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순교자
이름 |
출신지
- 연고지 |
순교일
/ 나이 |
순교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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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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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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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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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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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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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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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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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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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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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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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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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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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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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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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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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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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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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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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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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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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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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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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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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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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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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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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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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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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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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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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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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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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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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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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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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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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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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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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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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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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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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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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 |
박씨사
10쪽 /증 27의 박원서마르코의 아내 |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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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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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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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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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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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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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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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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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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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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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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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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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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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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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효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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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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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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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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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위
순교자 중 신원과 자료가
확인된 순교자
제 8대 조선교구장 뮈텔주교가 자신이 교구장으로 임명된 소식을 들은 1890년 8월 4일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933년 1월 14일까지 거의 매일같이 쓴 치명일기에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치명일기 가운데 병인박해때 수원순교자 78위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수원성지에서는 그 중 8분의 순교자를 선발하여 2008년 1월에 수원교구장 주교를 거쳐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 복자후보로 추천하였다. 수원 8위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원방지거( ? -1871.3.25)는 수원성지의 대표 순교자라 할 수 있다. 내포출신으로 이미 오래전에 치명한 원베드로의 손자요, 원바울로의 셋째 아들이다. 원방지거는 특히 눈먼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고 첨례일을 교우들에게 밝혀주는 등 모범의 생활로 교우들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천주십계와 칠죄종, 성교사규, 조만과, 사본요리 등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며 삼구(三仇:영혼의 세 가지 원수로서의 마귀와 세속과 육신.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존재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세가지 걸림돌)와 영신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독려했다. 병인년에 체포되었지만 가산만 몰수당하고 석방되었는데 그로부터 5년후 신미년(1871년)에 체포되어서는 한사코 피신을 하지 않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는 고문과 고통 속에게도 신앙을 증거하였다. 수원옥 형옥에 투옥이 되었는데 함께 갇힌 배교하여 밀고한 한 모라는 자를 오히려 극진히 사랑하고 자식에게 그를 원수로 삼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밀고자들과 박해자들을 오히려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은인이라고 고맙게 여겼다. 먹을 것이 혹시라도 생기면 매번 한 모라고하는 밀고자를 비롯한 형옥의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교리를 가르쳐 옥중에서 두 교우가 통회하고 열심한 신자가 되기도 하였다.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1871년 신미년 3월 25일에 수원화성 토포청에서 미루나무에 교수형으로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8위 순교자 중에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말구), 박익서는 3형제이다. 박의서(사바스 1808-1867.8.8)는 수원유수부 가사면 걸매리 출신으로서 병인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걸매 교우촌의 전교회장을 지냈다.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고 마을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신 분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집안의 대를 이을 맏이로서 종가집안을 이어가야 했으므로 일시에 배교의 유혹이 들었지만, 3형제 중의 막내 박익서의 순교원의를 듣고는 마음을 돌이켜 함께 순교하자고 다짐하며 삼형제가 수원화성에 와서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걸매 교우촌은 당시 수원유수부 내의 수원고을 안에서 단일 교우촌으로는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으로 20여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현재 걸매리는 대전교구에 속한다. 옛날에는 수원유수부 가사면 걸매리였는데, 현재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이다.
박원서(마르코 1817- 1867.8.8)는 3형제 중 둘째이다. 형 박의서(사바스)와 동생 박익서 사이에서 3헝제가 변치않는 형제애로 의롭게 지낼 수 있는 가교의 역할하였다. 특히 박원서(마르코)는 착실한 수계생활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신 분으로 알려져 있고, 수원화성으로 끌려갈 때 형, 동생과함께 순교할 것을 다짐하고 서로 격려를 해 줌으로써 삼형제가 배교없이 영광스러이 순교할 수 있었다. 삼형제 가족의 깊은 우애는 참으로 모범적이었고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없이 깨끗하게 주님을 증거하였다. 또한 박원서(마르코)의 처인 박마리아도 함께 수원화성으로 체포되어 1867년 8월 8일 모두 함께 순교하였다.
