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西學' 전파...한국천주교 주춧돌 마련

한국천주교 聖祖 광암 이벽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성조로 받들어지는 이벽(李檗)은 1754년(영조 30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윗두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국당공파후 지퇴당 정형의 7세손이고 ,자는 덕조(德操)이고,호는 광암(曠庵)이며,세례명은 세자(洗者) 요한이다.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부만(溥萬), 어머니는 청주 한씨(韓氏)였으며,6남매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8척 장신으로 장군의 형상이였다

할아버지는 호남병마절도사 부총관이며 아버지는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 종2품이며 형 이격은 무과에급제하여 16년이나되어 별군직이였고 선생의 아우 이석은 좌포도대장이였고 후에 남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다 

1979년 6월21일 한국 천주교의 노력으로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공동묘지에서 발굴결과 유골의 크기가 1미터 78센티였으니 사후 유골의 축소와 도포를 입고 갓을 쓴다면 2 미터가넘는 거구였을것이다. 
광암은 크고 건장한 신체에 무술도 능했으며,경서에 정통하고,특히 언변이 좋아 기세 좋게 흐르는 물에 비유 되었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그가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바랐지만 완강히 거부하였기에,부친의 미움을 받아 고집스럽다는 뜻의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일찍이 광암은 당시 유교적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를 탐독했는데 그의 현고조부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있다가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책들이었다고 전한다.

당시 한문으로 된 서학서들은 서구의 과학 천문 지리 종교 등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함으로써 광암은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산생시킬 수 있었던 기반으로서 서구 정신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7년에 이미 광암은 소장학자들과 강학에 참여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등에 대해 토론하였고, 옛 성현들의 윤리서를 검토함과 아울러 서양선교사들이 지은 책들도 언급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이미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서학의 교리연구에 전념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779년 권철신 정약전 등 기호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는데 이 때 그가 종교적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들에게 전했고,이로써 훗날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신앙운동이 자생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783년 겨울 광암은 친구인 이승훈이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서학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1784년 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천주실의,기하원본 등 많은 서학서들과 십자고상(十字苦像)과 성화(聖畵) 등 관련 물품을 가지고 오자 광암은 외딴 집을 세내어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묵상에 몰두하였다. 이를통해 그는 서학의 종교성에 대해 더욱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칠성사와 연중기도, 성인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로 연구하였다.

광암은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경 서울 수표교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전파에 나섰다. 그는 교분이 두터운 양반층 학자들과 인척은 물론 중인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서학을 전교했는데 이 때 그에게 세례받은 사람들은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윤하 등 남인학자들과, 중인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등으로 전한다. 이후 광암은 이가환 이기양 등 당시 서학의 유포에 반대하던 유림의 저명인사들과 토론하였으며그의 정치한 논리와 웅변이 이들을 압도했다고 전한다.

1784년 이승훈 (李承薰,1756-1801)은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李檗,1754-1786)의 집 대청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전통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 특별전 개최때 전시된 작품으로
선조들의 신앙과
작가 임수현(제노베파)의 작품



광암은 서학의 의식과 전교활동을 위해 교단조직과 교직자가 필요함을 느끼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교단조직인 이른바 '가성직자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단조직은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천주교의 특성을 나타낸다.

광암은 이 교단조직의 지도자로서 그의 집에서 포교 강학(講學) 독서 사법(師法)등의 천주교 전례의식을 주도하였으며,새로 입교한 남인학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로 자처하였다.

1785년 봄에는 장례원 앞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사대부,중인 수십명이 모인 가운데 설법교회(說法敎誨)를 하는 모임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성균관유생들의 척사운동으로 인해 일단 해산되었다.

    

 

 

 

 

 

 

   이벽 등 초기 천주교 강학모임 모습


광암은 자신의 서학신앙에 대해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하면서까지 극구 반대하는 아버지의 굳은 뜻을 돌이킬 수 없어 심각한 고민과 갈등에 빠져 있다가 전염병에 걸려 1786년(정조 10년) 봄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한편 그가 집안의 극렬한 반대에 저항하여 단식투쟁을 하다 죽었다는 주장도 있고,집안에서 독살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할 정도다.

달레(Dallet, C.H.)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를 배교자로 단정하고 있으나,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삼던 당시 사회상을 고려할 때 단순히 규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 천주교회 창립 선구자로 평가되는 광암은 당시 남인학자들이 서학의 과학기술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이지만 종교만은 이단시하는 분위기에서,서학을 학문적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앙으로 받아들인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그가 많은 조선인 신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천주교회 설립의 주춧돌로 믿어진다.

그의 저작으로 전하는 '성교요지'(聖敎要旨)의 전반부는 신약과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漢詩)로서 기독교 성서에 대한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을 표현하였고,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사회정의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하였다. 이는 그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서학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광암이 지었다고 전하는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는 4.4조의 총 34구의 한글가사이다. 내용은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천주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영혼에의 눈 뜸이 노래되는데 삼강오륜도 중하지만 천주공경이 으뜸이라고 강조했다. 둘째 단락은 영혼불멸과 불사금지(佛祀禁止)와 천당지옥설의 시비를 노래했고,셋째 단락은 천주를 믿으면 무한한 영광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사상과 동양의 유학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하였으며,이는 후일 한국천주교가 유례없는 대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인 기반이 되었다.

한편 훗날 정약종이 '이벽선생 몽회록'이라는 고전소설을 지었는데,그 내용은 이벽과 정학술과의 대화체로 되어 있다. 천지가 혼미해진 가운데 서기가 비치더니 홀연히 옥안선풍의 선비인 이벽이 나타나 정학술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벽은 천상선인(天上仙人)으로 이 세상에 내려와 학술에게 △우주창조의 원리 △낙원추방과 예수의 구원 △유불도의 허망함 △조상제사와 우상숭배 △신유옥사와 진리의 승리 △하느님의 최후심판 등을 이야기해주고 천주밀험기(天主密驗記)를 전하고는 다시 승천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벽이 죽은 뒤 60년만에 다시 현세에 재현한다는 내용으로 이벽의 공덕과 그의 죽음이 작자에 의해 신성화되어 박해를 통한 신앙의 강화를 당부하는 주인공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 소설은 초기 서학의 대표적 인물로 이벽이 중시되었음을 드러내는 중대한 실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