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 敎區 發展史

崔奭祐 (한국교회사연구소장·신부

한국천주교 교구 발전의 역사는 1831년 朝鮮代牧區(서울교구의 前身)가 설정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후 조선대목구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오늘 남 17개 교구를 헤아리게 되었다.

이와같은 교구발전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布?地 교구시대이다. 이 시기의 교구는 모두 포교지 교구제도인 代牧區이거나 아니면 知牧區로 설정된다. 둘째 시기는 邦人?區 시대이다. 즉 외방선교회에 위임되었던 교구들이 한국인에게 넘겨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두 가지 면에서 첫째 시기와 겹쳐진다. 하나는 아직도 포교지 교구제도가 계속되는 시기이고, 또 하나는 방인교구가 생기기 시작하지만 동시에 외방선교회에 계속 교구가 위촉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계제도의 설정과 더불어 시작되는 正式 교구시대이다. 아래 한국교회의 교구발전사를 3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이웃나라 교회의 교구발전사와 비교 검토함으로써 한국교구 발전의 특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I. 布敎地 ?區 時代(1831?1937)

1. 朝鮮代牧區(1831.9.9)

조선대목구는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설정되었다. 한국에 교회가 창설된 지 근 50년 만에 한국에 고유한 교구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기까지 한국교회는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한국 교회는 처음에 북경의 北堂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고, 다음 북경주교에게 宣敎師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그때부터 북경주교가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布?聖省은 1792년 한국교회를 북경주교의 개인적 보호와 지도에 맡기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공 식 책임이 북경주교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갓난 한국교회를 존속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선교사의 파견이 시급하였고, 나아가서 한국교회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계속된 선교사 파견의 보장이 뒤따라야 하였다. 그러나 북경주교는 한 명의 선교사를 파견하는 데 그쳤고, 이 선교사의 순교 후 계속적인 선교사 파진의 보장은 고사하고 단 한 명의 선교사도 파견할 수 없었다. 이에 로마에서는 한국교회의 앞날을 위해 북경주교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래서 한국교회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교사의 파견을 완전히 보장시키기 위해 한국에 고유한 대목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그 관리를 파리외방 전교회에 위임하게 되었다.

교구설정을 선언하는 교황의 ?書에는 “조선왕국을 새 대목구로 설정하고, 이 대목구에 북경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代牧을 세울 것을 선언한다”는 문구가 있다. 원래 교구는,비록 그것이 대목구일지라도 독립된 교회조직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런 단서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단서가 붙은 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북경 교구는 포르투갈 保護權에 속한 교구였다. 그러므로 북경교구에 속해 있던 한국교회는 동시에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제 조선대목구의 설정으로 한국교회가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되는 것은 분명해졌으나 동시에 포르투갈 보호권으로부터 독립된다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간 한국교회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보다도 포르투갈측의 이리한 보호권의 고집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북 경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남이 해결해 주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대목구가 설정된다 하더라도 한국교회에 대한 보호권의 주장이 여전할 것은 충분히 예측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조선대목구의 설정이 유명무실해질 위험이 있었고 나아가서 파리외방전교회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동안 방해받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로마는 사전에 교황 교서에서 조선대목이 북경주교로부터 독립된 교구장임을 明文化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특히 조선대목인 주교의 조선 입국이 실현되지 않는 한 북경주교로부터의 완전 독립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들만이 아니라 조선 대목인주교의 조선입국이 실현되기까지는 조선대목구의 설정으로부터 5,6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으나 이로써 조선대목구의 기반이 확고부동해 졌다.

그후에도 조선대목구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몇 가지 조처가 취해졌다. 조선대목직이 대목의 순교로 갑자기 끊길 위기에 대비하여 중국의 선교사를, 조선대목을 계승할 권한을 가진 보좌주교로 미리 선택할 권한이 조선대목에게 부여되었다. 또한 북경선교사들이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을 계속 방해할 것에 대비하여 조선에 접경한 遼東지방을 북경교구에서 분할, 독립시켜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촉하였고, 또한 부득이한 경우에 琉球를 통해서라도 조선에 입국할 수 있도록 한때 조선대목에게 유큐지방까지 위임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유명무실하게 됨으로써 곧 폐지되었다.

