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지로 가는 조선, 천주교회 지도부의 입장(1905-1919)
구한말 의병
식민지로 전락하는 조선땅
1904년 러일전쟁 이후에 조선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일본 제국주의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책동을 개시하였다. 먼저 일본제국주의는 5만명의 일본군을 인천에 상륙시켜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1904)’를 체결하였으며, 뒤이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고 그 해 8월에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1905년에는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인정하고 카스라-태프트 비밀협약(7.29)을 맺고, 2차 영일동맹(8.12)을 맺었다. 그 뒤 11월에는 을사오적(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하영)을 내세워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주권을 사실상 빼앗아 갔다.
이에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의 지휘아래 통감정치가 조선에 실시되었다. 그러자 고종은 이 조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밀사들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으나 회의 참가조차 거부당하고 오히려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은 폐위되고 조선군대는 강제해산 되었다(신한일협약 1907). 그 뒤 1909년 사법권 박탈, 1910년 6월 경찰권 박탈, 8월 한일합병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자 총독정치의 실시를 공포하고 식민지 통치기구의 기틀을 잡아갔다. 총독은 일본 천황의 직속하에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다. 총독은 행정, 입법, 사법, 군사 통수권에 이르는 무제한의 권력을 법적으로 보장받은 식민지 통치의 최고권자였다.
일제는 모든 기관을 식민지 통치에 알맞게 개편하여 일본인들에게 실권을 맡기고 중추원이라는 총독부 자문기구를 만들어 이완용, 송병준 등의 매국노들을 참여시켜 친일세력을 육성하였다. 또한 일제는 총독부로부터 면단위에 이르는 통치기구를 세우면서 치안을 확보하고 항일세력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취하였다. 이들은 헌병대를 각 지역에 주둔시키고 일본인들에게 모든 행정사무를 관장케하여 조선 민중의 정치, 사회, 경제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야만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한 것이다. 심지어 소학교 교사들 조차 칼을 차고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는 초대 총독 데라우찌(寺內)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법률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한편 일제는 1910년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식민지 통치의 경제적 기초로 삼았다. 즉, 토지조사 사업의 결과 조선후기 사회에서 줄곧 쟁점이 되었던 토지소유 문제에 있어서 경작권을 비롯한 농민의 권리를 부정하고 지주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인하여 줌으로써 지주층을 일제의 유력한 협조자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소유권 산정에서 신고만 하면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하였으나 그 심사과정에서 경작권을 가진 농민의 토지소유를 부정하고 왕실소유지, 관유지, 신고에서 누락된 토지 등을 모두 몰수하여 나중에 동양척식회사를 통하여 일본인 지주들에게 헐값으로 넘겼다. 이 당시 총독부에 몰수된 토지는 조선의 총 경지면적의 40% 이상이나 되었다.
그 결과 토지에서 내몰린 대부분의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나 친일 매판 지주의 소작을 붙여 먹거나 그도 안 되면 살기
위하여 만주나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처형당하는 의병들
민족해방운동의 기운
이 과정에서 우리 겨레는 민족해방을 위한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나라를 말아먹은 조선 봉건왕조에 기댈 수 없었던 애국적 인사들과 민중들의 투쟁이 그것이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맺어지자 주권을 되찾으려는 의병항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의병투쟁은 농민, 노동자, 봉건유생들이 거족적인 차원에서 전개한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의병투쟁은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계급계층이었기 때문에 서로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서 장기적인 투쟁으로 발전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당시의 개화파 관료들과 봉건정부,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는 일본군에 의해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의병투쟁은 일제의 1909년 ‘남한 대토벌’작전에 몰려서 결국 좌절되었다. 그 이후 일제는 1910년 안악사건, 1911년 신민회의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을 일으켜서 조금이라도 식민통치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세력은 모두 제거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대토벌에도 불구하고 잔여 의병세력은 황해도 지역과 태백산맥 줄기로 이어지는 산악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1914년 경에 가서야 일제의 우세한 병력과 집요한 토벌로 거의 소멸하게 되었다.
한편 민중들의 투쟁은 일제를 물리치려는 의병투쟁에서 반봉건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되었다. 토지조사 사업으로 토지소유권을 상실하고 경작권마저 불안정한 상태에 빠진 농민들은 일제가 더욱 강화시킨 소작제도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표시하게 된 것이다. 더우기 총독부는 삼림법, 국유림 구분조사, 임야조사사업을 강행하여 농민들이 삼림원료나 땔감, 녹비 등을 채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반대하여 농민들은 ‘납세거부 투쟁’(1910)과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산발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이 발전하여 3.1만세운동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만세운동 때에만 보아도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33인 민족대표는 비폭력 원칙을 갖고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독립청원과 독립선언 등을 주장하다가 그 대부분의 대표들이 이후에
친일분자로 변절하였지만, 농민들은 만세시위를 지속적으로 확산시키면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3.1만세운동 이후에는 민족 부르조아지들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이 쇠퇴하고 점차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면서 노동자, 농민의 파업투쟁, 소작쟁의가 국내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
천주교회 지도층의 호교론적 태도 : 친일화
조선사회가 일제의 침탈 속에서 점차 완강한 식민체제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한국천주교회는 어떻게 대응해 갔는지 살펴보자.
