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시대-일제강점 천주교회  반공주의는 왜 친일로 이어지는가?

 

한국의 일본헌병을 대폭 증원한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이렇게 말했다.
'미개한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경찰보다 헌병이 간편하다.'
데라우치는 보다 더 강력하게 경찰아닌군대로 조선민중을 탄압했던 것이다.

 

 

1930년 이후 천주교 민족운동의 해체

 

1930년대를 거치면서 민족해방운동은 일제의 극심한 반격아래서도 의연하게 항일무장 독립투쟁에 떨쳐 나섰으나 천주교회 안의 민족해방운동은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반민족적인 제도교회의 탄압과 조직화의 미흡으로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도교회로 부터 비교적 자유로왔던 간도지역의 교회마저도 1928년 연길교구가 간도에 설정된 뒤로는 반공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에 대립으로 분열되어 힘을 잃게 된다. 결국 이러한 교회 안의 갈등은 1933년 일제의 북진대토벌 작전과 1937년 중일전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반공주의적, 호교론적 교권세력의 승리로 끝맺었다.

 

따라서 사료상으로는 검증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천주교 민족해방 그룹은 광복군 등 항일무장독립군에 개별적 편입해 들어갔거나 의민단처럼 집단적으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우촌에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제도교회에 편입되거나 무력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앙적 규정성에 상관없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천주교인들은 식민지 조선이 해방되자 각각 인민해방군(북한)이나 대한광복군(남한)의 한사람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종교적 정체성보다는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정치사상적 정체성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북한교회의 경우에, 북한 사회주의 정권이 반공주의적 천주교회를 탄압할 때도 그들은 어떠한 반응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해방 이후 북한 천주교회의 민족민중세력은 종교적으로 세력화되기 보다는 북한 사회주의체제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버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1970년대 이후 종교활동의 여지가 넓어지면서 비로서 1987년 ‘조선천주교인협회’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복구하게 된다.

 

그러나 남한교회는 미군정아래서는 친일제국교회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채 반공주의의 선상에서 친미적 우익 교회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그러므로 남한에 입국한 진보적인 천주교 신자들은 제도교회의 완강한 태도로 인하여 활개를 펴지 못하고 다시 움추러들수 밖에 없었다. 남한 천주교회의 민족민중세력은 한국전쟁 이후 교회 안에 대거 유입된 기층민중들을 토대로 하여 1960년대말 경제공황으로 계급모순이 증폭된 것을 계기로 교회 안에서 큰 세력을 이루어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간도에서 독립군을 학살하는 일본군

 

 1930년대 가톨릭운동의 변질

 

한편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에 그나마 젊은 혈기로 애국적 면모를 과시해 왔던 청년학생운동을 저지하고 일제 통치하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가톨릭청년운동을 개량화하기 위한 준비를 1920년대를 거치면서 줄곧 시행하게 된다.

 

즉, 서울교구에서는 1922년에 ‘경성구 천주교회청년연합회’를 결성하여 청년들의 활동을 교권측에서 중앙통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장치하였다. 한편으로 교회는 이 시기에 교회재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제도적으로 보장받기 위하여 1924년 10월 27일에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그 결과 1920년대부터 이 나라가 해방 될 때까지 천주교인들이 애국운동에 참여한 경우를 찾아보기란 가뭄에 콩 나듯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1929년 12월 9일에 광주학생의거가 서울에 파급되자 가톨릭계 학교인 남대문상업학교(동성중고등학교 前身)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던 사실이 겨우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청년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대구교구 청년회에서 발간했던 <천주교회보>의 경우에도 창간호가 나온 1927년 4월 1일부터 폐간된 1933년 4월 1일까지 1930년 5월호에 “레오 13세 교황의 사회관”(이효상)을 싣고, 1931년 3월 1일자에 “사유재산문제”에 대한 사설을 실고 나서는 사회문제에 관한 단 한편의 글도 실리지 않았다.

 

또한 여기에 실린 글조차도 우리 민족의 해방이나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열어주는 내용의 글이라기보다 대부분 反공산주의 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교회는 일본제국주의와 조선민중들 사이의 갈등보다는 순전히 이념적 차원에서 공산주의자와 천주교인들 사이의 갈등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이러한 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이 주로 지식층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교회는 그 경제적 토대를 지주층 신자들에 두고 있으면서 주로 부자들과 지식층에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노력은 1931년 9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에서 성대하게 열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가톨릭청년>지의 반공 선전활동

 

1930년대부터 한국 천주교회는 그야말로 全교회적 차원에서 호교론을 이론적으로 세련화시키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이념적 적수였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적 공격에 나선다. 이를 위하여 1933년 6월 10일에 조선 5교구 연합으로 <가톨릭청년>지를 창간하였다.

 

<가톨릭청년>지는 김형중 신부가 주간을 맡고, 실제적인 내용을 채우는 편집위원에 장면, 장발, 정지용, 이동구 등이 발탁되었다. <가톨릭신문사 史>에 의하면 “<가톨릭청년>은 당시의 교회관, 윤리관, 사회관을 다루면서 사회주의, 유물론, 진화론 등의 사상이나 시대사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덕원신학교 교수들로 하여금 호교론을 펴게 하여 가톨릭정신을 사회화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서 매호마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열렬하게 싣고 있다. 몇가지 게재된 제목을 나열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다.

