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박해 (丙午迫害)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어 9월 20일까지

1846년 6월 5일(음 5월 12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어 9월 20일(음 7월 30일)에 종결된 천주교 박해를 말한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諡聖)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하였으나 기해 ‘척사 윤음(斥邪綸音)’이라는 박해의 근거는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2~1846) 신부는 1846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주교의 지시로 외국의 선교사가 입국하기 쉬운 새로운 해로를 개척에 나서야만 했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서해안 등을 항해하다가 6월 5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김대건 신부와 관계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형벌을 받고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Cecille)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기해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3명의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조정에 전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세실의 조선 원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어 효수 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그로부터 3일 후에는 현석문(玄錫文 ; 1797-1846)도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에 남아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李干蘭;1814-1846), 우술임, 김임이(金任伊 ; 1811-1846), 정철염(鄭鐵艶 ; 1817-1846)은 매를 맞고 죽어 순교하였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해온 신자들의 대응이 재빨랐고 조정에서도 새로운 척사령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을 순방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어 1846년 11월자의 서한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고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1847년에  10월 15일 루케 주교가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시켰고 1847년 로마에 제출된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1857년 9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82명 전원이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이중 79명이 시복 조사 절차를 끝내고 1925년 1925년 7월 5일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베드로 성전)에서 시복되었다. 또한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의 행적을 조사하여 1918년 예부성성에 접수시켰고, 50년 만인 1968년 시복 절차를 마치고 복자위에 올랐다.  이들은 다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인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 참고

구분

연도

박해의 직접원인

경과 

순교자수

비고

병오(丙午)박해

 1839~
 (헌종12~)

선교사 입국위해
바닷길을 알아보려다 뜻밖에 김대건 신부 잡히게 됨.

김대건신부, 현석문,
우술임 등 순교,

박해자 조만영의 죽음과
불함대 내항으로 박해가
커지진 않음

성직자1
교우200여명
이상

9위가 시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