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한국천주교회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1920-1929년)

▲ 간도협약이 체결되던 1909년. 간도의 한 벌판에 백의를 입고 모인 한인들.
조선인들은 19세기 전반부터 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해 정착촌을 형성했다. (출처-조선일보)

      일제의 민족분열 책동과 민족해방운동의 활성화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다툼이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식민지, 반(半)식민지 민중들은 거족적인 반제투쟁을 벌여나갔으나 제국주의 세력의 잔인한 학살로 끝이 났다. 이에 따라 식민지 반제투쟁은 새로운 국제적 연대투쟁을 모색하게 되었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1919년 코민테른이 창설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은 러시아와 직간접적 관련을 맺으면서 부르주아 이념체계를 벗어나 사회주의를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제는 1919년 조선의 3,1 만세운동 등 식민지 민중의 거센 반발을 겪고 나서 문화정치로 형식을 바꾸고 내용적으로는 경찰, 군대를 늘리는 방법으로 사찰을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직업적 친일파를 대거 육성하여 친일적인 여론의 조성하고,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민족해방운동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특히 일제가 회사령을 철폐하고 산미증산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주, 예속자본가, 친일관료들을 적극적으로 종속시키고 민족개량주의를 퍼뜨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민족개량주의, 자치주의에 기울던 사람들은 결국 대세편승론자로 전락하여 1930년대에 이르면 일제의 폭력적 탄압에 직면하여 적극적인 친일파로 전락하게 된다.(최남선, 이광수 등)

 

또한 1920년대에 들어서면 일제 자본의 본격적인 유입으로 부분적이나마 노동자계급이 형성되고 산미증산계획에 따른 농촌수탈로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활발해짐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이 사회운동의 기초로서 객관적 배경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 세력은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 후 1927년 결성된 신간회에서 민족주의 그룹들과 민족해방을 위한 통일전선을 맺게 된다. 한편 노동자들이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을 결성한 것을 기점으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아래 전국적으로 발전하여 갔다. 1929년 원산노동자 총파업은 “노동운동의 통일과 무산자의 세계적 제휴를 도모하고 무산계급의 해방을 기한다”는 강령에서와 같이 국제 연대적인 노동운동의 발전을 드러내고 있으며, 국내의 반제 반봉건투쟁이 여전히 국내에서도 노동자와 농민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한편 해외의 민족해방운동은 국내보다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해외 거주 조선인은 1920-1930년대는 3백만에 이르렀고, 해방 당시에는 2천5백만 조선인 중에서 5백만이 해외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현지에서 민족적 차별과 식민지인으로 고통과 모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민족해방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비록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남만주, 연해주 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기지는 민정조직과 군정조직을 두루 갖춘 자치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민정체제로서 외교적 노력에 의존한 결과가 지리멸렬한 성과를 남겼던 것과 비교된다.)

 

비교적 자유로운 민중교회, 간도 천주교신앙공동체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주의 세력들도 국내 제도교회를 장악한 교권세력의 영향권을 벗어나 해외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 중에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던 안공근, 곽연성과 같은 천주교인들도 있었지만(조광,<박해로 얼룩진 한국천주교회사> 33면 참조,인천교구 홍보국) 대체로 해외 천주교신앙공동체의 중심은 간도지역에서 형성되었다.

 

간도 지역의 천주교신앙공동체는 국내의 제도교회와 성격상 많은 차이를 갖고 있었다. 1909년에 간도의 용정과 영암촌에 성당이 세워지고, 1920년에 원산대목구가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어 간도지역을 담당하게 되어 이후 1928년 7월 연길교구가 설정될 때까지 브레신부는 매년 간도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한국교회사연구소,<한국가톨릭대사전> 821면 「연길교구」 참조) 그러나 간도지역은 지역적으로 먼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제도교회의 힘이 구체적으로 미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간도 지역의 천주교회는 주로 평신도 회장들의 지도아래서 자율적인 사목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수 있었다.

