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입대, 유엔군파병노력, 의료 다각활동

▲  6ㆍ25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수용소에 억류됐다가 풀려나 독일에 돌아온 성 베네딕도회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  6ㆍ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원 건물.
당시 수녀회는 인천에서 해성보육원과 해성의원을 운영하며 사도직활동을 펼쳤다.


 '동족상잔'은 이미 해방 공간에서 배태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남북 또한 1948년 각각 정부를 수립한다. 오스트리아(4개국 분할)나 옛서독(3개국 분할, 동독까지 합치면 4개국 분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분할 점령이 꼭 분단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남북이 분단됐다는 것은 외세와 함께 분단된 한반도 정치세력간 갈라섬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이같은 갈라섬의 직접적 피해자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을 신탁통치키로 했다는 소식에 천주교회는 '신탁 반대'에 앞장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했다. 교황청도 1949년 4월 세계 어느 나라에 앞서 대한민국을 공식 승인했다.

'신탁 찬성'의 입장에 섰던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와 전쟁으로 북녘 천주교회는 숱한 순교자를 냈고 60여 년 세월을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6ㆍ25 전쟁 발발, 그리고 순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공격 개시 암호명 '폭풍'. 소련의 지원을 업은 북한군은 선전포고조차 없이 3ㆍ8선을 넘어 남침한다.

서울 궁정동 주한교황사절관은 그날도 여느 주일과 다름이 없었다. 1947년 10월 초대 주한교황사절로 부임,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패트릭 제임스 번(1888~1950) 주교는 그날 오후에서야 주한영국대사관으로부터 3ㆍ8선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포성도 들려왔다. 번 주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이튿날(26일)도 피난을 가야 한다는 권유에 "한국에 신부님들도 많고 교우들도 많은데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 착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며 뿌리쳤다. 사흘째인 27일에도 거듭된 피난 권유를 듣지 않는다. 바로 그날 저녁에 한강 다리가 끊긴다.

28일 오후 5~6시께 번 주교는 교황사절관에서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에 체포됐고, 명동성당 사도회관을 거쳐 미도파백화점(현 롯데 영플라자) 건물에 수감됐다. 거기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번 주교는 사형을 선고받고 평양에 이송돼 그해 7월 19일 평양교화소에 수감됐다.

훗날 포로교환 때 석방된 선교사들에 따르면, 번 주교는 만포와 고산진, 초산진 등으로 끌려갔다가 '죽음의 행진' 끝에 그해 11월 25일 중강진 부근 하창리수용소에서 숨을 거둔다.

이뿐 아니다. 이재현(요셉, 1909~1950?, 서울대교구) 신부 등 숱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수난으로 얼룩진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피랍일자만이 간간이 전해질 뿐 숱한 성직자가 순교일도, 순교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거룩한' 죽음의 길을 걸었다.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북녘 교회

6ㆍ25전쟁은 민족과 교회에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하지만 그에 앞서 북녘교회는 이미 해방 뒤부터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북녘 주둔 소군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 성명서)한다던 소군정과 북녘 당국은 8ㆍ15 이후 꾸준한 종교말살정책을 폈다. '북조선 토지개혁 법령'에 따른 46년 3월 덕원수도원 몰수(5헥타르 제외) 등이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1945년 10월, 일본군에 징발됐던 관후리주교좌성당 부지를 되찾고자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한 달 반에 걸쳐 협상을 하던 강창희(야고보, 1912~45) 당시 평양교구 사무원은 총탄 3발을 맞은 채 유해로 발견된 것을 시발점으로 평양교구에서만 교구장 홍용호(1909~49?) 주교 등 성직ㆍ수도자, 평신도 23명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또 함흥교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 서울대교구(황해도), 춘천교구(3ㆍ8선 이북)도 박해에 직면한다. 해방 당시 5만7008명(「1944년 한국천주교회 교세통계」)에 이르른 북녘교회는 5년 만에 와해되다시피했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까지 서울대교구에서 25명(「6ㆍ25 전후 서울ㆍ평양교구 관할지역 순교자」 자료), 함흥교구에서 36명, 춘천교구 5명, 대전교구 16명(「한국전쟁과 현대의 순교자들」) 등이 순교했다.

