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년(순조 27) 정해년에 일어난 가톨릭박해사건.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됨에 따라 가톨릭탄압의 법적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국 곳곳에서 소규모의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하에서도 정하상(丁夏祥)을 중심으로 한 교회재건운동과 베이징[北京(북경)]으로부터의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827년 2월 전라도 곡성(谷城)에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해 가톨릭신자를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나 곡성을 시발점으로 한 가톨릭신자박해는 곧 전라도 전역을 거쳐 경상도, 충청도, 한성에까지 파급돠어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약 4개월간 대대적인 박해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500여 명의 신자가 체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전라도에서 신태보(愼太甫)·이일언(李日彦)을 포함한 8명, 경상도에서 김사건(金思建)·박보록(朴甫錄) 등 6명, 충청도에서 황지석(黃之石) 등 2명이 옥사 또는 순교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배교(背敎)하여 풀려나거나 유배되었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컸던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구분

연도

박해의 직접원인

경과 

순교자수

비고

정해박해 [ 丁亥迫害 ]

1827년(순조 27)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됨에 따라.

전라도 전역을 거쳐 경상도, 충청도, 한성에 까지 파급

500여 명의 신자가 체포. 전라도 8명, 경상도 6명, 충청도 2명,

나머지는
배교.방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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