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조의 정치 개혁 이념의 성격

  1. 신진세력 등용과 기반구축

 영조년간 탕평당을 비판했던 강경파를 대체로 각 붕당의 준론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서도 탕평정국에 참여하면서 척신당을 견제 했던 정파 전체를 '청류당'으로 호칭할 수 있는데, 남인 청론, 소론 준론, 노론 청명당, 이 세 정파를 말한다. 이들은 대체로 의리와 명절을 숭상하고 붕당의 타파를 병행하는 탕평을 주장한 강경 탕평파다.

        이들 정파는 영조 당시에는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으면서 집권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1) 남인 청론(청남)의 형성과 전개

 남인 정파 중에서 청류당은 1722년(경종 2)경을 청론(淸論)을 표방하는 새로운 정파로 출발하였다. 청남(淸南)이라고 자칭한 이 정파는 당시 소론 정파의 실력자로 떠오른 김일경이 남인과의 탕평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던 시기에 결집되었다. 청론은 정조 즉위 이후에는 정조 탕평을 이끄는 청류당의 한 기둥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 4년 홍국영이 축출되고 소론 준론 출신 서명선을 수반으로 하는 정권이 출범한지 얼마 뒤에 청남의 지도자 채제공은 홍국영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집중공격을 받고 이후 6년 넘게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 소론 준론과 노론 청명당과 함께 채제공을 공격했던 남인 홍수보, 목만중, 채홍이 계열은 이후 청남 정파에서 떨어져나갔다. 이들은 스스로 중도 남인 계열의 후계자를 자처하기도 하였다. 청남 정파는 이후 이가환, 정약용같은 뛰어난 학자들을 차세대 지도자로 배출하며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채제공 역시 정조 12년에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남 정파는 소론 준론 및 정조 측근 신하들과 연대하여 김종수, 윤시동이 지도하는 노론 청명당계열을 강력하게 견제했다. 또한 신해통공정책, 화성 건설, 장용영체제 완성,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등을 주도하면서 정조 탕평의 일각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천주교 신봉자 윤지충, 권상연등 청남 정파의 인물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워버려 일어난 진산사건 이후 홍낙안, 이기경, 강준흠등이 채제공 직계를 서학(천주교)신봉자집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청남 정파에서 떨어져 나가 앞서 나간 목만중 등과 결합했다. 이들을 공서파(功西派)라고 한다. 공서파는 이가환, 정약용 권철신, 이승훈, 홍낙민등을 천주교 신봉자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사실은 이들이 채제공의 뒤를 잇는 차세대 집단이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었다.

 사실 공서파니 신서파(信西派)니 하는 호칭은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종교적 입장에서 붙여놓은 개념일 뿐이어서 정파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조 사망 직후, 청남 정파는 천주교 신종이 빌미가 되어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유배됨으로써 거의 와해되었고,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2) 소론 준론의 형성과 전개

 소론 준론은 보통 준소(峻少)라고 불렸는데, 경종 2년 임인옥사를 전후로 결집된 소론 붕당의 강경파이다. 탕평당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대리청정을 막으려 했을 때 수반인 서명선이 왕세손의 부담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려 탕평당을 제거하고 대리청정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정조는 즉위 초부터 소론 준론 계열의 등용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고 그들의 정파 결집을 적극 도왔다. 그 결과 서명선, 이복원, 정홍순, 이시수 같은 준론 계열과 이재협 같은 강화학파 계열이 재상에 등용될 수 있었다.

 소론 준론이 내세운 탕평론은 실사구시 탕평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현실개혁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당쟁의 폐단이 사회적으로는 서원, 정치적으로는 청요직제도 등에 있다고 보고 탕평의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이 폐단을 제도적으로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탕평론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원칙과 행정실무를 결합시킬 수 있는 실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서유구, 이상황, 이면승같은 신진학자들이 규장각을 통하여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서명선, 서형수, 이숭호 계열은 정치적 신념의 변화, 노론계 인물들과의 가족, 학통 관계등으로 일찌감치 노론으로 변신해버리기도 했다.

 한편 소론 준론 내부에서는 주자 성리학을 고수하며 강화학파 계열의 양명학을 공격하는 학통의 분열 현상도 나타났다. 소론 준론계는 이러한 내부분열 때문에 청남계열보다 많은 관료를 배출했으면서도 독자적인 정파로서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는  정조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다.