이같은 수치는 그러나 최근 들어 함흥ㆍ춘천ㆍ대전교구 등에서 한국전쟁 중 순교자에 대한 시복시성작업을 추진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수치일 뿐, 6ㆍ25전쟁 전후 순교자와 북녘 교회의 피해 실상까지 정확히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동족상잔 비극, 그리고 50여 년 '눈물'

북한군 남침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7월 20일 대전 함락, 닷새 뒤 낙동강에 전선이 형성돼 남북 135㎞, 동서 90㎞만이 남았다. 포연 속 교회는 평화에 대한 기원과 함께 반공 투쟁을 구체화한다. 이른바 '성전(Holy War)'이라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다. 당시 대구대교구장 최덕홍(1902~54) 주교가 언급했듯, 한국전쟁은 '국토 통일과 평화 건설을 위한 역사적 과업'이었다.

이에 1950년 8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김동한(1919~83, 대구대교구) 신부 등 사제 10여 명은 대신학교 학생과 교우 3000여 명을 규합, '가톨릭 청년 결사대' 결성을 시도했으나, 군에서 무기 공급의 어려움을 전해옴에 따라 좌절된다. 하지만 그해 9월 지학순, 윤광재, 김창렬, 김옥균 등 신학생 30여 명은 당시 서울대신학교 학장이던 정규만 신부 인솔 아래 육군을 찾아가 자원입대한다. 또 1950년 9월에는 천주교회와 개신교를 중심으로 군종제도가 도입돼 1951년 2월 사제 11명을 포함해 모두 성직자 37명이 육군에 입대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구월산 유격대' 투쟁이다. 1950년 4월 인민군 징집을 거부하고 구월산에 들어간 황해도 장연본당 신자들은 그해 6월 24일 밤 신윤철(1906~50, 연길교구) 주임신부가 피랍됐다는 소식에 무력항쟁으로 전환한다. '십자군'과도 같은 특공대원 150명은 유격작전 중 노획한 150여 정 무기로 무장투쟁을 했으며, 훗날 연풍부대를 거쳐 구월산유격대로 재편돼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민족과 함께한 한국천주교회

전쟁이 발발하자 장면(요한, 1899~1966) 초대 주미대사는 당시 미 유엔수석대표 오스턴 상원의원 등과 접촉, 유엔군 파병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해 7월 7일 유엔군 16개국 파병이 이뤄진다. 또 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이던 노기남(1902~84,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으며, 국내로 돌아오던 중 일본 도쿄에서 일본 주둔 유엔군사령부 요청에 따라 격려 방송을 한 뒤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으로 귀국한다.

이와 함께 교회는 군 병원 의료봉사(제5육군병원), 포로수용소 활동(거제도ㆍ광주ㆍ논산ㆍ부산 수용소)을 펼쳤으며, 1만5827명의 세례자를 배출했다. 또한 미국 가톨릭 사회복지협의회(NCWC)의 지원을 받은 피난민 구호사업(대구대교구), 부산 메리놀병원ㆍ성분도자선병원 및 대전성모병원을 설립하는 등 교회 수호 및 신자 보호 활동을 벌였다. 아울러 전쟁을 통해 한국교회는 순교ㆍ성모신심을 강화, '9일 기도운동'과 '기도의 십자군 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군을 통해 '파티마의 푸른군대운동'도 활발히 소개됐다.

그러나 전쟁으로 겨레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북간 300만 명이 넘게 사망했고, 폐허와 서로를 향한 증오만 남았다. 정전이 이뤄진 지 올해로 55년, 그러나 평화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출처 : 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