2. 大邱代牧區(1911.4.8)

대구대목구는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분할, 독립되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만 80년 만에 2개의 교구를 갖게 되었다. 비오 10세 교황은 교서에서 대구대목구의 설정 취지와 배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주님 안에서 더욱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너무도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지역을, 특히 다행히도 증가 일로에 있는 신자수의 요구에 따라 전한국지방을 한 대 목구가 관할하고 있는 실정에서 조선대목 뷔멜 형제가 저 광대한 지방의 남부를 새 대목구로 설정하는 것이 시기에 적절하다는 건의를 해왔으므로 그 의견을 지대한 호감을 갖고 듣게 되었고, 이리하여 나는 조선대목구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시켜 그것을 대구대목구로 설정하고,종래의 포교지에는 서울대목구라는 명칭을 붙이는 바이며…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회원들에게 새 대목구를 위탁하는 바이다.” 이와같이 대구대목구는 조선대목구에서 남부지방을 분할 독립시켜 설정된 것이고, 동시에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개칭되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1911년에 조선대목구가 폐지되고, 새로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가 탄생한 것처럼 기록되어 온 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대구대목구는 설정 당시 한국교회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약 2만6천 명의 신자(그중 대구는 1천5백명), 18개 본당, 3백90개의 공소를 갖고 있었다.

3. 元山代牧區(1920.8.5)

1920년 서울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가 분할 독립되는 동시에 쌍트 오릴 리엔의 베네덕도희원들에게 위촉되었다. 당시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는 布?면에서 제일 낙후된 지역이었고, 게다가 평안도에서는 改新?가 크게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의 집중적인 포교를 위해 교구의 분할이 거의 불가피하게 생각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이미 1909년부터 서울에 진출하여 교육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선교사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처음에 베네딕도 회원에게 제의된 지역은 평안도였다. 그러나 베네딕도 회원들은 한정된 인원과 재원으로 평안도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경쟁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함경도를 택하게 되었다. 교구설정 당시 원산대목구는 함경남북도 뿐만 아니라 만주의 간도 지방까지 관리하였고,2년 후에는 延吉과 依蘭도 관장하게 되었다. 연길과 의란은 곧 원산대목구에서 독립되는데, 의란은 연길보다 10여일 앞서(1928.7.3) 독립되었으나 잠정적으로 원산대목의 관리를 받다가 1934년 지목구로 설정되면서 한국교회의 관할지역에서 벗어났다.

4. 平壤知牧區 (1927. 3.17)

베네딕도 회원이 포기한 평안남북도는 그 후 미국 메리놀회원이 이 지역에 진출하여 포교를 담당함으로써 1927년 서울대목구에서 독립된 평양지 목구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知牧區는 교구로서의 작격을 대목구보다 덜 갖추고 있을 경우에 적용되는 제도인데 대목구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교구이지만 대목은 주교인 것이 통례인데 비해 지목에게는 주교의 품위가 주 어지지 않는다). 평양지 목구는 1939년(7.11)에 대목구로 승격하였다.

5. 延吉知牧區(192&7.19)

연길지목구는 1928년 원산대목구에서 독립되었는데, 의란을 제외한 만주의 간도와 연길 지방을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이 지역의 관리는 원산 대목구의 관리자와 동일한 쌍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회원에게 위임되었다. 연길지목구는 1937년(4.13)에 대목구로 승격하였다.

6. 光州知牧區(1937.4.13)

이번에는 대구대목구에서 1937년 전라남도가 광주지목구란 이름으로 독립하였는데 한국에 새로 진출한 아일랜드의 골룸바노 선교회가 이 지역의 포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광주지목구는 1957년(1.21)에 대목구로 승격하였다. 광주지목구와 동시에 전주지목구가 설정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새로운 단계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처음으로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촉되었기 때문이다.

II. 邦人 敎區 時代(1937~1961)

포교지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인이 될 수 없고 또한 선교사들로서는 포교지에 대한 완전한 적응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시작한 교구를 언젠가는 현지인에게 넘기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 포교성성이 외방선교단에게 포교지에서의 邦人 주교와 신부의 양성을 수시로 촉구하고 있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첫째 목표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기에 이 회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진출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방인성직자 양성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박해 동안은 두 명의 성직자를 양성하는데 그쳤다. 박해가 끝나자 그들은 서울 용산에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 양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교구가 증설됨에 따라 대구와 덕원에 제2, 제3의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한국교회에 방인교구가 창설될 시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마침내 1928년 방인교구의 준비단계로 서울대목구의 관할인 황해도가 최초의 監牧代理區가 되었고, 이어 1931년에는 대구대목구의 관할인 전라북도가 두번째로 감목대리구가 되었다. 그러나 황해도는 끝내 방인교구로 승격되지 못하였고, 반면 전라북도는 6년 만에 전주지목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촉됨으로써 최초의 방인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지목구에 그침으로써 아직은 한국인 주교를 탄생시키지 못하였다.

