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창립시기는 1784년으로 본다.

동아시아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풍습에 적응하는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한문서학서를 간행하였다.
한문서학서는 서양 과학과 종교 철학서로 중국의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한자 문화권에 있던 주변국에도 전교하려고 만든 책들이었다.
예상한 대로 사대부들의 지적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서양학문에 호기심을 갖게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히 마태오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는 西士와 中士가 교리에 대하여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책이다.

한편 우리 나라는 왜란과 호란이후 피폐해진 나라 형편을 반성하자는 선비들이 형식에만 치우친 虛學을 버리고 實學을 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신진 소장파 선비들은 북경에서 들어오는 서양학문에 관심이 높아졌고 한문서학서가 많이 유입되었다. 이런 책들은 조공사신을 따라 북경에 드나들던 사람들에 의해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필사본까지 많아져 1750년경에는 웬만한 선비의 서가에는 한문서학서가 몇 권씩은 있었고 서학서를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이 서학서를 읽은 학자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서학서의 내용을 배척하는 부류
둘째 과학기술에 관한 것은 받아들이나 종교는 배척하는 부류
셋째 서학서의 내용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승화시켜 종교로 믿은 부류인데

대부분은 첫째와 둘째 부류이고
셋째 부류는 권철신 형제, 정약용형제, 이가환 등의 기호학파 남인계열의 소장학자들이었다. 이들이 교회설립에 기여한 사람들이다.

처음엔 각자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서학서를 읽다가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독학하기가 어려워 가까운 인척간에 서로 토론을 하다가 뜻이 맞는 친구들이 모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내놓고 서양학문을 논할 처지가 아니었던 터라 조심스럽게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을 하게 된 것이다.

주로 천주실의와 칠극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공부하였다. 이 주어사 강학은 1777년부터 1779년까지 이루어졌다고한다.

그러나 서학 내지 천주교 수용이 일부 양반지식층만의 사상적 동향은 아니었다. 천주교 신앙은 수용초기부터 중인, 농부, 또한 부녀자 등 연령에 무관하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791년에는 조상제사문제가 발생하였다. 천주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조상제사를 거부하던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등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다루던 조정에서는 왕의 명령에 의해서 이제 서학도들은 선비의 반열에 끼워주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 이후 양반신분층 출신 신도들은 상당수가 서학사상을 포기하고 유학의 입장으로 회귀해 돌아갔다. 이에 따라 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신분적 특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1791년 이후에는 교회의 지도층이 양반으로부터 중인 이하의 신분층으로 이동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에 계속 관여하고 있던 양반들은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거나 양반의 특권을 이미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도층뿐만 아니라 신도들 구성에서는 그 민중적 특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가 시작될 수렵에 정부 당국자들은 서학도들 가운데는 무지몽매한 서민이나 아녀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후기 사회에서 서학은 주로 성호 좌파계열의 지식인들이 한문서학서의 학습을 통해 수용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서학 수용은 신문화 수용운동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양반 지식층의 사상으로만 머물지 아니하고 곧 만인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들은 '민중종교운동'의 일환으로 천주교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성조 광암 이벽>

강학회 모임에 대한 소식을 나중에 들은 이벽은 눈쌓인 산길을 헤치고 천진암에 가서 그 들과 합류하였다. 이벽은 헌헌장부에 영성이 맑은 사람으로 천주의 존재를 알고부터 내 평생 할일은 聖敎를 믿고 남에게 가르치는 일이라고 드러나게 전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북경에 가는 이승훈으로 하여금 교리에 대한 궁금증을 알아오게하고 세례를 받도록 일러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문중의 반대에 부딪쳐 집안에 유폐되다시피 하였는데 음식을 거절하며 버티다가 전염병에 걸려 선종하였다고한다. 초기 강학회에 참석했던 학자들 중 가문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배교한 사람들도 많았다. 

 

 <교회의 창설>

1783년 동지사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이승훈이 북경에 가는데 이벽이 강학회에서 풀지못한 궁금증을 알아오도록 지시하였다.1784년 북경에 있는 북당을 방문하여 그라몽(Grammont)신부를 만나 의문점을 풀고 2월경 세례를 받고 한문서학서를 요구하여 많이 받아왔다.1784년 9월 강학회 사람들에게 이승훈이 세례를 주어 신앙공동체가 탄생하게 되고 이 때를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하다가 야경돌던 형리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명문가의 자제들임을 알고 양반들은 훈방하고 중인인 김범우만 곤장을 맞고 귀양갔는데 거기서 杖毒으로 선종하여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 이후 천주학을 허용할 수 없다고 국법으로 금하라는 상소문이 빗발쳤으나 소장학자를 아끼는 정조가 모른척 넘기고 남인의 영수 우의정 채재공이 막아주어 엄하게 금령이 내리지는 않았다.

<假성직제도>

이승훈이 북경에서 본대로 신부와 주교를 자기들끼리 지명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실시하였는데 주교는 권일신이 맡았고 이존창, 유항검, 이승훈등 10명이 신부가 되어 전례를 거행하였다.(1786년부터 1790년까지)

1789년 윤유일을 북경에 보내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문의하니 성직은 안되고 세례만 허용하였다. 그래서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북경주교의 선교사 파견약속을 받았다.

한국 교회의 창설에는 상당한 특성이 있다.

1. 양반지식층에 의해 받아들여진 신문화 운동이었다.
2. 자발적인 신앙공동체를 만든 자생교회였다.
3. 평신도를 중심으로 주도된 교회발생이었다.
4. 역사상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민주평등사상을 도입한 최초의 일이다.
5.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 언문교리서를 만들어 한글보급,출판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