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 때에는 정치의 안정과 경제 성장, 그리고 실학 사상의 영향으로 문화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영조와
정조의 중흥 정치와 농촌 사회의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서민들도 교육과 문화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의 자제들이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익혔다. 그러다 15세 전후가 되면 지금의 중등
교육 기관과 같은 사학(서울의 4곳에 세운 중학, 동학, 남학, 서학)과 향교에 들어가 5~6년 동안 배웠다. 그리고 소과에 응시해 합격하면
생원 또는 진사가 되어 대학 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당시의 교육은 모두 과거에 필요한 것이었다.
1. 서민 문화의 성장 조선 후기에는 서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글 소설이나 민화 같은 서민적인 작품이 많이 나왔다.
한편 서민들 가운데서도 창조적 재능을 지닌 이들이 나타나 문화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민 문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실학의 융성, 국학의 발달, 한글의 보급, 서양 문물의 전래 등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사회는 봉건적 질서의 해체기로서 제(諸) 사회적 모순이 복잡하게 뒤엉킨 채 혼동된 사회상을 표출하고 있던 시기였다. 급격한 사회변동이 예고되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주로 양반계급 출신이었던 일군의 학자들이 실학으로 지칭되는 사회변화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었다. 다산정약용(茶山丁若鏞)은 경제, 정치, 학문, 심지어 과학 분야까지 다방면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사상적 기반인 성호학파의 경학적 기초위에, 그 학파의 비판적, 개혁적 학문풍토를 계승하고 있었다. 그는 한걸음 더 전진하여 노론 북학파의 북학사상도 적극 수용하여 선배들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전진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상을 수립하였다. 토지의 공유와 그 균등분배를 통한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기저로 하는 그의 경제사상이나, 인정과 덕치를 통한 민본주의적 왕도정치를 중핵으로 삼는 그의 정치사상은 기본적으로 선배 실학자들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정치·경제 사상은 세부적인 면에서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의 균전론은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이나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인구 비례의 토지 균등분배사상이 아니다. 직업분화를 철저히 인식하고, 토지는 오직 농민에게만 점유되어야 하고 농민의 경작능력에 따라 토지점유와 소득분배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사(士)를 정치담당 세력으로 인정하고, 학자인 독서계급이 민본주의적 왕도정치 내지 현인정치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종래 사림의 주장과 다를 것이 없지만, 통치권의 근거를 백성 속에서 추출함으로써 민권사상을 이론화시킨 점에 그 독창성이 있다. 2. 시대적 배경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봉건사회의 말기 징후를 드러냈다. 본래 전부 왕토였던 토지가 실제적으로는 지배층의 소유물로 점유되어 가고 있었고, 백성들 대다수는 소작농이나 노비의 처지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백성들은 국가와 지주에게 이중적으로 과세를 부담해야 하는 중복 착취구조 속에 시달리면서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문화차원에서 살펴보면 소박한 생활문화와 인륜질서를 중시하는 유교의 본래 정신은 기존 정치권력과 경제구조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측의 의도대로 점차 답답한 모습으로 굳어 가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생동하는 감정을 지닌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을 위선적으로 막아버린 생활윤리 또한 백성들의 눈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이런 때에 백성들이 생활에서 만나는 저잣거리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목민관이나 관리들은 더욱 탐욕스럽고 공공연하게 백성들을 괴롭히고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공인된 약탈자인 관리들은 백성들을 굶주림과 도둑질 이외는 달리 다른 삶을 선택할 여지가 없는 극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 무렵, 양반도 실세 몰락하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양민, 중인층에도 경제력 여하에 따라 매관매직으로 양반이 되었으며, 공사노비가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노비안마저 국책으로 소각하여 신분제에 상당한 변화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탄에 빠진 당시의 양민으로서의 농민들은 극소수의 부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노비 등 천민의 처지에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런 처지에서 민심은 지배층 특히 조정으로부터 멀리 이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정을 비방하고 저주하는 각종 서기와 첨서 및 봉서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속출하였으며, 대규모의 반란인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같은 민심의 동향을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3. 