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도모지라는 특이한 고문이 있었다. 질긴 조선 종이를 몇 장 쌓아 놓은 뒤에 물을 약간 부린다. 잠시 후에 그 중 한 장을 얼굴에 밀착시킨다. 그리고 얼굴에 붙은 종이가 마르면 그 위에 물 뿌린 종이를 다시 붙인다. 이렇게 하면 점점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마침내 대여섯 겹의 종이를 붙이면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 종이를 얼굴에 바르는 종이라고 하여 도모지(塗貌紙)라고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가장 가벼운 고문 중 하나는 '보리 가시랭이로 입 문지르기'였다고 한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날 정도로, 가벼운 고문 형벌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이와 같이 가벼운 형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때리기'고문의 여러 가지 유형을 살펴보자. 뺨치기(돌로 입이나 뺨을 침), 모서리치기(곤장의 모서리로 정강이뼈나 발뒤꿈치를 침), 기왓장 앉히기(저고리를 벗기고 양손을 뒤로 묶어 깨어진 기왓장 위에 앉히고 등을 침), 등치기(태로 죄인을 등을 치는데, 등은 오장이 있는 곳이므로 이로 인한 인명 살상이 많았다고 함), 마구 치기, 몽둥이찜질, 끈치기(끈으로 두 발의 엄지발가락을 묶어 세 모서리가 있는 막대기를 기워 거꾸로 매달로 끈을 침) 등이 있었다.

 

 다음으로 '누르기', '비틀기', '달기'가 있다. 무릎뼈 문지르기(양 다리의 무릎뼈를 둥근 나무막대기로 문지르는 것으로 이는 원래 열 가지 중 죄, 강도, 살인과 같은 중죄인에게 가하는 것이었다), 무릎꿇리기(사각의 두 속에서 무릎을 꿇게 하고 양 손을 뒤로 묶어 막대기로 때리면 무릎뼈가 두의 뒷 모서리에 닿아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돌 매달기(목에 씌운 나무칼을 나무에 매단 채 발에 돌을 닮), 주리틀기 등이 있었다.

 

 '끊기', '벗기기', '찌르기'고문도 있었다. 복숭아뼈 부근의 힘줄을 끊는 것, 가죽을 벗기는 것, 볼기를 찌르는 것 등이다. 또한 불로 지지거나, 잿물을 콧구멍에 부어 넣는 고문도 있었다.

 

절두산 성지 형구

곤장

 

십자형 형판)

* 전통적으로 태형, 장형, 곤장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며 피 집행자의 양 팔목과 무릎, 발목 부분을 가죽 끈으로 결박한 다음 엉덩이를 노출시켜 집행

* 착고 : 여러사람의 발목을 끼워 도주하지 못하도록 함

* 추(나무수갑): 죄인의 손목에 채우는 수갑으로 남자가 죽을죄를 범한 경우에만 채운다.

* 여자나 유형(유배를 보내는 형벌)이하의 범죄자는 비록 죽을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채우지 않았다고 함

* 철퇴, 도리깨: 법외 형구로서 전시에 전쟁포로 등을 다룰때 무기로 사용했을것으로 추정함

가 또는 칼)

* 죄인의 목에 씌우는 나무칼로 고려시대부터 고려시대부터 널리 사용함.
조선시대에는 부녀자와 유생들에게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특전을 베품
사진 : 날마다 좋은날

 

조선시대 형구들

 

 

 

가새주리, 줄주리, 팔주리

조선후기에 등장한 주리는 생각보다 혹독한 고문방법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인 사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도둑 체포 및 수사를 맡은 서울의 포도청(捕盜廳), 지방의 진영(鎭營)에서 도적을 취조할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리를 트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도적을 취조할 때 쓰는 가혹한 고문으로 주리 외에도 난장(亂杖)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난장 치는 방법이 나오는데, 난장은 도적의 두 엄지발가락을 묶은 다음 나무를 두 정강이 사이에 세워 발을 위로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때리는 고문을 말한다.

그런데 발바닥을 치다보니 매를 맞다가 잘못 맞아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문헌에서 난장은 발가락을 뽑는 형벌이라고 말한 것은 그같은 상황을 말한다. 아무튼 조선후기에는 도적을 다스릴 때 주리와 함께 난장 고문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였다.

의금부에서 시행한 난장 : 의금부에서 죄인을 여러 사람이 난타하는 난장 집행 장면.
그러나 도적에게 가한 난장 고문은 발바닥을 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레가 1874년에 쓴 『조선천주교회사』에 보면 조선에서 시행된 세 가지 주리 틀기의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달레에 따르면 주리에는 먼저 가새주리가 있었다. 가새는 한자로 ‘전도(剪刀)’이니까, 가새주리는 ‘전도주뢰(剪刀周牢)’를 말한다.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주리 트는 방법이 바로 이 가새주리이다. 가새주리 사용법은 두 무릎과 두 엄지발가락을 꽉 잡아매고, 그 사이에 두 개의 몽둥이를 끼워서 뼈가 활등처럼 휠 때까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것이다.
 