 

간도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9세기 말부터 국내에서 토지를 빼앗기고 봉건정부의 학정에 시달리던 조선인 이주민들이 정착해 살면서 주체적으로 신앙을 수용하였다.(간도의 천주교회는 김이기, 김영렬 등을 스승으로 하여 12명의 제자들이 원산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가 건설한 자주적인 평신도 중심의 교회이다.)

 

또한 1910년에 일제 총독부가 동양척식회사를 통하여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인과 지주들에게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약 10여년에 걸쳐 간도지역으로 이주한 결과 형성된 공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봉건지주들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아울러 이 지역은 잔류한 항일의병들이 모여들고 이후 항일무장독립군이 활동하던 무대였으므로 자연히 민족해방 의식이 고양되어 있었다. 한편 1905부터 1919년까지 줄곧 시행된 제도교회 안의 숙청작업으로 국내에서 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이기당, 안명근 등의 천주교 애국지사들이 속속 몰려드는 곳이기에 자연히 천주교신앙공동체의 성격이 국내 제도교회와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즉, 국내의 제도교회가 전반적으로 친일적 성향으로 돌아섰는데 반하여 간도지역의 신앙공동체는 일부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원칙에 충실한 호교론적인 전교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제반봉건적 의지가 깊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간도 천주교신앙공동체가 일제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915년의 <조선총독부 국경지방시찰부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간도의 천주교는 포교 시초에 의료를 행하고 금품을 주며 또한 중국관헌의 폭정을 배제하여 오로지 보호회유에 힘쓴 결과, 이 교회의 기초가 더욱 튼튼해져 이후 점차 신도가 증가하였다...다른 한편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있다.”(<백산학보 9호> 224면 「조선총독부 국경지방시찰부명서」참조)

 

그런 까닭에 간도지역에서는 용정촌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간도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광범하게 전개된 3.1만세운동을 간도지역에서 처음으로 궐기한 곳이 용정촌이었다. 용정촌에서는 3월 13일 장날에 용정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용정 상시본당회장 김영학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되었다.(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367면 참조)

 

그래서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간도지역에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이듬해 5월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을 용정에 파견하였다. 한편 이 당시에 용정성당은 1909년 이후로 파리외방전교회의 퀴를리에 신부가 부임해 있었지만 국내에서와 같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교권세력으로부터 단죄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간도지역이 전반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물결을 타고 있었으며 친일적인 태도를 취했던 교회권력이 아직 실력행사를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한국교회사연구소,<가톨릭대사전> 883면 「용정상시본당」 참조)

 

같은 해에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민단(義民團)이 천주교신자들을 중심으로 간도에서 조직되었다. 의민단의 단장은 방우룡, 부단장은 김연이었다. 의민단은 200여명의 군대와 200점의 무기로 무장하였다. 또한 그 부대의 재정은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의민단은 1920년 간도국민회에 통합된다.(김홍식 편, <국사대사전> 1095면 「의민단」 참조)

 

요컨대 국내에서 좌절된 천주교 민족해방운동이 간도의 교우촌을 중심으로 다시 활성화되는 과정 속에서 예전 운동방식이 갖고 있던 비민중성과 분산고립성이 극복되고 자주적 신앙공동체의 건강한 면모가 드러난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에 견디지 못한 수많은 동포들은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이주했다.

1909년 간도 벌판에 모인 백의(白衣)의 동포들(위)과 압록강 부근에서 한국인을 총칼로 검문하는 일본군 경비대.



한국 천주교회 지도층의 경제적 토대 : 지주적 성격

 

한편 이 즈음에 국내에서 확고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선교사 중심의 교권세력은 친일제국교회로서 안정적 발전을 도모해 왔다. 이 시기의 제도교회를 바라볼 때, 교회의 선교전략이 어떠한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먼저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경제적 토대를 살펴보고, 이러한 제도교회가 표방했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검토하기로 하자.

