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서양 문물의 전래

 근세 서구 문물의 수용

1) 조선후기 과학기술의 발달배경

16세기 초엽에 서양인들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진출하게 되자 조선왕조에도 서양의 존재가 알려지고, 국가에서 부국강병을 위하여 전통적 과학기술+서양의 과학기술 장려함.

2) 서학의 전래
선조말에서 광해군 초에 명나라를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서 서양문물과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관계 서적과 천주교 교리서 등이 들어왔는데, 이를 서학이라고 함. 서학은 처음에는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서양학문의 일부로써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음.

3) 서양문물의 전래
중국에 파견된 사신들이 중국의 북경에 머물던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전래

16세기 초 : 곤여만국전도, 천주실의 등이 들어와서 일부 식자층의 의식확대에 영향을 주었음.

1630년도 :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만국전도, 직방외기, 홍이포제본, 서 양국풍속도등 서적과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가져와서 서양문물 을 접하게 되었음

병자호란 이후 :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는 천구의와 천문서등 각종 서적 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와 있던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 등과 만나 서양문화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돌아옴

마테오 리치(이마두)의 서양 문물 전래

마테오 리치는 서양의 학문을 익혀 중국에 세계 지도와 과학 기술, 자명종, 프리즘 등의 과학 기구 등을 전파하였으며,「천주실의」를 지어 우리 나라의 천주교 전파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마테오 리치는 예수회의 로마대학에서 신학, 철학, 수학, 천문학, 지리학, 음악, 미술 등의 교육을 받았으며, 유클리드 기하학, 실용 산수, 행성론과 시계와 시간에 대해 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마친 마테오 리치는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과학자라 할 수 있다.
1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희망봉을 지나 인도에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인도에서 4년의 시간을 보낸 후 마카오에서 한자를 배우며 중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는 마테오 리치라는 이름을 중국 음에 따라 이마두라고 개명을 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선교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외국인들이 중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는 당시의 상태에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중국 고위직 관료의 마음을 끄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가 ‘자명종’이라고 부르는 시계는 그 당시에는 매우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는 자명종을 중국 황제에게 바치면서 황제의 명에 따라 중국에 머무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종교에 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승려로 위장한 후 자신이 먼저 중국의 예법과 관습 유학을 공부하며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자명종으로 인해 황제 가까이에서 머무를 수 있게 된 마테오 리치는 황제의 명으로 서양의 여러 서적을 중국 관리들과 함께 번역하였다. 중국 최초의 과학적인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였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을 중국어로 번역한 「기하원본」을 서광계의 도움을 받아 저술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에 보낸 사신이「곤여만국전도」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한국에 들어온 세계 최초의 세계 지도였다. 조선은 이 지도를 통해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책 중 「천주실의」는 우리 나라의 천주교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이다. 천주실의는 선교 목적으로 집필된 책으로 서양의 지식인과 중국 유학자가 문답식으로 교리를 공부하는 내용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천주실의」를 들여와 공부함으로써
천주교 성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테오 리치는 천문학에 뛰어난 선교사를 통하여 중국의 천문학 발전에 도움이 되며, 중국에 오래 머물며 선교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 예수회 본부에 뛰어난 천문학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가 죽은 지 20년 후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아담샬이 북경에 오게 된다. 아담샬은 그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만날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아담샬은 소현세자에게 천문 기구와 서구 문물을 전해 주었으며, 소현세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그는 뛰어난 천문학적 지식으로 인해 북경 천문대의 천문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였으나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서양의 과학 문물이 오히려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과학 기술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4) 외국인의 왕래

벨테브레(박연) : 서양식 대포 제조법 전수

수부(水夫)로 홀란디아호에서 일하다가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로 바꿔타고 일본을 향하여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 D.히아베르츠, J.피에테 르츠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 되었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세 사람 모두 출전하여 박 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 ·통솔하 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 ·조작법을 지도하였다. 1653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 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 쳤다.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하멜 : 포도주, 망원경, 은술잔등 서구문물 전파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의 포수(砲手)로 비타비아(Batavia:현 재의 자카르타)에 건너갔다가 서기(書記)로 승진, 1653(효종 4) 상선 스페 르웨르로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는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다.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 고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으며, 1657년 강진(康津)의 전라병영(全羅兵營), 1663(현종 4)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현종 7)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 귀국하였다.