개항 이후 한국천주교회 지도층의 일관된 사목정책은 ‘정교분리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가 한 사회 안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마찰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교회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따라서 교회는 구한말 조선 봉건왕조 시기에는 조선왕실의 귀족들과 양반층에 대한 선교활동에 주력하면서 문제가 발생할 때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힘을 빌어왔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이 일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맞닥뜨려지자 새로운 정치권력인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지를 통하여 교회의 안전을 얻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영신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키고 천주교회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라도 정치적 도전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조치였다.
이러한 교회 지도층의 태도는 이방인 선교사로서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이해관계에 얽매기에는 너무도 ‘이방적’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탈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그 식민지에서 교회가 법적 보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실제 서구 열강은 오랜 세기에 걸쳐서 식민지 정복을 통해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왔으며, 이는 자국의 영토확장과 대립하지 않았다.
실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천주교회 지도층의 관심은 오로지 안전하게 천주교회를 유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애초에 조선봉건왕조로 부터 100여년에 걸쳐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근대국가로 비쳐지는 일본의 지배가 선교사업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한 측면도 있었다.
물론 선교사 가운데 빌렘 신부와 같은 경우에는 안중근과 깊은 친교를 나누는 가운데 한국 민중의 염원을 간파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극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지도층의 사목방침에 따라 정치적 개입을 회피하는 일치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입장이 한국교회 안에 일관되게 먹혀들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비록 교회 안에 한국인 성직자들이 더러 있었지만 세력화되지 못하였으며, 실질적으로 교회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모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909년에 베네딕도수도회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선교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봉건적이었으며, 신앙적으로 경건주의에 빠져있으며, 사목적으로 정교분리주의자였다. 이들은 현실 영합주의적인 주교들의 사목지침에 충실하였다.
한편 천주교회의 친일화 경향은 일본 통감부측의 회유책이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통감부에서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에 외국공사관이 철수하자 선교사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정당성을 해외에 전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통감부측에서는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연회를 베풀고 선교사들이 기왕에 누리던 특권을 법적으로 보장해주고 교회 소유 토지를 인정해 줄뿐만 아니라 면세특권까지 주었다.(<기독교사상>1990.4,윤경로,「일제의 기독교정책과 조선전도론」 107-110면 참조)
이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선언하고 오히려 일본의 통치가 교회를 위하여 유익하다는 망언을 일삼으며, 1907년부터는 민중의 민족적 위기의식이 정치적 저항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내세구원을 지향하는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즉, 일제의 침략은 한국인의 죄 탓이므로 회개와 기도로 내세의 평안을 구하라는 것이었다.(<역사비평> 1990 여름, 이혜석,「한말 미국선교사들은 무엇을 전파하였나」 254-255면 참조)
한국인 성직자들의 이중적 태도
한국인 성직자들은 민족적 위기에 직면하여 민족에 대한 애정과 교회의 친일적 입장 가운데서 갈등을 빚어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족적 정서와 아픔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나름대로 역사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아직 한국인 성직자들은 교회 안에서 크게 영향력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숫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1900년 당시 성직자 구성은 프랑스인 40명, 한국인 12명이었고 1910년 당시에는 프랑스인 45명, 독일인 2명, 한국인 13명이었다.) 모두가 젊은 사제들로서 프랑스인 교구장의 철저한 감독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활로를 찾아 나갔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국민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진척된 교육사업이었다. 본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시작한 교육사업은 한국인 성직자들이 배출되면서 이들에게 맡겨져 본격화되었다. 강도영, 김학성, 김양홍, 손성재, 김문옥 신부 등이 참여한 교육활동으로 1900년에는 본당 수 40개에 학교 수 61개로 나타났고, 1910년에는 본당 수 54개에 학교 수 124개로 증가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부록편> 322-324면 참조)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는 야학교나 직업학교로서 기초교육에 머물렀기 때문에 개신교의 경우와는 달리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기에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계몽적 성격을 갖는 교육활동마저 여전히 봉건적이고 호교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프랑스 교구장의 관장하에 있었다는 데 그 원인을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안중근이 뮈텔 주교를 찾아가 민립대학 설립을 제안하였을 때, 뮈텔 주교가 "신앙인들이 교육을 많이 받으면 신앙이 약해진다"는 이유로 거절한 사실에서 그들의 기본적 교육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 성직자 중 일부는 교구장의 정교분리적 사목방침에도 불구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에 나름대로 기여하였다. 1896년 서품받은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 성당에서 의병들에게 침식을 제공하고 격려해 주어 신도들이 대거 의병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고무하였다. 또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본당에 삼위학교를 개설한 뒤 <월남 망국사> 등을 배우게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였다.(「정규하」<가톨릭대사전> 1027면 참조)