경제 ․ 사회 ․ 문화환경 왜란(1592-1598)과 호란(1636-1637)등 엄청난 난리를 연거푸 두 번씩이나 치른 조선조의 경제, 재정실정은 비참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파생된 현상이 삼정의 문란이다. 이는 민생고의 원천이었으며 경제실학파의 대두의 원천이 되었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한다. 농정국가에서 이 삼정의 문란은 국가 재정의 기초를 흔들어 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사회불안의 요소도 그 안에서 배태되었던 것이다. 수차의 전란으로 말미암아 농경지가 거의 황폐화되었다. 임란 전에 152만 결이었던 농지가 임란을 겪은 후에는 불과 54만 결에 불과하였으며 병란을 겪은 후에는 더욱 더 황폐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 이앙기술, 농기구의 개발, 수리이용의 진보 등으로 농업이 발달해갔고, 전국시장 상대의 도매업과 화폐의 이용 및 자본축적에 의한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였지만, 담세자인 농민의 생활은 피폐하여만 갔다. 특히 삼정의 문란을 기화로 한 지방관과 서민들의 부정부패 착취가 대부분의 중소농민들을 파산과 기아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점은 당시 아사자들이 각 지방에서 속출하였고, 화전민과 유민 및 도적, 심지어 단호까지 가진 각종 도적단이 많았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경제적 환경과 모순 속에서도 양란의 복구과정을 통해 그 영농법을 개선함으로써 그 생산성을 높여갔다. 이양법, 광작농업, 상업적 농업은 조선후기 영농법 발달의 두드러진 점이다. 또한 생산성이 높아간 농토가 양반지주층, 서민지주층, 그리고 부농지주층에 집중되면서 종래의 영세한 자영농민층이 무사농민화로 급격히 농민의 분화현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18세기와 19세기 전반기에는 상업 면에서도 큰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도가상업 측매점 및 독점적 상업의 발달과 그것에 대한 소상인층의 발달로 요약될 수 있다. 조선왕조 본래의 상업정책은 이른바 억상정책이었으며 외국과의 무역도 이른바 사행무역 이외의 민간무역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억상주의, 쇄국주의의 상업정책도 왕조의 후기에 와서는 상당히 변해갔다. 17세기경에는 외국무역도 어느 정도 발달해서 개시무역이 후시무역으로 변하면서 밀무역으로의 성격으로 남아 상당히 발전을 보였고 시정상업에서
도 상업인구의 증가, 상품경제의 발달을 결과로 성장해오는 사상인층의 압박을 저지하기 위하여 금난전권으로 사상인층을 누리면서 특권상인화해 갔다. 조선왕조후기에는 수공업부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조선전기의 관청수공업조직에 묶여 있던 공장들의 많은 부분이 그것에서 해방되어 자영수공업작 되었고 이들이 도시수공업자로써 상품생산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도시수공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시수공업, 민간수공업의 발전이 곧 관수품의 시장 조달을 말하는 대동법의 실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 상업, 수공업의 변화와 함께 광산정책상의 변화는 설점수세법( 設店收稅法)이 실시된 일이었다. 금광산에 실시된 이 제도는 광산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간자본이 광산개발에 차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정부에서 광물산지에 재련장과 부대시설을 마련해 주고 광물채취에 필요한 재목 연료 등의 채벌을 허용하고 또 노동자를 마음대로 고용될 수 있게 하는 한편 채취하는 광물의 이부를 세로 바치게 한 것이다. 정약용이 산 19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는 문호개방 전 조선왕조 사회의 마지막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조선왕조적 경제체제가 가지는 모순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시기이며 그 때문에 그 것을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카롭게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터럭하나도 썩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한정된 지배권력을 놓고 벌이는 당재, 탐관오리의 착취, 토지의 겸병 등 극한적 상황 속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일반백성은 최저 생존마저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지도층에 대한 저항의식을 높여 주었으며 당쟁으로 분열된 지도층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무장판란에 대처할 능력마저도 상실하고 있었다. 이러한 극한적 상황 속에서 일반백성, 특히 농민의 인구이동성을 증가시켰고, 이것은 농민의 정치의식을 높여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농민의 정치의식은 시장경제와 화폐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계층질서의 변화가 일어났으니 노예층이 자유민이 되거나 양반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도교계통 역시 16세기 초에 그 신앙의 총본부인 소격서까지 이 학자들에 의해 혁파당한 처지에서 이 시대에는 풍수계통을 통해 정감록 같은 유형으로 새 인물 정도령에 의한 새로운 역성혁명의 의식을 민간사이에 유포, 고취시키면서 당시 지배층에 저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