석골의 옹기장이와 선교사
  박해는 끝났지만 옹기를 굽던 신도들의 생활은
  이어져 갔다.
  박해시대처럼 이 때(1901)의 선교사도 점촌(店村)의
  신자들을 찾아 복음의 빛을 전했다.
    신축된 명동성당과 
  성 바오로 수녀원

  1898년 명동성당이 완공되고, 이 때를
  전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건물도 완공되어 겨레를 위해
  기쁜소식을 선포했다.

 

  명동성당낙성식 기념
6년에 걸친 공사가 비로소 끝나고,
1898년 명동성당이 준공되었다.
성당 건립을 위해 품앗이를 아끼지
않았던 여러 신도들과 함께 선교사,
정부 고관, 외교관들이 성당의 준공을
기념하여 이 사진 한 장을 남겼다.

   활판으로 간행된 교회 서적
  신앙의 자유를 맞이 하자  순교자들이 읽던
  목판본 책들도 활판으로 인쇄되어
  널리 보급되어 나갔다.
  신앙의 자유가 커가듯이 서적의
  보급도 날로 늘어갔다
  경향신문 창간호
"올바른 개화와 거짓 개화를 구분"하고 올바른 개화의 방향을 일깨우기 위해
1906년 교회는<경향신문>을 창간했다. 
<경향신문>은 서울과 시골의 모든 사람을 위해 언론의 책임을 다짐했으며,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다가 1910년 폐간을 강요당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진출과 
  한국인 청원자, 수련자

  1888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했다.
  여기에 입회(入會)한 한국인 청원자, 수련자들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희망이었으며, 이들의 봉사로 교회는
  이 땅에 뿌리를  더욱 깊이 뻗을 수 있었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신부와 수사
1909년 오틸리엔의성 베네딕토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교육과 선교 사업에 헌신하였다.
여기 이 분들은 한국천주교회 남자 수도생활의 개척자들이다

교의 회다.

  안중근과 빌렘 신부
  안중근은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했던  대표적 신도였으니,
  그는 '대한 만세'와 '십자 성호'를  조화시켰다.
  그의 영세신부인  빌렘(Wilhelm, 洪錫九)신부가
  여순(旅順) 감옥으로 그를 찾아 그의 영원한
  삶을 기원하고 있다.

자료출처: 평화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