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교회의 창설 배경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되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우리 나라 사회의 여러 상황들이 영향을 미쳤다. 교회 창설의 첫번째 배경으로는 천주교회의 동양 선교와 한역 천주교 서적의 전래를 들 수 있다. 동양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16세기 말엽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천주교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의 활동이 우리 나라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마태오 리치 신부였다. 그는 천주교 신앙이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수 있다는 보유론(補儒論)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천주교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와의 관계를 밝힌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을 지었다. 또한 17세기에 들어와서 그 밖의 여러 선교사들도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는 많은 종류의 책을 지었다. 당시 중국을 왕래하던 우리 나라의 사신들이 가져온 한문 서적들 가운데는 중국 선교사들이 지은 책들이 있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 책들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세기 초, 천주교 책들이 전해지자 우리 나라의 학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를 읽어나갔다.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거의 200여 년 동안 천주교의 책들을 읽고 검토해 왔다. 그 가운데서 천주교를 새로운 인생 철학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곧 천주교를 새롭고 참다운 종교로 믿고 실천하게 되었다. 이러한 천주교 서적의 연구는 이땅에 교회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지게 된 첫번째 배경이다.

그 두번째의 배경으로는 당시 우리 나라 사회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조선 왕조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이끌던 사상은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하여 성리학은 조선 왕조의 사회와 정치를 이끌어나갈 힘을 잃어버렸고, 일부 지식인들은 성리학 대신에 새로운 가르침을 찾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보려던 일부 관리들과 지식인들은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 조선 왕조의 사회는 양반, 상민, 노비와 같은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차별을 강요하고 있었으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이와 같은 신분 제도가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아무런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기근과 전염병의 주기적인 발생, 양반 관료들의 민중 수탈 등으로 인해 불안한 생활을 하던 많은 이들이 각종 신흥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다.

또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18세기의 사회에서는 실학 사상(實學思想)이 발전하고 있었다. 몇몇 실학자들은 중국의 유교 철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공맹 당시의 유학 사상에 있던 천(天) 또는 상제(上帝) 관념에서 천주교의 유일신 사상 이해에 도움을 받았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조)



2.한국교회의 창설 과정

홍유한을 비롯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교리를 더욱 깊게 연구해 나갔다. 1777년에 이르러서는 권철신, 정약전 등의 지식인들이 학문을 깊게 연구하기 위하여 한적한 절간에 모였다.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열렸던 그러한 학문 연구 모임에 이벽(李檗)도 합류하게 되었다.

천주실의」와 「칠극」등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였던 이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천주교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하였으며,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벽이었다.

이벽은 천주교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자 하여,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된 이승훈에게 북경 선교사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 가서 선교사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책들과 성물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가져온 책을 이벽에게 넘겨주고, 이벽은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한 다음 이승훈과 함께 친척 친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벽은 정약용 형제들에게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김범우를 비롯한 중인들에게 전교하였으며,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덕망이 높던 권일신 등을입교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벽과 권일신 등은 1784년 9월(음력)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이후 김범우의 집에 모여 함께 신앙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를 발족시켰다. 이 신앙 공동체의 출현은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교회는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창설은 이땅에 천주교가 알려진 이후 200여 년이 지난 다음 이룩된 일이다. 우리 교회는 창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200여 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조)



3. 초기 교회사의 전개

서울 명례방에서 창설된 한국 천주교회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을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해 나갔다. 그리고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은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고, 유항검은 전주에서 신앙을 전파해 갔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기쁘게 실천해 나갔고, 교회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온 힘을 바쳤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1785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적 신자들이 종교 집회를 가지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들에게 검거되었다. 그러나 당시 형조는 양반들의 범죄를 다스릴 수가 없어, 체포된 양반 출신 신자들 대부분은 방면되었다. 그렇지만,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고 귀양 가 살던 중 고문의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그는 이땅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1786년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는 등 조직을 다져나갔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가성직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하여 북경 주교에게 문의를 하고, 1790년에 도착한 북경 주교의 답변에 그 부당성이 지적되어 이 제도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아니하였다. 이 답변과 함께 북경 주교는 조선에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하고, 교회의 조상 제사 금지를 분명히 하였다. 조상 제사가 금지됨으로써 양반 출신 신자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조상 제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양반으로서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친척과 동료로부터 버림 받게 됨을 의미하였다. 교회 창설 초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양반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탈락되어 나갔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에 순교하게 되었고, 그들의 순교는 양반층 신자들의 탈락을 더욱 촉진시켰다.

