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유

조선왕조는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변화에 가속도를 붙여준 사건 가운데 하나가 서양 국가들과의 개항이었다. 개항으로 인해 조선은 근대사회로 전환되어 갔다. 그러나 개항이 곧바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 천주교 신앙에 대한 묵인

개항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여러 조약에서도 신앙의 자유에 관한 명백한 규정은 없었다. 극히 일부의 조약에 규정된 종교에 관한 조목은 어디까지나 조선에 나와 있는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했지, 조선인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용인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항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전망이 좀 더 분명해졌다. 시대변화를 감지한 지배층에서도 천주교회 문제를 더 이상 박해로만 일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들은 개항 이후 천주교회신앙이 조선에 더욱 널리 전파되어 있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등의 서양인 천주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이들의 신앙실천을 짐짓 모른 체하면서, 그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 프랑스와의 신앙의 자유 논쟁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한 사건으로, 조선 정부와 프랑스가 1886년에 맺은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들고 있다. 프랑스 측에서는 이 조약문에 천주교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신앙의 자유 허용에 관한 항목을 삽입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측의 반대로 인해 이를 직접 표현하는 대신에, 프랑스 사람이 조선 사람을‘가르칠 수 있다’(敎誨)라는 조문을 삽입시켰다. 천주교회 측에서는 이를 ‘전교의 자유’에 대한 인정으로 확대 해석했다. 물론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해석에 반대했지만, 블랑 주교를 비롯한 조선 천주교회와 프랑스 측은 이 구절이 전교의 자유에 대한 인정이라고 주장하여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한편, 신앙의 자유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전교의 자유이므로, 오늘의 연구자들 가운데 일부는 한불조약이 체결된 1886년을 천주교회의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신앙의 자유가 용인됨.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된 때는 1882년이었다. 이 해에 천주교회는 인현서당(仁峴書堂, 韓漢學校)을 설립했다. 이 학교에는 신자가 아닌 일반인 학생들도 재학하고 있었다. 그 이후 천주교회는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고, 부엉골에 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정의 묵인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후 100년 만에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을 수 있었다.

  • 사면령과 신앙의 자유 허용

1895년 조선 조정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사면의 대상이 되었던 신도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 사면령은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 위한 사전 조처로 해석되었다. 또한 이 해에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이자 독일사람인 뮈텔 주교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만났다. 이때 고종은 1866년의 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했다. 국왕인 고종이 천주교를 인정하고, 종전의 박해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신앙의 자유를 공인했음을 뜻했다. 그러므로 뮈텔 주교 자신도 그날의 일기에서 조선에서 천주교회 박해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가 법적으로 확인된 것은 1899년에 조인된 「교민조약」(敎民條約)에서였다. 이 교민조약은 조선 조정의 관리와 뮈텔 주교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하여 조선인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성문법으로 보장되었고, 천주교 신자들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이 인정되었다. 이 「교민조약」은 1904년에 체결된 「선교조약」(宣敎條約)을 통해서 더욱 보완되었다. 이 「선교조약」에 의해 선교사들은 개항장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일제 강점기

일제에 대한 저항

천주교가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을 무렵, 일제는 한국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까지 말살하며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국인들은 무력을 동원한 직접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거나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응했다.

항일운동에 대한 무관심

일제 강점기의 한국 천주교는 주로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서구권 제국주의 국가 출신의 선교사들이 지도하고 있었고, 이들은 대체로 일제의 침략 행위와 식민 정책에 침묵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정치와 종교 분리 논리

천주교 지도자들의 일본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뮈텔 주교의 경우,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일어났던 중국의 남창교안에서 발생한 가톨릭 선교사들의 피살 소식을 전해듣고는 표면적으로는 중국인들이 일으킨 사건이었지만, 그 배후에 일본인들이 있다고 의심하였다.[9] 또한 일본 정부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악의적으로 조종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1920년대 일본인들이 교회와 한국인들 소유의 토지를 강탈해가는 것을 보고, 분개하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사회 참여 곧 예언자적 목소리를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교회의 임무와 배치되며, 따라서 인간의 영성적 생활을 저해하는 위험한 행위라 인식하고 있었고, 한국이나 일본의 정치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견지하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이후 한국인들의 독립 운동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역사적 비관주의

