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儒林)들의 반발과 보유 의식의 청산

1)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을사년 (1785) 봄 추조(秋曹),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이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 집에 모여 예절을 거행하다가 형조 관리들에 의해 적발된 사건으로서, 양반들은 풀어주고 중인만 치죄하였다. 중인 김범우는 유배돼 1년 뒤 배소에서 사망하였다. 양반 교인들은 가족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 가정 박해는 천주교가 탄압되는 최초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전 박해 기간에 걸쳐 천주교인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배교 유혹이 되었다.

이승훈은 가족들의 박해에 못 이겨 천주교 서적을 모두 불사르고, 벽이문을 지어 발표했다.
정약전, 권일신, 이존창 등도 가족의 박해를 면하지 못했고, 이 벽도 부친의 강력한 반대에 못 이겨 신앙을 중단하고, 그 때문에 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다가 1786년 봄 병사했다.
 

명례방모임

2) 178710월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

정미년(丁未年) 즉 1787년 10월경에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등이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걸 목격하고 성토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미반회사건을 발설한 사람은 이기경(李基慶)으로, 원래 그는 이승훈, 정약용과는 친밀한 사이로, 그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대하며 보조를 같이했었다. 그러나 정미년부터 그들과 떨어져 오히려 그들을 반대하고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이기경은 정미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서 서학서만을 보고 있는 걸 목격했었다고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폭로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낙안은 이를 왕에게 알려 그들을 벌주어야 한다고 극렬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직접적인 박해가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점차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라고 하는 상소문이 잇달아 장차 박해를 유발케 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서학서 반입 금지를 청하는 상소가 17851787년간 끊이지 않았고, 정조 12(1788)에 왕은 비변사의 <화서지청(火書之請)>을 받아들여 서학서 반입을 일체 금하고 가장(家藏) 서학서를 모두 수화(水火)에 던지게 하였다.

 

3) 179111월 신해 진산사건

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정조 15년) 한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 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천주교가 조선의 해서(海西)·관동(關東) 지방의 일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았으며, 또 그의 외종형 권상연은 자기 집의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제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전해짐으로써 조정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하는 정책을 썼다. 한편으로는 천주교 탄압을 반대하는 노론 시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주교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 같은 인물은 귀양 보내는 데 그치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소위 공서파가 대립,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암투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파견을 보류하였다가, 1794년 주문모 신부를 선교사로 보냈다.

이를 학자들은 한국천주교회 제2의 탄생기라 부른다.

위패를 찾는 관헌(제14도).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신주를 없애 버렸다는
소식에 관헌들이 그의 집을 수색해 뒤뜰에 묻힌 위패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