한편,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794년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였다. 중국인 성직자인 그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렬한 전교 활동으로 교회는 크게 발전하고 신자수는 1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신자들은 주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와 같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鐘)이었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교요지」(主敎要旨)란 제목의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였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4. 순교자와 증거자의 시대

교회가 1784년에 세워진 이후 1800년에 대략 1만 여 명에 달한 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특권이 없던 힘없는 사람들이었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며, 여성들이 많았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초기에, 교회는 집권층의 탄압을 받았다. 1801년의 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등 지도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사형을 면한 일부 신자들은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박해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조선 왕조의 존재를 부인하고 서양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이 편지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에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신자들이 피난처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교회 재건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정하상 등은 북경의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어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로마 교황청에까지 편지를 보내어 주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고, 드디어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북경교구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 신자들의 청원을 받은 교황청은 조선 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교구 제1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으나, 1836년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신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신앙도 깊이를 더하게 되었으나, 1839년의 박해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신앙을 변호했던 정하상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으로 인해, 이제부터 조정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나갔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김대건, 최양업 등을 선발하여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선교사 영입을 위해 노력하다가 1846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를 전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왔으며, 최양업 신부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사목 활동에 적극 투신하다 병사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의 내용을 쉽게 알려주고 묵상에 도움이 되도록 “천주가사”를 지어 부르게 하였다. 1860년대 초 거듭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866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병인대박해로 인해 8,000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당시의 박해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발생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1839년과 184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등 79위 순교자는 1925년에 시복되었고, 1866년의 박해 중에 순교한 24위 순교자는 1968년에 시복되었으며, 이들 한국 순교 성인 103위는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시성되었다. 한편 이벽을 비롯한 한국 교회 창립 선조들과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시복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5. 신자들의 신심생활