 

한국교회는 전교의 자유를 획득한 이래로 줄곧 지주적 성격을 지녀왔다. 개화기에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위세에 편승하여 치외법권적인 특혜를 누리던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의 인적, 물적 토대를 확보하는 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천주교회의 상층 지도자들(주교)은 봉건왕조에 긴밀하게 협조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성당을 지을 땅(본당기지)을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교회 지도자들은 땅을 둘러싸고 조선의 지역관청과 분쟁을 일으키고 때로는 일본인들과 토지논쟁을 벌이면서 땅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경향은 일제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일본정부는 종교적 소유의 토지와 기존에 누리는 특권을 인정해 준다는 이유로 종교세력들을 회유하였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성당과 수도원을 짓기 위한 토지를 매입하고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제와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당시부터 축적하기 시작한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오늘날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규모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태평양전쟁 이후에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독일에서 들어온 베네딕트 수도회가 관리하던 함흥교구의 원산 수도원이 일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막대한 토지와 건축물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친일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일제하에서 봉건지주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동안, 1910년과 1911년에 각기 공포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으로 농민과 민족 부르주아지는 일제로부터 토지와 기업을 빼앗기게 되어 점차 이러한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력한 지지계층은 지주층을 중심으로 하는 부유한 신자들이었으며, 이 토지에 묶여 있던 소작인 신자들이나 “어쩔 수 없는 신자들”(전통적인 천주교 집안 자손들)이 교회에 그나마 머물러 있었다. 이는 이 시기에 교세 성장률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는 데 반하여 교회 소유 토지가 증가하는 현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 당시 빈민층 신자들은 대부분 고향을 등지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하와이, 간도지역 등 해외로 이주해 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교회의 지주계급에 대한 선호도는 대구지방의 대부호였던 서상돈에 대한 처신에서도 알 수 있다. 서상돈은 한 때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간 인물인데, 당시 제도교회는 항일적 운동은 무조건 반대하고 자제를 촉구하는 입장이었으면서도 유독 서상돈의 국채보상운동 만큼은 언론까지 동원하여 적극 후원하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1911년 서상돈으로부터 수만평에 이르는 토지를 희사받아 대구교구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얼마든지 태도를 변화시키는 카멜레온적 속성을 지녀 왔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교회 안에 지주들이 머문다는 것은 교회의 경제적 토대를 확충하는 데 큰 이익을 주는 것이 당연하였던 것이다.(한국교회사연구소,<가톨릭대사전> 593면 「서상돈」참조)

 

19세기 초엽 바티칸 교회의 反민중적 성격과 한국교회의 대응

 

한국 천주교회는 당시의 바티칸의 선교정책의 영향을 받아 더욱 보수화되고 반민중적 성격으로 굳어져 갔다. 본래 한국교회를 담당하던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에서 동방 선교를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조직한 선교단체였으며, 아울러 이 선교단체의 성격 자체가 보수적 경건주의에 입각한 신앙내용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교황청의 입장은 곧 한국천주교회의 공적 입장으로 나타나기 쉬웠다.

 

당시의 유럽교회는 초기 자본주의가 극심한 노동문제를 야기 시키자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등장한 사회주의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노동헌장>(1891, 레오 13세 교황)을 반포하여 교회가 사회적 참상에 대하여 경고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볼세비키 혁명 이후로는 비교적 진보적이었던 당시의 태도를 바꾸어 다시 구귀족 세력과 봉건지주층의 편에 서서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비오 11세 교황) 따라서 민중(노동자)을 편드는 선택이나 교회의 모든 사회 정치적 참여를 불온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티칸의 태도는 교회가 민중적 입장에 서기보다 지주들의 입장에 설 수 있는 유리한 사상적 조건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는 일제하의 조선사회가 아직 자본주의적 단계로 발전되지 못하여 노동문제가 본격화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일제하 한국 사회주의운동은 계급운동이라기 보다는 주로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갖고 출발하였다는 특수성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한국교회는 사회주의를 바티칸의 입장만을 원론적으로 읊조리며 단죄하였다. 더우기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의 항거는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고 교회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9년에 발생한 3.1만세운동은 일제 총독부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에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만세운동은 총독부가 종교정책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으며, 만세운동의 전개과정 속에서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무장항쟁으로까지 발전시키자 천주교회와 총독부는 무척 당황하였다. 특히 천주교회의 지도부는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무조건 신속하게 단죄해 버리고, 천주교회가 만세운동에 동조하지 않았노라고 변명하느라 바빴다.