윤예원 신부는 황해도 은율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중 3.1 만세운동에 참여함은 물론 상해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운동 참여 권유서인 '천주교 동포요!'란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신자들과 동료 성직자들에게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러 다녔다.(한국교회사연구소,<황해도천주교회사> 128-130면 참조)
1. 뮈텔 주교의 문장에 등장하는 태극 문양. `순교자들의 꽃을 피워라`라는 내용의 사목표어 위에 등장하는 태극은 독립신문 제호에 실린 태극기의 태극과 문양이 동일하다. 2. 안중근 의사의 혈서에 등장하는 태극 문양. 혈서에 등장하는 태극은 현재의 태극기와 양방(홍색 부분)과 음방(청색)의 위치가 같지만 방향은 반대로 그려져 있다. 3. 1946년 세례식 직후 감곡성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신자들의 오른쪽에는 임 가밀로가 고종 황제로부터 선물받았다는 태극기(위)가 걸려 있다.(자료출처: 평화신문 )
민족해방운동에 동참하는 평신도
한편 이 시기에는 개항 이후의 열려진 공간 속에서 교회로 진입한 상층 지식인이나 애국적 인사, 교회의 교육활동으로 의식화된 젊은이들이 민족적 위기를 맞아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는 안중근(토마)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안중근은 평신도 지도자로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참가하였다. 그뿐 아니라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으로서 식민지 조선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에게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활동을 하면서 줄곧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한국교회사연구소, < 최석우 신부 회갑기념 한국교회사론총>,이주호,「신앙인 안중근론」 383-402면 참조)
그 외에도 안중근의 사촌형제인 안명근은 남만주에 무관학교를 만들어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신천 안악 등지의 부호와 유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거두어들이고, 조선 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이른바 안악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원행섭, 한순직과 안명근은 10년간 복역을 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한국교회사연구소, <황해도천주교회사> 362-363면 참조) 이에 앞서 1907년 조선 군대가 해산되자 일어난 의병전쟁에서 천주교인이었던 김상태는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대구지방의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교회 안에 민족적 위기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서상돈이 교회 안에서 호응을 받으며 지방유지로서 자기 역할을 하였던 반면에 이기당은 교회에서 단죄를 받으면서도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5개월간 복역하였다. 그후 이기당은 서간도 무송현에서 광제회를 조직하고, 통화현에서는 3,500여명의 회원을 가진 자치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등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또한 1919년에는 식민지 조선의 다른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인들도 대거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특히 서울, 강화, 안성, 수원, 평양, 해주, 대구 등지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당시의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3.1운동 관계로 서울, 원산, 신의주,평양, 해주, 공주, 대구 등 7개 도시의 감옥에 53명의 천주교인이 갇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개신교나 천도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숫자이지만 전통종교인 유교도 55명, 불교도 95명과 비교할 때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고 한다.(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366면 참조)
더우기 신학생들마저 민족적 의기를 분출하였는데, 서울의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은 교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시내로 진출하여 민중들의 궐기에 동참하였다. 대구의 성유스띠노신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된 일이 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후 이전의 한국통감부(남산)를 조선총독부로 개편합니다. 이 사진은 남산에 있던 조선 총독부의 모습입니다. 그 후 1916년부터 26년까지 10년동안 경복궁 일부 정전을 허물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를 신축합니다.
제도교회의 애국운동 세력 탄압
그러나 이 시기에 표출된 천주교회 안의 민족운동세력은 교회 지도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에 직면하였다. 이미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고착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교회 지도부는 현실적으로 친일적 태도로 입장을 바꾸어야 교회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교구장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회의 교권세력은 개화기 교회의 왕조적 반일 태도로 인하여 천주교에 호감을 갖고 입교한 천주교 신도들이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자 심각한 우려감을 나타냈다.
제도교회가 조선의 새로운 주인으로 나타난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탄압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우선 교회 안에 있는 이러한 저항적 신도 집단들을 단속해야 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교회내 진보세력에 대한 숙청과 교정작업이 시행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교회 내적으로 볼 때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운동이 활성화된 시기이며 동시에 제도교회가 친일교회로 변모하기 위한 교회 내 숙청기라고 볼 수 있다.