 

   성서상으로 본 공산주의 (오기순, 1933.10-11)

   유물론자의 자연발생설 (신인식, 1933.11)

   유물사관 비판 (라우레스, 1933.12)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권약금, 1934.11)

   사회주의의 개념과 그 발달 (길세동, 1935.1)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 (길세동, 1935.2)

   세계역사에 대한 사회주의의 견해 (길세동, 1935.9)

   가톨릭은 자본주의의 前驅인가 (송량, 1936.2)

 

<가톨릭청년>이 담고 있는 기본정신을 잠시 살펴본다면, 첫째, 계급사회의 반복음적 가치를 외면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투쟁을 부정하며 그 결과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하는 기층민중의 해방운동을 영신적 노력으로 대치시키려 한다.

 

성바오로께서 신자가 각각 박애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치시고 장려하였다.(고린 1,2; 로마; 데살) 또 신자는 비록 노복의 지위에 있는 이일지라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갈라) 그러나 바오로 종도는 타인이 소유한 노예를 강제로 해방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사회적 행동을 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신앙을 같이 하는 자는 다 형제자매가 되는 연고를 역설하시고 종교적으로 해방을 권고하신 것이다...

  “다만 주께서 각 사람에게 분배하신 대로 천주께서 부르시는 대로 거둘지라”(고린 전 7,17) “각자 내가 부를 때의 신분을 그대로 보존하라. 네가 노예일지라도 이것을 생각하여 번뇌하지 말라”(고린 전 7,20)하였으니 이것은 결국 정치적 사회적 계급타파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고로 그리스도와 초대교회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제창하고 실행하였다고 몽상하는 자들은 다만 어떤 主義 하에 성서를 곡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로서는 인생의 영적 요구를 해결할 수 없다. 가톨릭교회가 자본가들에게 기부를 받아 다시 무산자들에게 주는 것을 공격하는 무리들은 무산자 자신으로써 무산자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무산자 중에서도 무산자인 가톨릭성직자가 無産運動을 주장하는 유물론자가 아닌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바이다. 또한 그날그날 노동하고 먹고사는 자들이 무산운동에 참가할 시간도 없고 재산의 여유가 없는 것도 명확한 사실이다. 철학상으로 벌써 몰락한 맑스주의를 이제 와서 얼굴도 휘날리며 얼굴도 붉히지 않고 가장 신 유행의 첨단이나 걷는 듯이 분투(?)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 가련한 시대착오와 치기를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상으로 본 공산주의」 오기순, <가톨릭청년> 1933.10-11)

 

둘째, <가톨릭청년>지에서는 기층민중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협조적 관계에서 개량적인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가톨릭교회가 사회주의 사상을 물리치고 민심을 잡을 수 있는 철학과 방안을 갖고 있으니 일본정부는 교회를 믿고 뒷받침해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의 방책이라는 것은 원호사업주의에 그치는 것으로서 식민지적 상황이 낳은 구조적 문제에는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농민을 솔선하여 구제함에는 먼저 우리 교회 내의 시설을 완전하게 하여 점차 대외적으로 이 운동을 확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부당국은 공산주의 사상이 불안한 생활에 신음하고 있는 민중에게 만연됨을 극히 무서워하고 있으나 냉정히 이러한 공산주의적 사상은 민중생활이 극도로 피폐되었음에 원인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사회정의에 대한 철저한 생각을 가졌으며 또 사회적 불안을 근치할 만한 적확한 철학을 가졌음을 정부당국이 인식한다면 반드시 우리와 협력할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더라도 우리가 민중의 곤핍한 생활을 생각함은 다만 그것이 우리 영신의 의무라는 의미뿐이 아니다. 여하간 레오 13세의 아래와 같은 말씀을 준봉하여 우리 불행한 민중을 도와야 한다. “진정한 목자는 자기 자신 그의 권력을 다하여 민중의 생활투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민중의 생활개선에 노력해야 한다”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권약금, <가톨릭청년> 1934.11)

 

셋째, <가톨릭청년>지는 현상적으로는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중립성을 주장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당파적이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론은 항상 공산주의에 대한 단죄로 매듭을 지음으로써 교회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의주도하게 회피하면서 호교론적 태도를 유지한다.

 

가톨릭에 대한 무지 또는 악의의 인물들의 뒤를 따라 앞 못 보는 말이 방울소리만 따라가는 격으로 아무 연구도 없이 그대로 가톨릭의 반대를 중복하는 것은 용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설을 분석하여 보면 서로 극단으로 나아가 서로 모순되는 말을 같은 교회에 대하여 거침없이 내놓는 것은 괴상한 일이라 할 것이다...

  가톨릭원리를 빙자하여 과격한 자본주의까지 옹호하며 변호하려는 자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대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시 가톨릭원리를 빙자하여 사회주의 맑스주의를 선전하며 변호하려는 자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이들은 다 저 비가톨릭신자와 같은 무지 중에 잠겨 있는 자들이다.

  신자들은 자본주의의 반종교적 반윤리적 남용을 미워하여 그보다 더 반종교적 반윤리적인 다른 정체(공산주의)에 가담할 수 없다...가톨릭은 자본주의와 협력하지도 않고 공산주의로 전락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치스와 같이 가톨릭을 공산주의 협력기관으로 인정하거나 혹은 공산주의자와 같이 가톨릭을 자본주의의 전구로 인정하는 자들은 다함께 가톨릭에 대한 무지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역시 모르는 바를 말하고 모르는 바를 선전하고 있다.


(「가톨릭은 자본주의의 前驅인가」 송량, <가톨릭청년> 19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