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물의 전래와 한역 서학서(西學書)

 
. 머리말

조선후기 사상계에는 정학(正學)으로 불리던 성리학과 실학(實學) 그리고 지배층에 의해 사학(邪學)으로 지탄받던 여러 사상들이 병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들 가운데 서학은 척사위정론의 연장선상에서 사학으로 규탄하며 조선왕조 정부에서도 약 1백 년간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행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한 사상에 대해 강력한 탄압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 사상의 전파는 위축되거나 중지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천주교의 경우에는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교세의 성장이 이루어졌는데 과연 어떠한 요인이 그러한 맥락을 이끌었는지 그 도입과 전래, 박해과정 및 의의 등을 짚어보며 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 서학의 도입과 수용

서학(西學)은 본래 중국을 통해 서양 선교 신부들이 전해줬던 서양의 종교, 윤리와 과학, 기술 등에 대한 연구를 통칭한다. 조선의 서학은 16세기 부경사대사행원(赴京事大使行員)들이 북경에서 중국의 서학과 접촉하여,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 과학 기술 문물이 도입되고, 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의 열독과 관찰로 서양과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면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북경에 들어가 머무르는 동안에 동서남북 네 곳의 천주당과 천문과 역산을 주관하는 기관인 흠천감을 방문하여 서양 성직자들과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모든 시설을 관람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중국 서학과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학문자료가 도입되었다. 한양에서 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연결되는 부경사대사행로(赴京事大使行路)는 대륙과 서양 선진문명 도입의 문화도관(文化導管)이었다. 바로 이 길을 통하여 서학과의 접촉이 약 1세기 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사례들로써는 603(선조36)에 마테오리치(Matteo Ricci)가 만든 서양식 세계지도가 들어왔으며, 그 후 1631(인조9)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정두원(鄭斗源)이 선교사로부터 천리경자명종홍이포(紅夷砲) 등과 함께 세계지도천문도서양소개서 등을 얻어왔다. 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1644년 귀국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중국에서 과학기술활동을 크게 벌였던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과 친분을 맺고 서양문물을 가지고 귀국한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약 1세기 동안에 걸쳐 조선사회에 도입된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은 당시 새로운 학문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던 실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유교적인 천문학지리학과는 세계관을 달리하는 서양의 학문이 실학자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학문적 호기심에서 한역서학서를 열독하였고, 서양 과학기술문물을 관찰하여, 이해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서학은 서양문물의 하나로 간주되었을 뿐 신앙을 위한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마테오리치가 저술한 한역서학서인천주실의(天主實義)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영향을 받았던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이익(李瀷)이다. 이익은 후에 많은 서학자료를 활용하여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확고한 학문정신 위에서 파악하여 조선 서학의 사조라고 불리우게 되는데, 그는천주실의의 발문을 지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싣고 여러 제자에게 서학서(西學書)를 읽도록 권했다. 그는 화이적(華夷的) 명분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서양학문을 높이 평가했지만, 서학과 천주교를 갈라서 서학은 긍정하였으나 천주교는 불교처럼 허망하다고 하여 천주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자료1 참조)

<자료1>

천주실의는 리마두가 편 책이다. (중략) 그 학은 오로지 천주를 가장 높이는 것이다. 천주란 유가의 상제이니 천주를 공경하고, 섬기고, 두려워하며, 믿음은 마치 불씨의 석가와 같다. (중략) 리마두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람으로 먼 바닷길을 건너와 중국 학자나 벼슬아치들과 사귀되 중국 학자와 고관들이 물리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높이 받들어 모시고 선생이라 일컬어 감히 거스르지 않으니 뛰어난 선비다. 그러나 리마두가 축건지교를 물리침에는 열심이나 마침내 불교와 같이 허망함에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더라. -성호사설, () 천주실의

그의 제자였던 신후담(愼後聃)은 서학을 접하고 서학변 西學辨』을 지었다. 이 책은 중국에서 활동 중인 야소회(耶蘇會) 신부들이 지은 천주실의등의 저작을 주자학적 입장에서 비판한 것으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천주교는 불교의 한 종파에 불과하다고 파악하고, 천주를 창조주로 보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만물을 다스리는 상제(上帝)로 이해했다. 이러한 서학연구를 통해 그는 전통적인 주자학에서 접하지 못한 새로운 사상세계를 알게 되었으나, 주자학을 완전히 극복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조선의 지식층이 주자학으로 일색화된 환경 속에서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적 충돌을 회피하면서 서학을 수용하기 위해 가졌던 이해체계라 하겠다.