가새주리 집행 장면 : 김준근의 한말 풍속도첩에 실려 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그에 따르면 가새주리 외에도
줄주리팔주리가 있었다고 한다.

줄주리는 두 발을 묶어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넣는 것은 가새주리와 동일하나, 양쪽 무릎에 맨 줄을 두 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당겨서 두 무릎이 맞닿게 하여 고통을 주는 방법이다.

 

다음, 팔주리는 양팔을 등 뒤에서 서로 엇갈리게 팔꿈치 위까지 잡아 맨 후 두 개의 몽둥이를 지레처럼 사용하여 양어깨에 접근시킨다. 그 다음에 죄인의 팔을 풀고 발로 가슴팍을 짓누르며 양 팔을 끌어 당겨 뼈가 제 자리에 돌아오게 하는 고문 방법이라고 하는데, 직접 보지 않고 글로만 봐서는 정확한 팔주리 트는 방법을 알기 힘들다.

 

아무튼 주리를 틀다보면 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래서 주리트는 것도 기술이 필요했던 것 같다. 달레에 따르면 경험 많은 집행자들은 죄인의 뼈가 휠 정도에서 주리 틀기를 그치지만, 경험이 없는 풋내기가 팔주리를 틀 경우에는 죄인의 뼈가 대번에 부러지고 피와 함께 골수가 튀어나오기 예사였다고 한다.

‘노주리’ 트는 모습 : 김준근의 풍속도첩에 실린 그림. ‘노주리’는 샤를르 달레가 이야기한 ‘톱질’을 말한다.
톱질은 말총으로 꼰 밧줄을 넓적다리에 감고 두 사람이 밧줄의 한 끝씩을 쥐고 줄이 살을 파고 들어가 뼈에 닿을 때까지
서로 당겼다 늦추었다 하며 고문하는 것이다. 한편 ‘노주리’는 위에서 언급한 ‘줄주리’와도 큰 차이가 없는데,
다만 노주리에는 정강이를 끼우는 막대기가 없는 것이 줄주리와 차이가 있다.

 

한편, 중국의 협곤, 조선에서의 주리와 유사한 고문이 동 시기 일본에서도 있었던 듯한데, 영조 40년(1764)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이듬해 돌아온 조엄(趙曮)이 여행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주리 틀기는 조선후기에 새로 생겨난 고문 방법으로, 서울과 지방의 도적 떼들을 체포하고 취조, 고문할 때에만 쓰고 일반 사건에서는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원칙이 잘 지켜지기 어려웠다. 실제로 숙종 37년(1711) 1월 15일에 강, 절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주리를 추국죄인에게 사용했다고 해당 관리가 탄핵을 받은 사례는 주리 틀기가 관청에서 남용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후 영조 4년(1728)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난에 연루된 대역 죄인들을 포도청으로 이송하여 가쇄주리를 가한 적이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몇 년 후인 영조 8년(1732) 6월 20일에 판중추부사 이태좌(李台佐)는 당시 혹독한 주리 틀기의 고통 때문에 거짓으로 자백하는 자도 많았다고 전제하고, 주리 트는 고문을 영구히 없앨 것을 영조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문명(趙文命), 김재로(金在魯) 등의 반대로 포도청 가새주리만 없애고 다른 주리는 놔두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그러나 영조 때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해서 가새주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조정의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서 관리들이 가새주리를 사용해서 종종 문제가 되곤 했으며, 강도, 절도 외의 다른 사건에서 주리가 남용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주리 남용 사례는 정약용『목민심서』에서 지방 수령들이 화가 치밀면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할 주리 틀기를 아전들에게까지 함부로 사용한다고 개탄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약용은 이에 덧붙여서 주리 틀기의 심각한 후유증을 언급하였다. 즉 일반 백성들이 한번 주리 틀기를 당하면 다리가 망가져서 평생 부모 제사도 지내지 못할 정도로 거동이 어렵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실제 지방관의 주리 남용 사례를 하나 열거하면 순조 때 평안감사 조득영(趙得永)을 들 수 있다. 그는 매번 화가 치밀면 일반 백성들과 양반들에게까지 함부로 주리를 틀곤 했는데, 그같은 정황이 순조 8년(1808) 암행어사 서능보(徐能輔)의 염탐에 드러났다.

 

한편, 주리 남용은 관리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정조 임금이 심리, 판결한 중죄수 사건기록을 모은 책자인 『심리록(審理錄)』을 보면 조득영보다 앞서 지방 고을의 토호나 일반사람들도 간혹 주리를 틀곤 했음을 알 수 있다.

 

 

 

주리트는 광경 : 한말에 찍은 두 장의 사진으로 주리트는 생생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생활과 풍속』(서문당)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