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의 한국 천주교회


 
민 족의 해방과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천주교회에도 밝은 전망을 안겨주었다. 언론. 출판 분야에서는 일제 때 폐간되었던 주간 [ 경향신문]을 일간지로 창간하는가 하면, 일제 때 폐간되었던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다시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교육 분야 에서는 초등 교육기관들이 중.고등 교육 기관으로 개편되었고, 성직자 양성 기관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성신대학'으로 승격 되었다. 한국 천주교는 제1공화국의 건국 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경향잡지 1907년 제1권
보감 1906년 제 2호 

가톨릭청년 1933년 10월호
제1권 제5호

총선거를 앞두고 '가톨릭시국 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신자 청년들을 단합시키는 한편'교구장들은 연합 교서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도록 신자들에게 지시하였다.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주교들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를 계속할 것과 순교 정신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도록 권고하였다. 비록 시대 상황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화해와 일치를 위해 힘써야 할 교회가 반공주의를 내세워 동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토 분단의 비극은 북한 천주교회의 전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 공산주의 세력은 토지 개혁과 화폐 개혁 등을 통한 공 산화 정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러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정식 건립되면서부터 종교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피신하였고, 남은 신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1949년 5월, 마침내 북한 정권 은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과 함경남.북도에 살던 모든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평양교구장 송용호 주교 가 항의하였으나, 북한 정권은 홍 주교마저 체포한 다음 평양 시내와 평안남.북도의 한국인 신부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다.

덕원수도원과 신학교 전경
중세 독일의 히르사우 수도원을 모델로 삼아 지어진 덕원수도원은 동아시아의 서양식 근대 건축
분야에서 예술적 사상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국 전쟁을 전후해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에 남아있던 신부들까지 모두 체포되면서  북한에는 한 명의 신부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남한 의 천주교는 한국전쟁 (1950~1953년) 의 시련 속에서도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남한의 천주교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눈부시게 발 전했다. 

 해마다 입교자의 수가 몇 만 명을 넘어, 휴전 당시 약 16만 명에 지나지 않던 신자수가 1962년에는 53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1962년 교계 제도의 설정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열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