1938년 12월 20일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압송되는 사회주의자들.
경성지방법원 대법정 앞. 하나같이 머리에 용수가 씌워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관 : 반공주의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나서자 식민지 조선사회에서는 곳곳에서 정치, 종교, 문화적 결사체가 만들어지고, 해외에서는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무장독립투쟁의 열기가 높아졌다. 그러자 천주교회의 교권층은 교회 안에 발생할 지도 모르는 새로운 균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교회의 자선기능을 강조하고 이를 운동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교회 안의 청년단체들이 정치적 참여를 하지 못하도록 제동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 1922년 ‘경성구 천주교회청년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 청년연합회는 사회복지사업과 교육사업을 당면한 과제로 채택하였다. 이들은 구호사업과 언론, 출판사업 등에 나서면서 천주교회의 사회관을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당시의 천주교 사회관의 특징은 사회주의 사상을 배격하면서 기업가와 정부의 노력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사회주의에 관한 사항은 전면화되지 못한 채 원론적 차원에서 경계심을 표명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26년에 사회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6.10만세운동이 발생하고, 1927년 좌우합작으로 신간회가 결성되고, 1929년 원산총파업이 잇달아 일어나자 1930년대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반공주의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다.

 

당시의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강령 속에는 이미 토지개혁을 포함한 반봉건적 요소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전의지가 담겨있었다. 따라서 서구에서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지주적 친일제국교회적 성격을 지닌 천주교회는 이제 관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위협을 느끼면서 사회주의세력에 대항해야 하였다. 한편 일본제국주의도 사회주의세력은 일본 내의 반전주의자와 식민지 조선의 항일무장독립운동 세력을 일컫는 것이었기 때문에 방공(防共)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교회와 일제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반공주의를 보급하기 위하여 제도교회는 1933년 창간된 <가톨릭청년>과 <경향잡지>를 적극 활용하였다.

 

1930년대에는 소련에서 스탈린 체제가 확립되고 스페인 내란과 멕시코 혁명을 겪으면서 바티칸의 반공주의가 극대화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서 교황 비오 11세는 1937년에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Divini Redemptoris)를 발표하였다.여기서 교황은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기독교문명을 지키려는 사람은 누구나 무슨 일을 하든지 공산주의와 협력할 수는 없을 것이다.”(5항)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반공논리는 주로 식민지 조선에서 천주교회가 발간하는 <가톨릭청년>과 <경향잡지> 그리고 베네딕토 수도원의 덕원신학교에서 발간되는 <교우>지를 통하여 선전되었다.

 

1933년 <가톨릭청년>에 연재된 오기순 신부의 「성서상으로 본 공산주의」라는 글을 살펴보면, 그리스도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그 촛점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사유재산권을 부정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으로 부자와 싸우기를 일삼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전연 인연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빈자의 재물욕을 중심으로 한 이런 주의와는 정반대이다.”(<가톨릭청년> 1933.10, 22-23면 참조)라고 밝히면서 신앙이란 종교적 해방만을 뜻한다고 말했다. 또한 1936년 마유진은 “신자들을 노리고 있는 공산주의, 유물론, 무신론, 사이비철학 등을 격퇴시킬 지식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앞의 책, 1936.4, 16면 참조)

 

이는 한국천주교회가 얼마나 사회주의에 대하여 전투적인 자세로 맞서고 있었느냐 하는 점과 아울러 당시의 천주교인들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도 반증해 주고 있다.