박익서(1823-1867.8.8) 3형제 중 막내. 천성이 곱고 순결하였지만, 평소 신앙생활은 순탄치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큰형 박의서(사바스) 작은형 박원서(마르코)와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후에는 그동안의 모든 자신의 잘못을 상등통회하고 순교의 원의를 고백하여 형들의 순교의지를 북돋아주었다. 그리하여 3형제가 함께 수원화성에서 배교없이 용감히 순교하였다. 박익서는 세례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큰 형이 잠시 맏이로서 갈등을 느꼈을 때 굳은 순교의 원의를 보여주어 맏형 박의서(사바스)가 막내동생의 그런 흔들림없는 모습을 보고 함께 순교를 결심하도록 깊은 영향을 주었다. 3형제의 시신은 그 당질 웅진(바오로)씨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김사범( ? -1866) 은 청주출생으로 수원 방아새골의 전교회장직을 맡았고 다블뤼 안주교님을 도와 3년동안 복사활동을 통해 봉사하였다. 특히 여러해동안 병고에 시달린 부친을 극진히 섬겼는데 외인들까지도 “효자 하면 김사범이지”라고 말할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부모사후, 동생이 진 빚을 아무 조건없이 대신 갚아주고 형제간의 화목에 좋은 모범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66년 병인년에 처음 체포되었을 때에는 1차 배교하여 풀려났지만 이내 천주신앙을 준행하였고 다시 체포되었을 때는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형옥에 갇혀 교우들을 권면하다가 태장 수백도를 맞아 장살형으로 용감히 순교하였다.
박말구(1836-1868)는 당시 수원유수부 관할에 있던 충청도 홍주 원머리 출신이다. 홍주는 구한말 홍주성 전투에서 의병대장 민종식을 중심으로 당시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항거해 1906년 홍주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장렬히 산화한 곳이다. 박말구(마르코) 모친은 천주를 굳게 믿었지만, 부친은 천주학은 절대 안된다고 엄하게 꾸짖었고, 금지령을 내렸지만, 모친을 따라 끝까지 신앙생활에 충실하였으며 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이곳 수원화성으로 압송되었다. 박말구가 잡혀올 때 슬퍼하는 부모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치명원의를 발하였다. 수원화성 토포청에 갇힌 사촌형제의 나약함을 깨우쳐 주었고 토포청의 미루나무에 매달려 교수형으로 순교영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윤자호(바오로, 1809-1868.7.18)는 충청도 강경, 충주 계롱산, 공주 유기 지역 출신이다. 파평윤씨 후손으로써 노성 땅에서 생장하여 강경, 충주 등을 거쳐 공주 유기의 전교회장이 되었다. 윤바오로는 외간 여성의 유혹을 물리쳐 부부간의 정결의 덕을 잘 지켰다고 전해진다. 다블뤼 주교님을 도와드리며 전교회장직을 맡아 열성을 다했으며, 명강의로 한양과 지방에 두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가난하게 사는 중에서도 설교를 들으려 찾아온 교우들에게 대추를 사서 대접을 했고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애긍전(전교기금)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자신을 약탈하려는 도적들을 용서하고 잡으러 온 포졸들로부터 구출하여 주어 감동시켰다고 하는데, 포장과 포졸들로부터도 그의 인품을 인정받을만큼 성덕이 깊으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수원 형옥에 수감되어서는 함께 갇힌 교우들을 입교권면하고 자신의 의매인 김마리아가 구해다준 밥을 자신이 먹지 않고 동료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삿자리를 구해다가 자신은 맨바닥에 앉고 동료에게 앉히는 등 자선을 베풀다가 토포청 미루나무에 교수형으로 치명한 것을 보인다.
지다두(1819-1869.5.23) 수원 양간 용수말 태생으로 수원 서남 안중공소 인광리의 만석군의 사위로 재산을 관리하였다. 넉넉한 생활을 하였지만 세상재물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주님을 증거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 1866년에 체포되었는데 그 때는 ‘나는 하느님을 모르오’라고 하며 풀려났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순교를 다짐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뒤인 1869년에 ‘피신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진위감옥에 수감되었고 아들에게 자신을 따라 위주 치명할 것은 준비하라고 당부하였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였다. 수원화성으로 이송되어 장안문밖 장터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두둘겨 맞아 장살형으로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