우선 그들은 독립운동이 공연한 짓이며, 독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립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은 뮈텔 주교뿐 아니라 당시 한국에 와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독립운동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은 부정적 시각을 지녔다. 우선 그들의 눈에 비친 독립운동이 자발적이기보다는 강제적이거나 아니면 마지 못해 참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3·1운동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운동은 강제성을 띠게 되었으며, 다른 독립운동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간도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강제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으며, 이것을 거부하면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고 하여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교사들에게는 독립운동 그 자체가 현존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골치 아픈 행위인데다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 대다수 사람을 괴롭히는 좋지 않은 행동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비친 독립운동의 부정적 측면 가운데 또 하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배신행위를 하는 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군에 의해 학교가 불타고 수상한 사람들이 잡혀갔는데, 그 과정에서 배신행위를 한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즉, 이전에는 독립군이었던 자들이 일본군의 통역자가 되고, 그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들에게 과거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무고로 연루시킨 일도 생겨났다. 선교사들의 눈에는 이러한 사람이 가장 비열한 사람으로 보였다.

선교사들은 기본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철저한 분리, 즉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천주교인이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막으면서, 한편으로 독립운동 자체에 대해서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일부의 항일운동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주교가 반드시 그런 태도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즉, 당시 천주교 평신도들은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그 수나 비중에 있어서도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도 독립운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1990년대 이후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교분리 원칙 속 은밀히 독립운동 참여-신앙과 민족 지킨 '암울한 시대의 예언자'

한국사 연구에서 교회사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교회 차원의 민족 운동 참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 없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구조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 무단정치로 인해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태도는 '정교분리원칙''정치 불간섭주의'여서 천주교 신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주요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를 기획, 2회에 걸쳐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을 연재한다.

105인 사건

"천주교 신부들이 겉으로는 조선 독립에 관해 아무 상관도 안하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인즉 비밀리에 서로 라틴어로 연락하며 또 신자를 시켜 비밀리에 상해와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 거기에는 또한 프랑스 신부들도 있다. 신부들이 이러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교우들이 독립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책망하고 책벌하며 교회에서 내쫓기도 하나 내막으로는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니 신부들을 철저히 조사하기 바란다."(1920년 12 월9일자 의주본당 주임 서병익 신부 경찰 고발장 내용 중에서)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천주교 신자가 관련된 첫 독립운동은 1911년 말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애국계몽단체 신민회 간부들과 그리스도교 요인들을 체포한 '105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제가 평안도 지역에서 배일(排日)사상이 강한 인물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허위 날조해 조작한 사건으로 구속자 700여 명 가운데 105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들 중 1913년 6명만이 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석방됐다. 이때 석방자 가운데 이기당(안토니오)과 안성제가 천주교 신자였다. 이기당은 석방되자마자 서간도로 망명해 광제회와 병학교를 설립해 본격 무장항일운동을 시도했다.
 
3ㆍ1운동

우리 민족의 잠재적 항일 정신은 3ㆍ1운동으로 일시에 거족적 독립운동으로 폭발했다.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은 3ㆍ1운동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은 1919년 3월 5일 저녁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또 3월 8일 대구 시내에서 열릴 만세 행렬에 참가하기로 하고 교사 홍순일의 지시에 따라 신학생 김구정(이냐시오)이 '독립선언서' 등사를, 서정도가 태극기 제작을 분담해 준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에 발각돼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도 1919년 3월 11일 신학생 주도로 만세운동이 있었다. 신학생들은 이날 저녁 교외로 뛰어나가 군중 시위에 가담했다. 용산 신학생들은 또 3월 28일 밤에도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 삼호정 언덕과 새남터 노들 언덕에서 벌어진 횃불만세운동에 합류했다.
평신도들도 각지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미리 천도교와 개신교 등 각 종단과 연합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3월 18일에는 강화에서 천주교 신자인 김용순과 조기신, 신태윤 등이 주도해 군중 1만여 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였다.