 

한편, 이 당시 개신교의 경우에도 제도교회는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반공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 예를 들면 1925년 평양에서 열린 수련회에서 한국YMCA 학생들은 “기독교가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 기독교가 얼마나 동양의 가난한 나라들을 자본주의와 손잡고 착취하고 있는가? 왜 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것들이 그렇게 눈에 띄게 군국주의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더구나 이대위라는 사람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양자 모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말하면서 한국교회가 사회적인 악과 인간 고난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이론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또 예수는 사회혁명가였고, 교회가 사회혁명의 대본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기독교사상>1990.11,권진관 「1920-30년대 급진주의시대에 있어서의 민중과 교회」 117-118면 참조)

 

이는 개신교가 개교회 중심이기 때문에 비교적 신학적 사유에 대한 일정한 자율성을 갖고 있었으며, 한편 흥사단과 YMCA 등 민족적 성향을 가진 종교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천주교와는 사뭇 처지가 달랐다. 천주교회는 신자들에 대한 모든 통제권과 아울러 신학적 판단이 장상(감목, 주교급 성직자)에게 독점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적절한 신학적 사회적 논쟁의 여지를 가질 수 없었다.

 

간도지역 신앙공동체와 사회주의 사상

 

국내에 있던 한국천주교회는 일제와 교권세력들의 막강한 물리적 통제, 그리고 관제 및 교회 언론매체들이 광범위하게 반공이데올로기를 선전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운동이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자라나기 힘들었다고 판단된다. 단지 당시에 국내의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유포되기 시작하면서 천주교 신자층에게도 부분적으로 파급되었을 가능성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1928년에 연길교구(간도지역)가 설정되기까지 간도지역의 교우촌에서는 신앙공동체 안에 사회주의 사상이 이미 전파되어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더러 나타나고 있다.

 

간도지역의 천주교회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국내에 비하여 교권세력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민족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러므로 항일무장독립투쟁이 사회주의적 요소를 수용하기 시작하던 1920년대 중반 이후로 간도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사회주의 사상이 부분적으로라도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톨릭청년> 에서는 1930년에 발생한 간도지역의 5.30폭동 이후 영암촌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5.30 폭동이 일어나자 간도 일대는 공산주의의 붉은 물결이 흉흉하게 굽이쳐 흐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지방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려던 청년들도 진리의 교를 배척하고 악마의 그물에 거리낌없이 걸려 성교촌이라 부르던 이 촌락을 적색화 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물을 치니 그 그물에 걸리는 자가 적지 않았다.”(<가톨릭청년> 1935년.4 , 49면 참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1930년대에는 간도지역의 교회가 두 흐름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28년 연길교구의 설정으로 간도지역에서 새롭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반공주의적인 호교론적 교권세력과 자주적이며 민족적 성향을 가진 신앙공동체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사회주의자가 된 신자들 간에 갈등이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서 점차 일제의 지원아래 반공주의적 교권세력은 간도지역의 천주교회 안에서 주도권을 장악해 가면서 교회를 친일화시켜 갔다. 그러자 영암교회, 도포교회 등은 교회의 친일적 변모에 분노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타격을 받아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최석우 신부 회갑기념 한국교회사논총>, 변진흥,「1930년대 한국가톨릭교회의 공산주의 인식」 457-459면 참조)

 

더우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3년 일제의 북만주토벌 작전이 본격화 되자 친일적 제도교회의 입지가 강화됨으로써 교회 안에 남아있던 사회주의자 그룹이나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던 이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아 간도지역에서 근거지를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 이들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졌던 신자들이나 천주교 민족해방운동 그룹들은 북만주 지역의 항일무장 독립투쟁 단체에 귀속, 흡수, 통합되거나 개별적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제국주의가 독일 나치즘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독일의 베네딕트회가 담당하던 연길교구에서 선교사들은 특혜를 누리며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이로서 사실상 1930년대 이후로는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그 어떤 지역에서도 천주교의 이름으로, 신앙고백을 근거로 민족해방운동에 동참하는 그룹을 발견하기는 힘들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민족사 안에서 구원사를 논하는 입장에서는 한국교회의 불행가운데 가장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이다. 향후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서 천주교 신앙이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민족이며, 나아가 반복음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면서 이제 한국천주교회는 해방 이후까지도 수십년간 민족사 안에서 어둠의 지표로 단죄 받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비극의 문턱으로 들어섰다.

 

해방 이후 벌어질 어처구니없는 교회의 추태와 북한 교회 신자들의 죽음을 어떻게 누가 보상해야 할 지 차차 따져 보기로 하자.

 

 

한상봉 (이시도로)

지금여기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