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산정권이 천주교회 주교 5명, 신부 82명, 수사 29명 등
150 여명을 살해한 박해사
[북한 괴뢰 집단의 박해] 대한민국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얻어 천주교회가 날로 눈부신 발전을 보이게 되었으나, 한편
북한에서는 공산 괴뢰 집단의 탄압으로 천주교회가 날로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6.25 전란으로 말미암아 한때 남한의 천주교회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1945년 8월 9일에 벌써 만주와 북한으로 쳐들어와 이 지방을 차지하고, 곧 그
해에 연길 교구의 유.셀바시오 신부와 고(高)․보니파시오를 총살하고, 1946년 5월에는 보테헤르․백 주교를 비롯하여 독일인 신부 18명, 등
수사 17명, 등 수녀 3명을 잡아서 연길, 삼도구(三道溝), 무산(茂山) 세 곳에 나누어 가두었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함흥 성당을
빼앗아 괴뢰군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성직자들의 감금]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유엔 총회의 승인을 얻게 되자,
소련군과 북한 괴뢰 집단은 교회에 대하여 보다 노골적인 박해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5월 8일부터는 덕원 교구의 사우에로
주교와 수도원장 및 늙은 두 신부를 잡아 나남(羅南)으로 보내어 가두고, 그 밖의 신부, 수사, 수녀들 55명은 평양의 정치
보위부(政治保衛部)로 보내어 가두는 한편,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하여 괴뢰군에서 쓰다가, 후에 사리원(沙里院) 농과 대학을 이곳에 옮기어 김
일성(金日成) 농과 대학이라 부르고, 원산에 있던 수녀원을 병원으로 삼으며, 해성(海星)학교는 소련 군인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육소로 삼았다.
그리고 그해 5월 14일부터는 대한민국과 정보를 교환하였다는 이유로 평양 교구의 홍 용호(洪龍浩)․방지거 주교를 비롯하여 김 필현(金必現)
신부, 최 항준(崔항俊)신부, 강(姜) 전교회장 등을 잡아서 정치 보위부로 보내어 가두고, 해주 성당의 한(韓)․비리버 신부도 잡아 가두었다.
이어 그해 12월 6일부터는 박해가 더욱 심하여져서, 평양 성당의 박 용옥(朴龍玉), 서 운석(徐雲錫), 이 재호(李載虎), 장 두봉(張斗鳳)
신부와, 강계(江界) 성당의 석 원섭(石元燮)) 신부와, 신의주(新義州) 성당의 홍 건항(洪建恒) 신부와, 영유(永柔) 성당의 홍 근도(洪根道)
신부 등 7명 신부가 잡혀 갇히게 되니, 이 여러 곳의 성당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이리하여 3천여명의 교우들이 살고 있던 평양에서는 한 사람
신부조차 없게 되고, 평양 교구내에서는 진남포(鎭南浦), 안주(安州), 마산(馬山), 의주, 비현(碑現)에만 각각 1명의 신부가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함흥 교구에서는 청진(淸津) 한 곳에 이 재철(李載喆) 신부가 남아 있고, 춘천 교구에서는 양양(襄陽)에 이 광재(李光在)
신부가, 평강(平康)에 백 응만(白應萬) 신부가 겨우 남아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 보위부로 보내진 신부, 수사, 수녀들은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은 후 강계(江界)와 만포진(滿浦鎭)에 나뉘어 수용되었으며, 신학생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 교우들도 이른바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많이 잡혀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게 되니, 북한 교우들은 이러한 생지옥을 벗어나 몰래 남한으로 계속 도망쳐 오게 되었다.
[서울 교우들의 특별 기구] 이리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교우 4백여명은 날로 비참한 모습을 띠어 가고 있다는
북한 교회의 소식을 듣고, 1949년 11월 6일에는 서울 명동 대강당에서 평양 교우 대회를 열고 많은 돈을 모아 신부를 양성하는 데 보태
주기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지 겨우 반년을 지나 뜻밖에도 갑자기 6.25의 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북한
괴뢰 집단은 남한을 치기 위하여 그 군대를 38선으로 모으고 있었으므로,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하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5월 15일에는
평양 서포(西浦)에 있던 영원의 도움의 성모회 수녀원이 몰수되게 되니 이 곳 수녀들은 살 곳을 잃고 헤매며 굶어 죽을 지경에 놓이었다. 이러한
북한 교회의 딱한 소식을 들은 서울 여러 성당의 신부들은 6월 14일에 회의를 열고 북한 교회를 위한 특별 기구를 성당에 따라 날을 달리 하여
차례로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6월 15일에는 명동성당, 16일에는 중림동 성당, 17일에는 원효로(元曉路) 성당, 18일에는
삼각지(三角地) 성당, 20일에는 잠실리(蠶室里) 성당, 21일에는 동자동(東子洞) 성당, 22일에는 세종로(世宗路) 성당, 23일에는 혜화동
성당, 24일에는 제기동(祭基洞) 성당, 25일에는 홍제원(弘濟院) 성당, 26일에는 신당동(新堂洞) 성당, 27일에는 미아리(彌阿里) 성당,
28일에는 가회동(嘉會洞) 성당에서 교우들로 하여금 각각 40시간의 성체 조배를 드리게 하였다.
