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박해 (乙亥迫害) (1815년
)
경상도 교우 100여명 체포, 그중 30여명 순교.
조선의 천주교는 숙종 이후 거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지식층에 전파되었다. 16세기에도 소현세자나 홍대용 등이
들여온 천주학 서적들에 대한 연구는있었지만, 종교로 받아들여 정식으로 신자가 생긴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였다. 그 대표적인사람이
이승훈이었으며,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권철신 등 재야 남인 세력들 사이에서천주교는 조심스럽게 퍼져
나갔다.
정조 대에 급격하게 불어난 천주교도는
정조 말년에는 교인이 1만여 명에 달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대에 대해 보수 지배층은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군신 관계와 상하 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 원리는 조선 왕조를
지탱해 주는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과 유일신 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 사회에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탈과 횡포에 시달리던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이에 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에
의한 상소와 박해 운동이 일어났다. 그에 대해 정조는 '사교는 얼마 가지
않아 자멸할 것이며, 이는 유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박해를 피하였다. 또한 당시 남인 시파의 실권자이자 삼정승을 두루 거친 채제공의 묵인도 천주교의
보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고 정순왕후를
둘러싼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일대 박해가 벌어진다.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조 대에 수세에 몰렸던
벽파는
정적이었던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해 즉각 정치적 대공세를 펼쳤고, 벽파의 충실한
후견인이었던 정순왕후는 1801년 언문 교지를 내려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다.
오가작통법으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 중에는 초기교회의 지도자였던 남인 시파 학자들이 많았는데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이벽, 권철신
등이그들이었다. 또한 단지 연구를 목적으로 한 학자들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정약용, 정약전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박제가 등도 이때 관직에서
쫓겨난다. 1801년 순조 1년에 일어나 500여
명의 크고 작은 희생자를 낸 신유박해는 인륜을 무시하는사교를 뿌리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정적인 남인 시파와
진보적인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정치적 숙청이었다. 신유박해
이후 남인 시파는 완전히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당독재인 외척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성립
세도는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의 사림들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였다. 그것이 정조초에 이르러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정조 대는 실학 사상가들에 의해
북학적인 정책이 건의되고,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호의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이 높아져 갔기 때문에 보수적 정치 세력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있었다. 이와 같은 안으로부터의 변화와 도전에 불안해진 보수 정치 세력은
정조의 죽음과 어린순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진보 세력인 실학 사상가 및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숙청과 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당파에 의한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의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권이형성된다. 순조, 헌종, 철종에 걸친 60여 년 간의 정권을 독점한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정조로부터 순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탁을 받은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조가 죽고 1800년 11세의 어린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그때까지 당색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조순은 시파계임에도 불구하고 벽파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함으로써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 데 성공한다. 대비의수렴청정 기간에는 대비의 외척인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벽파계가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1804년,순조가 15세가 되던 해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다음 해에 죽자 순조의 외척이 된 안동
김씨일문이 세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파는 시파의 대가인 풍양 조씨, 남양 홍씨, 나주 박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등과 제휴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이 때문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잠시
풍양조씨 일문에게 권력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이 즉위하자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다시금 안동 김씨 일문이 정권을 잡게된다. 또한 철종의 비까지 안동 김씨 일문에서 냄으로써 안동 김씨의 외척세도 정권은 대원군이등장하기까지
60여 년 간 이어진다.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로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배제시켜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의 부패와 백성을상대로 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이러한 독재 정권에 맞선 것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보게 되는 농민층이었다. 막바지에 몰린 농민들의 불만은
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비롯, 19세기 중엽 이후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했다. 이러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막을
내리게 한다.
아래는
을해박해시대때
경상도
지방에서
순교한
100여명의
순교자들의
자취와 이야기이다.
대구 경상감영 공원(대구시 중구
포정동 10-15) |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우 천주님을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다시 배교를 취소한다고 큰소리로 외치자 화가 난 관장은 심하게 매질을 하게 하였고,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끌려서 옥에 들어서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1815년, 당시 그녀의
나이 50세 가량이었다.
을해박해 시기에는 주로 청송, 진보, 영양 일대에서 체포된 교우촌 신자들이 이곳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으며 목숨을 바쳤다.
경상감사 이학수가
아뢰기를, 죄인 가운데 박보록(방로), 김사건(안드레아), 안사홍(안군심), 박사의(안드레아) 등 네 놈은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니,
끝내 고치지 않고 재범하는 자의 형율에 해당한다는 것은 다시 의론할 것도 없습니다. ... 신의 대구감영에 체포해 가둔 박보록 등 15명은 모두
깨우쳤다고 자복하였으나 ... 형조에서 아뢰기를, 박보록, 안사홍, 김사건, 박사의 등 4명의 죄수는 죄를 범한 것이 용서할 수 없으며, 정황
자취가 의심할 것이 없으니, 예에 따라 감사에게 명하여 격식을 갖추어 결안을 받고 아뢴 뒤에 처리토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일성록, 순조 27년 6월 7일>
나는 천주교인이오. 내가 여기에
있다고 영장에게 가서 알리시오. |
박해가 일어나자 수색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한 김세박 암브로시오. 대구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서 동료들을 만나 서로 힘이 되어 주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는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고 처형의 날을 기다리다 형벌과 대재로 쇠약해진 탓에 67세의 나이로 옥고를 치르던 중 숨졌다.
이 옥을 복락소로 생각하시오.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
옥에 갇혀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한 토론을 벌이게 된 하느님의 종 박경화 바오로.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은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감사가 새로 부임함에 따라 옥에서 끌려나와 다시 형벌을 받게 된 그는 노령에다 여러 차례의 형벌로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알고
평온한 기색으로 기도드리며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33세 가량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을 증거하며 숨을 거둘 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경상감영 감옥터(대구시 중구 서내동 8-1 현 서문로
교회터) |
1815년 을해박해 때는 하느님의 종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시우 알렉시오가 옥사하였고, 1827년 정해박해 당시에는 경상감옥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사형판결을 받은 후 감옥생활을 하던 하느님의
종 박경화 바오로, 안군심 리카드로,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옥사하였다.
청송 죄인
최봉한(프란치스코)은 정약종을 따라 다니면서 배웠고, 주문모를 스승으로 섬겨 전해 받았으며, 사학의 장물들을 수습해서 몰래 재를 넘어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는 유민을 유혹해서 모아 스스로 교주가 되었는데, 잡혀 와 감영의 옥에 갇혔다가 곧 죽었습니다.<순조실록, 권18, 15년
6월 18일>
서문밖 오리정
마당 |
조선시대 말전 골목, 소전 골목 서북쪽에 있던 민정을 살피던 오리정 마당은 조선시대 중죄인들을
이곳에서 교수형으로 처형했다고 전한다. 병인박해 때 마산교구 관할의 밀양 명례와 백산에서 신석복 마르코와 오 야고보가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와 이곳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할 대안 성당 신자들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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