3) 노론 청명당의 형성과 전개

  정조년간 정국을 주도한 청류당 중 노론 청명당은 가장 늦은 영조 46년 전후에 결집되었다. 김치인, 정존겸, 윤시동, 유언호, 홍낙성, 등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강력한 정파였다. 김종수는 정조에게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정치론을 가르친 스승이고, 정민시는 홍국영과 함께 왕세손인 정조를 보호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때문에 노론 청명당은 정조 즉위 이후 집권주류로 떠올랐다. 이들은 정조 즉위년이 병신년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서, 60년 전 숙종의 병신처분, 즉 노론영수 송시열이 옳고 소론영수 윤증이 틀렸다고 판결한 것을 다시 천양하는 한편, 영조년간 확립된 노론의리들을 재확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청명당은 정조 초년 홍국영의 전권과 갑작스런 축출을 둘러싸고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노론 정치원칙을 천양하는 데 성공한 홍국영의 불명예 퇴진을 지지하는 것이 노론 정치원칙을 지키는 데 득이 되느냐, 실이 되는냐 하는 입장 차이 때문이다.

 이후 청명당 결사는 정조의 아버지인 세도세자 문제를 놓고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판결한 영조의 처분을 뒤집는 것이 노론의 정통의리 전체를 뒤집는 사태로 이어질지 그렇지 않은 지에 대한 해석 차이로 더 이상 메우기 힘든 틈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서로 아부꾼이라는 뜻이 담긴 시파니 나라일을 도외시한다는 뜻이 담긴 벽파니 하는 명칭을 붙이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2. 탕평 정치 구현

 정조는 " 침전에다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아놓고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면서 나의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서로 다투던 사람들을 화동시키고 대립하던 사람들을 변화시켜 화목하게"함으로써,"온 세상을 황극의 자리로 모으고 황극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영도" 하려던 정조 자신의 정치 목표를 잘 보여준다.

 정조는 실제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탕평의 정치' 또는 '성왕의 정치'라는 말로 종종 표현하곤 했다. 즉 " 샛별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24/6/16 丁卯)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가 바로 잡히고 시비의 판명자이자 정치세력의 중재자로서 국왕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성왕의 정치를 자신의 집권기에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정조시대의 탕평이라는 용어는 국왕을 중심으로 국론이 통일되는 정치의 목표(Political ideal)을 뜻하는 경우와 붕당간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인 인사정책(policy)을 가리키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탕평은 대통합 내지 대동의 상태라는 이상적 정치상을 가리키는 데 비해(탕평론), 후자는 붕당간 조제보합이나 국왕의 고른 인재등용 시책을 가리킨다.

3) 개혁 원칙의 초점

정조의 개혁 원칙의 초점은 네 가지로 맞추어졌다. 이중에서 '백성의 생산물을 만든다'와 '국가재정을 풍족히 한다'는 조항은 경제개혁이고, '인재를 키운다'와 '군사제도를 다스린다'는 조항은 정치개혁이다. 사회개혁은 어찌보면 부수적인 것 같지만 정조는 이 역시 즉위 초부터 꾸준히 추진했다. 4대 원칙은 정조 2년 6월에 발표한 교서에 잘 나타나 있다. 정조15년에도 이 교서에 입각하여 개혁이 추진되고 있었음이 확인될 만큼 이 원칙은 일관되었다.

 교서에 의하면 백성들의 생산물을 늘리는 문제는 "반드시 경계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사람이 각자 자기의 전답을 가질 수 없으면 힘껏 일하려 해도 어찌 가능하겠는가"라고 서술했다. 자기 토지를 가진 자보다 자기 토지를 가지지 못한 자가 많은 것이 가장 큰 무제라는 걸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토지제도 개혁밖에 없다.

 실록에 의하면 정조는 조선조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직전법이란 현직관료에게만 토지를 나누어주고 관직에서 떠나면 회수하는 일종의 토지 재분배 방식이다. 정약용과 박지원 역시 정조 재위기간 중에 토지 개혁론을 구상했다.

 하지만 정조는 토지개혁보다는 농법개량을 통해서 생산물을 늘리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래서 통치 후반기에는 전국에 선진적인 농업서적을 저술해 올릴 것을 명하였는데 이를 '응지농서'라고 부른다. 정조 15년에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 실시한 신해통공 정책은 일반 농민들의 생산물이 도성 안에서도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조치는 수도권지역 특권상인들에게 주었던 독점판매권을 폐지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지주 및 관료세력과 연결된 사람이 장악하고 있던 독점판매권 곧 이들과 겹치는 물종을 취급하는 소상인들의 판매행위를 금지하던 조치를 페지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