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선각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

          이승훈(베드로)

 

 

인천직할시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로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요,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아들 신규, 택규(宅墾)의 묘가 있다. 산 밑에 넓게 펼쳐진 마을은 새들이 많이 찾아들어 조곡(鳥谷) 마을이라 불렀고, 평창(平昌) 이씨가 대대로 살아오는 곳이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 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한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재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연구·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1973년, 인천시 도시계획으로 이곳에 있는 선영의 묘는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낙화산골로 이장되었고, 이승훈과 그의 아들 신규, 택규 묘만 남게 되었다.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 묘가 개봉되어 유해가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옮겨졌다.

이때 묘에서 「成均進士李公承薰墓」라고 쓴 사발이 출토되었다. 1980년 이승훈의 후손을 찾아 나선 고 오기선 신부에게 반주골 조곡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63세)씨가 이승훈 선조가 참수 전 마음에 뜻을 남긴 최종시「月落在天 水上池盡/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고, 물은 비록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하다.」는 시가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 온다고 증언해 주어, 오늘 이승훈 선각자의 묘를 순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한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이승훈의 묘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묵상해 보는 바른 순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 한국 천주교회 최초 공적 집회(제1도).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 등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 초기 교회사 관련 작품 168점 중 탁 화백이 제1도로 내세운 작품이다(1991년 7월 작).

■ 순교자

◆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이승훈(子 子術, 號는 蔓川 혹은 晩泉) 베드로는 평창 이씨 가문에서 조부 광직(光?), 부친 동욱(東都), 모친 여주(麗州) 이씨(李家煥의 누이) 사이에서 1756년(營造32년) 서울 반석방(盤石坊 : 현 中林洞 근교)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67년(12세)에 모친을 잃고, 1775년(20세)에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하여 택규, 국규(國逵), 신규 3형제를 낳았다.

1767년(25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仕)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고, 1783년(28세) 이벽(李檗)의 청으로 부친인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도착, 북당(北堂) 천주교회 그라몽(Grammont) 신부로 부터 교리교육을 받고, 1784년에 부친의 승낙 하에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아 조선인으로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그해 봄, 천주교 책과 십자가 상, 선물, 상본 등을 갖고 서울에 돌아 왔다. 그는 즉시 이벽에게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내용 등을 말하고 갖고 온 책을 모두 넘겨주었다.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받은 책들을 탐독, 교리연구에 전력하였다.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최창현 등에 세례를 주기 시작하여, 단시일에 많은 신자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영세를 준 그라몽 신부에게 밀사를 통해 그간에 신생 조선교회에 있은 일을 보고했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防) 김범우(도마) 집에서 있은 종교 집회가 형조(刑曹) 금리(禁吏)에 발각되어 서학(천주교)을 금하는 효유문(曉兪文)이 반포되고, 유생(儒生)들의 척사통문(斥邪通文)이 나돌게 되자, 평창 이씨 종가 어른들에게 압력을 받은 부친 이동욱은 이승훈에게 서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심약한 그는 서학을 이단(異端)으로 배척하는 벽이문·시(闢異文·詩)를 지었다.

그러나 1787년, 이승훈은 교회 지도자들이 고해성사, 미사집전 등을 행했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독성죄(瀆聖罪)가 된다는 유항검의 이의를 제기하자 즉시 중단을 시켰다. 그리고 1789년 겨울, 이승훈은 북경교구 밀사로 윤유일을 파견하여, 1790년 봄에 조상제사를 금하고 가성직제도가 부당하다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받고 공동체에 알렸다. 같은 해, 이승훈은 윤유일을 다시 북경으로 밀파, 조선교회의 구원 방법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동시에 신자 집단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면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1791년 6월, 평택 현감이 되었으나, 11월 진산(珍山)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에 소환되어 신문 당하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황사영이 그에게 서학책을 빌려 보고 입교를 했다. 1794년(39세), 부친 이동욱이 죽고, 1795년 주문모(周文模 야교보) 신부가 입국했으나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봄, 회개하여 주신부를 만나려 했으나, 신부 입국 안내 관여자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잡혀 장살(杖殺)되어 교난이 발생되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이 7월, 유생들이 서학의 괴수 이승훈을 처벌하라는 계속된 상소로 예산현(禮山縣)에 유배되어 1796년 4월에 풀려났다. 그래서 주신부와의 만남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801년(44세) 신유교난이 일어난 2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사학의 원흉으로 의금부에 구금되어 6차의 신문을 받고, 이승훈은 정약종,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시신은 자택으로 옳겨진 후 선영산이 있는 이곳 인천 만수동 반주골로 옮겨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부친 이동욱은 자식의 죄로 추삭(追削)이 내려지고, 5월에는 동생 이치훈(李致薰)은 사학의 괴수의 동생이라고 향리(鄕里)로 축출되었다. 그후 1868년,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서학 관련자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되었고, 손자 재겸(在謙)은 옥독(獄毒)으로 순교했으며, 1871년, 증손자 연구(蓮龜), 균구(筠龜), 재겸의 부인 정(鄭)씨가 제물포에서 참수 치명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내 각 계층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