전주지목구의 탄생에도 불구하고 그 후 방인교구는 큰 발전을 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교구가 계속 외방선교회에 위촉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방인교구와 외방선교회 교구가 병행되어 나아간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시기에 새로 설정된 방인교구와 선교사 교구를 간추려본다.

1. 全州知牧區(1937.4.13)

전주지목구는 1937년 대구대목구 관할인 전라북도가 독립되어 설정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지목구의 관리가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촉됨으로써 최초의 방인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대목구로 설정되지 못하였으므로 한국인 주교를 탄생시키지는 못하였다. 1957년(1.21)에 가서야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2. 春川知牧區(1939.4.25)

1939년 춘천지목구가 서울대목구에서 독립된 지목구로 설정되었고, 동시에 이미 광주지목구를 담당하던 골룸바노 회원에게 위임되었다. 1955년 (9.20)에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3. 德源免俗區(1940.1.12)

1940년 종래의 원산교구가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로 분할되어 두 개의 교구가 탄생하였다. 면속구란 지역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로마 교황청에 직속된 교구를 말한다. 덕원면속구는 덕원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중심으로 인근의 원산, 고산 등 몇 개의 본당을 합쳐 설정되었다.

4. 咸興代牧區(1940.1.12)

1940년 上記 덕원면속구와 동시에 탄생하였는데, 말하자면 종래의 원산 대목구가 함흥대목구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함흥대목구는 1920년의 원산대목구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함흥대목구는 적당한시기에 한국인 성직자에게 넘기게 되어 있었고, 그때까지는 덕원면속 교구장이 그것을 임시로 관리하였다. 그러므로 함흥교구는 한국교회의 두 번째 방인교구로서 비록 실현은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韓國人 主敎 敎區長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방인교구의 탄생에도 불구하고 주교 품위를 지닌 교구장까지 탄생시키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전주 방인교구가 지목구에 그쳤고, 함흥교구는 비록 대목구였을지라도 “장차 적시에 한국인에게 맡긴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일제의 노골화한 탄압의 전과로 마침내 한국인 주교 교구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교구의 모든 교구장을 일본인 교구장으로 대치시키려 하였다. 그 결과 대구대목이 月人 주교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서울대목구는 이에 직시에 저항하여 한국인 교구장으로 대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임명된 서울 대목은 처음에 署理였으나 곧 정식 대목으로 승격됨으로써 1942년 말 주교로 승격되어 이것이 주교 품위를 지닌 한 국인 최초의 교구장이 되었다. 2년 후에는 평양대목구가 두번째로 한국인 주교 교구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구대목구는 해방 후 1949년에 가서야 한국인 주교 교구장직을 맡을 수 있었다. 1957년 부산대목구의 창설은 약간의 특별한 뜻을 갖는데, 왜냐하면 방인교구의 창설과 동시에 방인주교 교구장이 탄생된 것은 그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5. 釜山代牧區(1957.1.21)

1957년 대구대목구에서 독립되어 한국인에게 위촉된 부산대목구는 처음부터 지목구가 아니라 대목구로 설정됨으로써 동시에 한국인 주교 교구장을 배출시켰다.

6. 淸州 代牧區 (1958.6.23)

1958년 서울대목구 지역 중에서 충청북도가 독립되어 청주대목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이미 이 지역에서 전교를 담당하고 있던 메리놀 회원에게 그 관리권이 위촉되었다.

7. 大田代牧區 (1958.6.23)

충청북도와 동시에 충청남도가 서울대목구에서 분할되어 독립된 대목구가 되는 동시에 이미 이 지역의 포교를 전담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원에게 위촉되었다. 지금까지 대전대목구는 이미 1948년에 지목구로 발족하여 1958년에 대목구로 승격된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왔다. 지목구 설정 여부에 관해 그간 포교성성에 여러번 문의한 기록을 보면 포교성성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사실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될 때에는 반드시 교황 교서에 그런 사실이 언급되는 법이다. 그런데 대전대목구 설정 교서에는 충청남도를 대전대목구로 설정한다는 것뿐이고, 이미 설정된 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킨다는 말이 전혀 없다. 1948년을 교구설정 연도로 확신하고 있던 대전교구 당국은 교황청 연감에 그런 사실을 기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늘날까지 교황청 연감에는 대전교구의 창설연도가 1958년으로 나을 뿐 1948년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1948년으로 오인되어 왔을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서울교구장은 서울과 대구에 남아있던 파리외방전교회원들을 독립된 지역을 분할하여 거기서 전교를 전담케 할 필요를 느끼고, 1948년 그들에게 충청남도를 분할해 주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독립된 포교지’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교법상 독립된 교구를 표현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 서울교구장과 주한 교황사절 사이에서 합의된 표현에 불과했을 것이다.

