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丙寅迫害)
1866년 봄,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을
일컸는 말로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첫번째는 1866년 봄,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한다.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북경조약의
중재자로서 연해주를 획득한 러시아는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남종삼(南鍾三;1817~1866)
)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의 다블뤼(1818.3.16~
1866.3.30) 주교와 베르뇌(1814~1866.3.7.) 주교가 한달 뒤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神貞王后 ;1808~1890)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롤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좇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1830.7.7~1884)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 때의 성인들은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를 포함하여 정의배, 우세영, 최형, 전장운, 장주기, 황석두, 손자선, 정문호, 조화서, 이윤일 등 24위이다.
<두산대백과사전> 참고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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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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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직접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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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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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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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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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丙寅)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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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71 (고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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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침입문제, 불란서 함대 침입,남연군묘 도굴사건, 미 함대 침입에 앙갚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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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교등 2분, 주교와 5인 신부, 남종삼 황두석 홍봉주 등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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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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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위가 시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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