[6.25 전란 발생] 이러한 서울 교우들의 특별 기구가 드려지고 있는 사이에 공산 괴뢰군은 6월 25일 주일날 새벽 4시에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입하여 왔다. 이에 앞서 괴뢰군은 6월 24일부터 북한에 남아있던 신부들을 모두 잡아들이게 되어, 평양 교구의 조 인국(趙仁國), 이
경호(李京鎬), 강 영걸(康永杰), 김 교명(金敎明), 김 내철(金來哲)의 다섯 신부를 비롯하여 함흥, 덕원 교구의 김(金)․바오로, 이
재철(李載喆), 이 춘근(李春根) 신부와 춘천 교구의 이 광재(李光在) 신부와 황해도 은률(殷栗) 성당의 윤 의병(尹義炳), 장연(長淵) 성당의
신 윤철(申允鐵) 신부들이 잡히게 되었다. 이들 11명의 한국인 신부 중 김․바오로, 이 광재, 이 경호의 세 신부는 얼마 후에 총살된 것이
확실히 알려지고 있으나, 다른 신부 8명은 어찌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성직자 살해] 이와 같이 괴뢰군은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을 모두 처치한 후 곧 남한으로 쳐내려와 먼저 남한에 있던 신부들을 죽이거나 잡아가두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6월 25일에는
강원도 묵호(墨湖) 성당에서 애란인 신부 레일러(Reiller)를 총살한 것을 비롯하여 동 27일에는 춘천 성당의 애란인 신부
콜리어(Collier)를, 7월 3일에는 서울 영등포(永登浦) 성당의 이 현종(李顯鍾) 신부를 총살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성직자와 수녀들을
잡아 가두고 성당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7월 2일부터는 춘천 교구에서 퀸란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애란인 신부가 잡히고, 7월 11일부터는
서울에서 교황 사절 번 주교를 비롯하여 미국인, 불란서인, 벨기인, 한국인의 신부, 수녀 등 수십명이 잡히고, 7월 25일부터는 목포에서 광주
교구장 브렌난(Patrick Brennan, 安) 신부를 비롯하여 2명의 애란인 신부가 잡히고, 8월 3일부터는 대전 교구에서 불란서인, 한국인
신부 10여명이 잡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북한에서 괴뢰군에 잡혀간 성직자, 수녀, 신학생의 수는 1백 50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그들을 교구,
신분, 국가별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身分/
敎區主敎(敎區長) / 神父(韓人) / 修女(韓人)
/ 修士 /
神學生(韓人) 주교 5명, 신부 82명, 수녀 34명, 수사
25명, 신학생 4명. 합계 150명
[죽음의 행진]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괴뢰군은 8개국의 국민으로써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에 대하여 잔인한 야만 행위를 마음대로 행하였으므로, 6.25 전란은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괴뢰군에게 잡힌 외국인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서울 소공동(小公洞)에 있는 삼화(三和) 빌딩에 수용되어 문초를 받다가, 7월 19일부터는 기차로
평양으로 데려가져서 다시 신문을 받은 후 평양시 밖에 있던 유치원에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또한 잡혀온 서울 주재 불란서 영사와 영국
영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근 1백명을 헤아리던 외국인 성직자들은 다시 9월 6일에는 평양을 떠나 죽음의 길을 걸어서 9월 11일에는
압록강가에 있는 만포진(滿逋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위에 적은 성직자 이외에도 연길 교구에 있었던 성직자로서 백․브레헤르 주교를 비롯하여
독일인 신부 18명, 동 수사17명, 동 수녀 3명이 6.25 전란 이전에 공산군에게 잡히었는데, 이들 중 백 주교를 비롯한 몇몇 늙은 성직자
이외에는 그들의 간 곳을 알 도리가 없다. 백 주교는 6.25 전란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석방되어 홍콩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전후 5년
동안에 걸쳐 겪은 고생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말미암아 1950년 11월 2일에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나남에서 평양 감옥에 옮겨졌던 덕원