또 3월 27일 경기도 고양에선 천주교 신자들이 "우리는 조선 독립운동에 관해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면 직원은 태연히 사무를 집행하고 있으니 조선인으로서 부당하다. 속히 사무를 파하고 우리에게 가담하라"는 독려문을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만세 시위에 참가한 구산공소 청년 5~6명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고, 이들 중 남 마태오 회장 아들은 독립 선언 벽보를 붙인 혐의로 징역 10개월 형을 받기도 했다.
아울러 3월 27일에는 경기도 광주군 망월리에 사는 천주교 신자 김교영이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월 29일에는 용인군 내사면 남속리에 사는 천주교 신자 한영규와 김운식이 마을 주민 100여 명을 이끌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3일 수원에서는 천주교 신자 이순모가 선두에 서서 군중 2000여 명과 함께 우정면 사무소와 화수리 경찰 주재소를 습격, 집기류를 부수고 불을 지르고 일본인 순사를 격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이순모와 김선문, 안경덕, 김여춘, 김광옥, 최주팔 등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됐다.
4월 7일 황해도 신천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천주교 신자 김경두는 "자기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의무이니 한국인으로서 한국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한국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므로 죄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구에서도 해성학교 교사 김하정과 대구본당 신자 김찬수가 신자 2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체포됐고, 전라도 나바위본당 신자 박노익(아우구스티노)은 태극기를 제작해 계명학교 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본측 통계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5월말까지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후 구금된 천주교 신자는 모두 53명이었다. 이 숫자는 불교도 95명, 유교도 55명과 비교해 볼 때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학자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나 체포되지 않았거나 체포된 후 실제로 천주교 신자이지만 교회 처벌이 두려워 그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며 이 숫자 보다 훨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3ㆍ1 운동을 지지하는 프랑스 선교사도 있었다. 당시 안성본당 주임 공베르 신부는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지 묻자 "낮에는 국기를 들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일본인을 죽이지 마시오. 당신들은 지금 맨주먹이니 일본인을 한 명이라도 죽이면 당신들은 수백 명이 죽을 것이오.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 독립을 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고, 못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는 건물도 아예 부수지 마시오"라고 충고했다.

또 만세운동을 질서있게 전개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인 김중묵을 지휘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베르 신부는 일본군에 쫓긴 만세 군중이 안성성당으로 몰려오자 성당 마당에 프랑스 국기를 내걸고, 국제 분쟁의 위협을 들어 성당에 피신한 한국인들을 보호했다.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

3ㆍ1 만세운동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으로 승화됐다.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도 일부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독립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황해도 은율본당 주임 윤예원(토마스) 신부는 성직 박탈이라는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신자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고,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프랑스 선교사로서 안중근(토마스)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했던 빌렘 신부는 상해 임시정부 대표로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또 당시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상해 임정파리위원부에 "한국 교회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을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러한 상해 임정에 대한 천주교측의 일련의 협조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졌다. 일부 한국인 신부들은 일제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 독립운동은 간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 3ㆍ1운동 이후 간도 지방으로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펼쳤다. 명월구성당과 대장 방우룡의 집을 군사령부로 쓴 의민단은 무장병력 300명, 군총 400정, 권총 50정 정도로 무장,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

일제는 간도 지역 성당을 한국인 독립운동 근거지로 인식하고 종교 탄압에 주력했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살던 금당촌과 동포대, 현성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교우촌 대교동에선 신자들이 학살되고 부녀자들이 폭행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현대 신학자들과 민족사학자들은 일제시대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민족 활동에 대해 독립운동과 신앙 가운데 어느 것도 저버리지 않고 '국적없는 식민주의적 신앙관'과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현실초월주의적 신앙관'을 탈피하고자 했던 '암울한 시대의 예언자들'이라고 평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일제 강점기 36년간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 변화

  •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과 1886년의 한불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천주교가 종교로서 공인되었다.
  • 1911년 : 조선대목구가 경성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었다.
  • 1920년 : 경성대목구 담당이었던 함경도 지방에 원산대목구가 신설되었다.
  • 1927년 : 경성대목구 담당이었던 평안도 지방에 평양지목구가 신설되었다.
  • 1928년 : 북간도연길대목구가 신설되었다. 이전까지 북간도는 경성대목구 소속이었다.
  • 1937년 : 대구대목구 담당이던 전라도 지역에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가 신설되었다.
  • 1939년 : 강원도 지역에 경성대목구에서 춘천지목구가 신설되었다. 평양지목구가 평양대목구로 승격되었다.
  • 1940년: 1월 12일 : 원산대목구가 해체되어 각각 함흥대목구와 덕원자치수도원장구가 신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