하멜 표류기의 서구문물에 대한 한 구절

819일 그들은 표류물들을 육지로 옮기고 그것들을 햇볕에 말리기 위해 바삐 움직였으며, 쇠붙이가 있는목재를불에 태우느라분주하였다. 상급 선원들은 지휘관 과그곳에 함께 와 있던 제독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망원경을 주었다. 그들은 또한포도주와 바위틈에서 발견한 회사의 은 술잔을 함께 가지고 갔다 그들은 포도주 맛을보더니 맛있었던지 아주 많이 마셨고 대단히 행복해 하며 우리의 상급 선원들을 다시 텐트로 돌려보냈다. 그 이후 그들은 상급 선원들에게 깊은 우호감을 나타냈으며 은술잔도 되돌려주었다

5) 실학자들의 기여

이익과 그의제자들, 북학파

18세기 후반기에 북벌론이 극복되고 북학론이 대두되면서 그 수입이 적극화 되었음. 박제가에 의해 천문.역학은 물론 의약, 건축, 조선, 농업, 무기제조등 각 분야에 걸친 청국 및 서양기술의 도입이 적극 주장됨. 정약용에 의해서 종 두법이 수용됨.

6) 실학의 발생 배경
 

첫째, 통치 질서의 무너짐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땅이 황폐화되어 못쓰게 되고,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나라 일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은 소홀히 하여 많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양반사회와 일반 백성들의 어려움을 바로잡아야겠다는 필요성이 생겼다.


둘째, 유학자들의 백성들의 외면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론과 학설만 따지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였다. 이러한 때에 백성들의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학문을 연구하자고 주장한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셋째, 성리학의 사회적 기능상실


성리학이 초기의 참신한 기운을 잃고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에만 치우치자, 당시 조선 사회를 이룬 성리학이 백성의 현실 생활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았다.


넷째, 서양의 과학기술과 청의 고증학의 영향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명을 받아들여 백성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학문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청나라에서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학풍으로 일어났다.


다섯째, 서학의 영향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학 서적들의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 지식인들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전하였다.


여섯째, 신분 변동


조선 후기 사회는 신분 질서가 급속히 붕괴되어 정권에서 소외된 양반층의 경제적 몰락과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이 나타났다. 이에 실학자들은 몰락한 양반층의 생계 대책과 서민층의 생존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곱째, 실학자들의 생각


실학자들은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7) 천주교의 전래

서양의 가톨릭이 중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과정.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래된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학문적 호기심에서 우리 스스로가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는 18세기부터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서양 문물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 때문에 받아들였다. 특히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 와 있던 많은 서양 선교사들과 청나라에 외교 사절로 갔던 관리들이 접촉함으로써 그 전래는 한층 쉬워졌다. 이렇게 소개된 천주교는 차츰 외국인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고, 지배 계층의 횡포와 거듭되는 재난의 고통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으면서 그들의 정신적 위안이 되어 갔고, 천주교의 인간 평등과 내세 사상은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천주교는 당시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던
이익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벽 등은 신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정조 때 이승훈이 1783년 중국에 건너가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1784년에 돌아와 이벽ㆍ정약전 등과 함께 서울에 처음으로 천주교 교회를 세웠다. 초기의 천주교 교회는 학식을 가진 양반들이나 신분제에 불만을 가진 중인층이 많이 참여하였고, 그 중심지는 서울과 전주 등이었다. 그 후 교세가 점차 농촌 사회와 서민층으로 뻗어 갔다.

그러나 제사를 우상으로 금지하는 등 천주교의 교리는 조선 사회의 성리학적 지배 이념을 부정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여,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을 시작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신부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