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금지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탄압을 각오하면서 신앙을 실천하고 신심 생활을 계속해 갔다. 이러한 신앙 실천과 신심 생활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교회 서적에 대한 독서였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창설 직후부터 일반 민중들을 위해 한글로 교리서를 번역해 나갔다. 교리서의 번역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은 최창현이었다. 중인 출신인 그는 일반 신자들을 위하여 한문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번역한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주일과 축일에 읽는 성서를 간추려놓은 「성경직해」를 들 수 있다. 또한 당시 교회에서는 「성교일과」, 「천주성교공과」를 비롯한 여러 기도서들이 번역되어 기도 생활의 바탕이 되었다. 박해 시대의 교회에서는 「성녀 아가다」, 「성녀 빅토리아」와 같은 로마 시대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며 신앙을 증거할 용기를 길러갔으며, 「성녀 데레사」와 같은 성인전을 통하여 신앙의 열정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신자들은 여러 종류의 묵상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지충을 비롯한 한국 순교자들의 기록을 소중히 간직하여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 루갈다의 애절한 편지를 필사하여 서로 돌려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특별히 성모, 예수 성심, 순교자 등에 관한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신심은 박해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었으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교자가 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박해 시대 교우들은 미사에 참여하기가 극히 어려웠지만, 주일과 대축일이면 반드시 신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공소 예절과 같은 전례 생활에 참여하였다. 비밀리에 열리는 그러한 공동 집회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까지 각오하여야 했으나, 여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숫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해 갔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충청도 배론, 경상도 신나무골 등은 대표적인 교우촌이었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일부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 생활해 나갔으며, 상당수의 신자들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 살면서 은밀히 신앙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교회 창설 초기부터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함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세례를 받고 서로 한 형제가 된 신앙 공동체 안에는 결코 반상의 차별이 없었다. 상민, 노비, 백정들이 양반과 함께 서로를 신앙의 벗[敎友]이라고 부르며 평등하게 지냈다. 일부 신자들은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기도 하고, 부유한 신자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희생하기도 하며, 모두가 자신의 신앙에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사랑의 실천자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증인이었다. 그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지니고, 자신이 터득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과 나누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진리의 탐구자였다. 그들 또한 평범한 인간들로서 죽음의 어려움에 고뇌하기도 하였다지만, 참다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6. 박해의 원인과 의미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100여 년 동안은 박해 시대로 불릴 만큼 교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었다. 박해의 원인을 정치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받들던 사회였다. 당시 성리학은 정치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구실까지도 하고 있었으며, 이를 지켜나가는 일이 집권층에게 맡겨진 가장 큰 임무였다. 그러나 당시 성리학은 여러 방면에 걸쳐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는 집권층의 정치 사상과 통치 능력이 부인되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집권층에서 그와 같은 현상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때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거의 모든 것을 부인하며 새로운 가르침을 펴나가고 있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성리학에서 강조되던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부인하고 있었으며, 당시 사회의 풍습과는 달리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또한 조상 제사마저 거부하고 있었다. 유학자들이 제사를 강조했던 까닭은 제사가 조상에 대한 효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양반 중심의 정치 체제에 충실히 복종하는 효자들을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천주교회는 조상 제사를 일종의 미신 행위로 간주하여 그 가치를 부정하였다. 천주교회는 양반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신앙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집권층에서는 전통적 유교 가치의 보존과 양반의 정치적 특권 유지를 위하여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하느님을 왕보다 더 높이고, 양심법이 실정법보다 더 존귀하다고 주장하였다. 종교와 양심이 국가의 권위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아왔던 동양 문화의 전통에서는 신자들의 이러한 행위가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당시 사회에는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한 후 그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자 하여, 조정의 명령 없이도 신자들에게 사사로이 박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리의 부패가 교회의 탄압을 가중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신자들은 또한 집안의 형제 친척과 이웃들로부터 박해를 당하였다. 신자들은 일종의 정치범이나 사상범 또는 풍속사범으로 처벌되었으므로, 그러한 ‘범죄자’가 자기 집안에 생겨날 경우 가문 전체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의 독특한 정치 문화와 가족 제도 때문에 박해가 더욱 심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과 토호들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여 산속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민중 봉기를 일으키거나 도적떼가 되었던 사회 불안으로 인해, 신자들이 민중 봉기에 동조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집권층에게 천주교회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주어졌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천주교회 박해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교회에도 있다. 16세기의 중국 선교 초기와는 달리, 교회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인색하였다. 동양의 미풍 양속에 속하는 조상 제사마저 미신으로 간주하였고, 교회의 이러한 판단은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까지 해석되었으며, 이는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따라서 조상 제사의 금지를 비롯 당시 교회 당국의 편협한 태도에서도 박해의 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은 1936년 5월 26일 “조국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의무에 관하여” 일본 주재 교황 사절에게 보내는 포교성성 훈령으로 신사 참배를 허락하고, 또 1939년 12월 8일의 “중국 예식의 일부 의례와 서약에 관한” 포교성성 훈령으로 조상 제사를 허락하였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서로 얽혀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졌으며, 1801년의 신유 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이 교회사에 큰 박해로 나타나고 있다. 100여 년 동안 줄곧 이어진 박해의 과정에서 1만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복음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행위였다. 그들의 순교는 또한 조선 왕조의 엄격한 사상 통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양심과 인격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순교자들의 죽음은 단순히 신앙적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도 의미를 던져주는 사회적 역사적 행위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