8. 仁川代牧區 (1961.6.6)

1961년 서울대목구에서 인천과 그 인근 지방 및 도서지역을 묶어 인천대목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메리놀 회원에게 위촉하였다.

III. 正式 ?區 時代(1962? )

1962년은 한국교회 교구발전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해이다. 왜냐하면 이 해에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도입됨으로써 그때까지의 모든 포교지 교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기 때문이다. 대목구나 지목구는 포교지에 임시로 적용되는 교구제도이다. 그러므로 포교지의 교회가 자립교회가 되려면 교회조직에 있어서도 포교지의 교구제도를 벗어나 정식 교구제도로 발전해 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계제도의 선정에서 실현된다.

敎階制度의 設定 (1962.3.10)

교황 요한 23세는 이제 한국교회에 교계제도를 도입시킬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한 것으로 판단하고 1962년 한국교회에 교계제도를 설정한다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대구,광주 등 세대 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고, 나머지 대목구들은 교구로 승격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의 준 주교좌 성당이 모두 정식 주교좌 성당으로, 준 본당이 모두 정식 본당이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를 서울, 대구, 광주 둥 세 관구로 구분하고 나머지 교구들을 屬?區로서 이 세 관구에 예속시켰다. 그 결과 서울관구는 평양, 함흥, 춘천, 인천 등 네 교구를, 대구관구는 청주와 부산 두 교구를, 광주관구는 전주교구를 각기 속교구로 갖게 되었다.

덕원면속구는 면속구이므로 속교구에서 제외되었고, 연길 대목구는 1946년 중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이미 교구로 승격되었고, 또한 그때부터 봉천대교구의 속교구로 중국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교계제도의 설정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5개의 교구가 증설되는데, 그중 3개는 한국인 성직자에게, 나머지 2개는 외방선교회원에게 위촉되었다.

(1) 수원교구(1963.10.7) : 1963년 서울대교구 관할 지역에서 주로 서울시와 인천교구 지역을 제외한 경기도 전지역이 수원교구로 독립되었고, 동시에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촉되었다.

(2) 원주교구(1965.3.22) : 1965년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독립하였는데, 원주교구 역시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촉되었다.

(3) 마산교구(1966.2.15) : 1966년 부산시를 제외한 경상남도가 마산교구로 창설되는 동시에 또한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촉되었다.

(4) 안동교구(1969.5.29) : 1969년 대구대교구와 원주교구 관할지역에서 일부지역이 독립되어 안동교구가 창설되었고,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원에게 위촉되었다.

(5) 제주지목구(1971.6.28) : 19기년 광주대교구에서 제주도가 지목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골룸바노회원에게 위촉되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에도 지목구가 설정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그것은 교구가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제도이다. 제주지목구는 1977년(3.21)에 교구로 승격되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대교구 3, 교구 13, 면속구 1, 도합 17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면속구 등 세 교구는 북한의 침묵의 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실제로 남한의 교구수는 14개이다.

덕원면속구를 제외한 16개 교구는 각기 서울,대구,광주 이렇게 세 관구를 구성하는데, 서울관구는 북한의 평양과 함흥교구를 포함하여 7개의 속교구로, 대구관구는 4개, 광주관구는 2개의 속교구로 구성되어 있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교구발전사를 이웃, 중국교회 특히 일본교회의 교구발전사와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일본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것은 1891년 이었고, 중국의 경우는 1946년이었다. 그리고 방인교구나 방인주교의 경우를 보더라도 중국은 1926년에 처음으로 6명의 중국인 주교를 냈고, 일본에도 그 다음 해 방인교구의 설정과 함께 최초의 일본인 주교가 나왔다. 현재 일본교회는 한국교회와 맞먹는 16개 교구(대교구 3, 교구 13)를 소유하고 있는 바, 모두가 일본인 주교이고 또 신자수도 40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방인교구와 교계제도의 설정 면에서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자랑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의 교구가 해방 이후 단기간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는 점일 것이다. 해방 전까지, 즉 조선대목구 설정으로부터 100여년 동안 9개 교구가 증설된 데 비해서, 해방 후 1957년부터 불과 10여년 사이에 같은 수의 9개 교구가 증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