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까지 조선사회 내의 일부 선각자들에 의한 실학운동과 서학연구를 통하여 근대에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사회의 현실모순에 대한 통찰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정신이, 주체적 활동을 통하여 도입되고 연구된 서학과 상호작용하여 형성시킨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실학과 서학은 전통적 가치를 고집하는 벽이론자(闢異論者)와 위정당국자의 학문적 반격과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활동을 전개하여 한역 서구 과학기술에 대한 북학파의 주장이 생겨났고, 천주교 신앙의 실천과 교회의 창설을 보았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천주교는 경기와 내포(內浦)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尹持忠) 집안에서 폐제분주(廢祭焚主)의 문제가 일어났다.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1742년, 교의적(敎義的)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紀律的)인 잠정적 변법(暫定的辨法)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 바 있었다(이 조치는 1939년에 교의적
결정에 의하여 조상제사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천주교회가 인정하게 됨으로써 실효되었다).
|
윤지충(바오로, 1759-1791)가 신주를 불사르자 종친들이 나무라고 있다.
|
당시의 이 기율적 변법에 터전하여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은 그의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았고, 제사를 드리지 않고
천주교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렀다.
이 때문에 윤지충은 강상(綱常)을 범한 죄인으로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 때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權尙然:윤지충의 인척)이
그를 옹호하고 나서 문제는 더욱 소란해졌다. 진산에서의 사건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공서파(攻西派:천주교를 공격하는 세력)는
신서파(信西派:천주교를 신봉 또는 묵인하는 세력)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서서 이 일을 정치문제로 확대시켰다. 공서파는 폐제분주는 전통적 유교사회의
제례질서를 파괴하는 패륜(悖倫)이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불효·불충이라고 잇따라 상소를 올려 신서파를 공격하며 정조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도 사태를 심각하게 느끼게 되어 마침내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으로 하여금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문초하게 하였다. 윤지충은
조상제사는 허례이며 진정한 조상추효(祖上追孝)의 방법이 아님을 항변하였으나, 결국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를 신봉하고 이를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되었다. 사건은 그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또 이미 들여온
홍문관(홍문과)의 서학서도 불 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
전주시 전동성당내에 있는 윤지충 순교상
|
이 진산사건은 한국천주교 내외에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사건인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천주교회는 밖으로부터 전도의 사명을 띠고 한반도에 들어와
전교활동을 펴는 선교사의 활동 없이 쇄국 조선의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에 의하여 창립된 교회였다. 즉, 서학(西學)이라는 학문활동으로 천주신앙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창설된 교회였다. 그들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은 17세기 초부터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부연사행원(赴燕使行員)들에 의하여 도입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의 접촉과 연구를 통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 이해에 터전하여 천주신앙을 얻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천주교의 도리가 유교의 그것과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현세당위론적인 선(善)의 추구를 전지전능의 천주와 연결지어
이해하였고, 내세(來世)와의 연관에서 파악하고 천주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이제 신해진산사건으로 그들이 믿고 있던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라는 처지에 한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조상제사 문제에서 지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교의 전통적 가치체계로
후퇴하거나, 그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적 가치체계를 숭봉하느냐를 택하여 하나의 결정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어려운 결정의 시기에 탈락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새로운 결심에서 신앙생활의 새 경지로 매진하는 교인도 많았다. 이 시련을 통하여 한국천주교회는 보유론적 천주이해라는 초기신앙
형태의 문화주의적 종교신앙에서 순수한 천주신앙으로 접어들게 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제2의 장이 열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공서파는 천주교회에 대한 공격을 더욱 날카롭게 하게 되고,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구실을 조상제사의 거부라는 데서
명목을 찾게 되었다. 이 논리는 이후 100여 년을 두고 천주교 박해의 이유로 십분 활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