교구의 신.사우에르 주교도 오래 동안 앓던 해소병과 고생으로 말미암아 그해 2월 7일에 77세의 늙은 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포진으로
끌려간 성직자들 중에서도 굶주림과 추위로 옥사한 이가 11명이나 나오게 되었다. 서울 바오로 수녀원의 원장이던 베아뜨릭스 수녀는 1950년
11월 3일에 75세로 옥사하고 동 수녀원의 지도 신부이던 우.빌모(Marie-Pierre Paul Villemot, 禹一模)는 11월 9일에
81세로 옥사하고, 서울 혜화동에 있던 갈멜(Carmel) 수녀원의 지도신부이던 공.공베르(Antoine-Adeadot Gombert,
孔安國)는 다음날에 76세로 옥사하고, 공신부의 동생으로서 인천 바오로 수녀원의 지도신부로 있던 공베르(JulienMarie Emile
Gombert, 孔安世)는 그 다음날에 74세로 옥사하고, 교황 사절이던 방.번 주교는 11월 25일에 옥사하였다. 이 밖에 불란서 신부 2명,
독일 신부 1명, 애란 신부 1명, 벨기 수녀 2명이 1951년을 전후하여 옥사하였다.
[평양 수복과 중공군 침입]
이러는 사이에 한때 낙동강(洛東江) 지대까지 쳐내려왔던 괴뢰군은 유엔군의 공격을 받고 물러가기 시작하여, 1950년 9월
27일에는 서울을 빼앗기고, 10월 19일에는 평양조차 내놓으면서 북쪽으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에 서울의 노 기남 주교는 평양 교구의 신부이던
캐롤을 거느리고 11월 12일에는 평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노 주교는 평양 교구장이던 홍 용호 주교가 그해 5월 14일에 괴뢰군에게 잡혀간 후
간 곳을 모르게 되었으므로, 11월 20일자로 캐롤 신부로 하여금 평양 교구장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이리하여 캐롤 신부가 부서진 성당을
수리하면서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11월 27일부터는 90만의 중공군(中共軍)이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때 국경 지방까지 다다랐던 유엔군이 하는 수 없이 작전상 물러서게 되니, 노 주교 등도 많은 피난민의 뒤를 따라 평양을 버리고 12월
1일에는 서울로 돌아오고, 12월 12일에는 노인 성직자들과 늙고 어린 교우들을 기차편으로 대구 및 부산 지방으로 피난케 한 후, 1951년
1월 4일에는 그 스스로가 대구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대구조차 위태롭다는 정보를 듣고 그는 성직자, 신학생 및 늙고 어린 남녀 교우 1천
80명을 부산으로 모아 1월 17일에는 이들을 제주도로 옮기고, 1월 20일에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휴전과 전교 개시]
바로 이 때 미국에 있던 장 면 대사가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1월 28일에 귀국하게 되니, 노 주교는 2월 4일에 부산 중앙
성당에서 많은 교우들이 모인 가운데 나라를 구제하여 주기를 바라는 뜻깊은 대미사를 드리고, 장 총리의 환영회를 열었다. 그리고 노 주교는
유엔군이 중공군을 38선 북쪽으로 몰아냄을 기다려, 3월 25일에는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 장 금구(莊金龜)를 먼저 서울로 보내어 남은 교우들을
다스리게 하고, 6월 23일에는 소련이 전쟁을 그만두자는 주장을 내세움을 보고, 그 스스로가 7월 22일에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휴전
교섭이 2년 동안을 끌어 오다가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 겨우 그 조인을 마치게 되니, 그 사이에 경향 잡지사 사장이던 윤 형중(尹亨重)
신부는 서울로 돌아와 2년 동안 발행을 멈추고 있던「경향 잡지」를 1953년 6월부터 다시 박아내어 수십만의 교우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하게
되었다. 이 잡지는 1909년부터 한 달에 한번씩 발행하던 것인데, 일제의 말기와 이번의 전쟁으로 두 번이나 발행을 멈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잡지에서는 그달 그달의 교회 소식을 묶어서 발표하여 왔으므로, 특히 해방 이후의 교회 역사는 이를 이용하여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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