천주교회의 지도층(교권세력)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일제에 대한 친밀성을 안정적으로 얻어내기 위하여 예전부터 기본적 사목정책이었던 정교분리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불간섭주의로 성직자 그룹을 묶어 세웠다. 이 과정에서 교권세력은 민족운동에 참여한 일부 성직자들에게 제재조치를 가하여 무력화시켰다.
빌렘 신부는 비록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였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에게 병자성사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2개월간의 성무집행정지-성사권을 일시적으로 박탈하는 조치-처분을 내렸다. 결국 빌렘 신부는 교구장 및 다른 성직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1914년 프랑스로 송환되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황해도천주교회사> 201-202면 참조)
한국인 성직자였던 윤예원 신부는 교구장이 정치불간섭주의 사목지침을 통해 경고를 보내어 독립운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천황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학생들은 신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무기정학에 처해졌다. 이 때에 교구장들은 한결같이 민족의 거사였던 3.1운동을 단죄하였다. 서울 교구장이던 뮈텔 주교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하였으며, 대구 교구장이던 드망쥐 주교는 “일본 정부는 합법적 정부이므로 우리 가톨릭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쳤다”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한편 교회 지도층은 평신도들의 민족운동에는 교도권을 통하여 파문을 시키는 등 강경대응을 하였다. 안중근의 경우에 그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처음에는 천주교인이라는 사실마저 부인하다가 결국 그의 행동이 애국적이긴 하지만 살인은 안 된다고 단죄하면서 병자성사마저 거부하였다.(한국교회는 아직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해명이 없이 1979년에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를 위한 추모미사를 거행하였다) 한편 김윤식 신부를 도와 교회활동을 하였던 이기당은 그 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1916년 신의주 본당의 서병익 신부에게 파문당했다. 그리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안명근은 뮈텔 주교의 밀고로 헌병대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교권세력은 교회 내 민족주의 세력을 숙청하고 교회 제도권의 방침에 순응하게 만드는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감행한 결과, 천주교회를 친일제국교회로 탈바꿈하는 데 필요한 안정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이후로는 적어도 자료상으로는
국내에서 교권세력의 친일적 입장에 도전하는 세력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천주교회의 지도층은 호교론적 태도 속에서 우리 겨레가 처한 시련에 응답하기 보다는 오히려 일제에 협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삶 안에 복음적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사명에서 비껴갔다.
한국교회의 일제에 저항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제도교회로 부터 탄압을 받았다. 마치 예수님이 유대종교의 박해 속에서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이, 모든 예언자가 그러했듯이 참된 교회는 박해 속에서 그 꽃을 찬란히 피우는 것이다. 이들이 교회 안에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들은 그들의 행위를 교회 안에서 설득할만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신학)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일차적 생산자라고 할 수 있는 성직자들 안에서도 교권층이 설파한 정교분리주의와 내세중심주의적 신학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한국인 성직자의 경우에 민족의 아픔을 조선 민중들과 함께 느끼고 있었지만 교권세력의 신학 이데올로기와 사목적 경고에 제대로 답변도 못한 채 순응하고 말았다. 이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인 신학생들을 교육시킬 때, 높은 수준의 신학교육 보다는 사목활동에 필요한 정도의 낮은 수준만 교육시킴으로써 한국인 성직자들은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는 데 한계를 지녔으며, 교도권을 가진 프랑스 선교사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당시 서구 가톨릭교회는 산업사회를 경험하면서 1891년 <노동헌장>이 발표되는 시점을 전후하여 노동자들의 사회적 참상에 항의하는 사제들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나 한국교회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이에 무관심한 사제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참여 사상이 발전할 수 없었다.
둘째, 안중근과 이기당의 모습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듯이 교회 안의 민족주의 저항세력은 고립분산적으로 투쟁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애국적 인사들은 각기 개인적인 신앙고백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즉, 이들은 개인적으로 다른 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을 뿐 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다만 일부 사제들과 개인적 친분을 통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에 친일적인 교권세력이 이들을 다른 신자들로부터 분리시켜 억압하는 정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파문당하거나 교회에서 주변화되었다.
또한 안중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당시 교회 안의 민족주의적 대변인들은 대체로 봉건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가난한 기층민중의 이해를 대변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신자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안중근과 그의 아버지
안태훈 역시 개화파의 일원이었으며 갑오경장 내각을 지지하였으나 1898년에는 반제반봉건을 주장하던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데 선봉대로
나섰다.(<안중근 의사 추모자료집>, 신용하,「안중근 사상과 국권회복운동」22-27면 참조) 물론 이러한 계급적 입장을 보면, 당시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중적 당파성을 상실한 채 국권회복만을 주창하던 의병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당시 개신교 지도자들은
의병항쟁뿐 아니라 민권운동에도 발벗고 나선다는 사실과 비교된다.)
자료출처: 한상봉 (이시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