그러나 이후의 학자들 중에서는 다른 태도가 나타났다. 학풍쇄신의 기준으로 서학의 관점을 적극 수용하기도 하고, 더러는 서학서가 가르치는 종교를 실천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이것이 정조 의 서학운동이며, 150년 전 중국 지식인들의 서학운동이 서적을 통해 조선에서 비슷한 형태로 복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학의 대표 격인 이익의 사상을 기초로 해서 학계에서는 대응을 놓고 논의가 분분했는데, 논의는 크게 세 계열로 나뉘었다. 곧 서구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를 분리하여 전자는 수용하되 후자는 배격하는 흐름, 서구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는 한편 반주자학의 처지에서 천주교의 평등 사상을 주목하는 흐름, 끝으로 천주교도 적극 수용하여 신앙화에 이르는 흐름이었다.

순암 안정복(安鼎福)과 초정 박제가(朴齊家) 등을 비롯한 배격파는 서학을 연구하되, 그것은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바른 학문인 유학을 보위하기 위해서 천주교는 배격하되 서양의 기술학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료2 참조) 특히 안정복은 천주교를 이단 사상인 불교처럼 위험하게 보았다. (자료3 참조)

<자료2>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중국의 흠천감에서 책력을 만드는 서양인들은 모두 기하학에 밝으며, 이용후생의 방법에 능하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관상감에서 소비하는 비용으로써 그들을 초빙하여 대우하고 나라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천문과 도량형, 농상, 의약, 홍수와 가뭄의 대비법, 궁실이나 성곽, 교량의 축성법, 구리나 옥, 유리의 채굴, 제조법, 외적 방어를 위한 화포의 설치법 등을 배우게 한다면 불과 수년 안에 세상에 도움이 되고 (중략) 쓸모 있는 인재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중략) 그들의 종교는 천당과 지옥을 믿음이 불교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 생활에 도움을 주는 재능은 불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열 가지를 취하고 하나를 금한다면 득이 있는 셈입니다. 다만 적절한 대우를 하지 않으면 불러도 와주지 않을 것을 두렵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북학의, 병오소회(丙午所懷)

<자료3>

우리나라에서도 영조 무인년(1785) 신계현(新溪縣)에 영무(英武)라는 요망한 무당이 미륵불이라 일컫자, 여러 고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생불이 나타났다 하여 합장하고 절을 했다. (중략) 서양 선비가 말하는 천주교도 교화시키는 속도가 이보다 더 빠를 수가 있겠는가? (중략) 이처럼 요망한 사람이 동쪽에 한 천주가 강림했다 하고, 서쪽에도 한 천주가 강림했다 한다면 민심은 허망한 것에 익숙하여 사실로 여기고 바람 부는 대로 따라가기 마련이다. -순암집, 천하문답(天下問答)

이에 반해 다산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남인계 학자들은 서학의 ()’적 측면이건 ()’적 측면이건 간에 다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다산은 서교(西敎), 즉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정조의 명을 받고 스스로 멀리하겠다는 자벽서까지 지었지만, 바깥은 유교이고 속은 예수교라는 외유내야(外儒內耶)’의 평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기존의 주자 성리학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평등사상을 꾀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를 주목했다. 따라서 곧 원시 유교의 상제도 천주교의 천주와 마찬가지로 인격신으로서 인간에게 똑같이 영명(靈明)을 부여한다고 하여 인성의 만민 평등을 주장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유복하게 만드는 이용후생을 위해 서학에서 실용적인 기예(技藝)인 과학기술을 탐구 터득하는 것이었다.

한편 북학파는 서학의 수용에 이중 잣대를 들이댔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과학자라고 하는 담헌 홍대용(洪大容)은 서학 속의 천주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일축하나,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에 대해서만은 탄복하면서 수용을 권장하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진실로 국민을 위해 유익한 것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취해야 한다고 실용성을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서구 과학기술의 선진성을 인식하고, 그 도입과 활용을 주장했다. 심지어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배치되는 서구 종교에 대해서도 진지한 탐구를 거쳐,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신앙적 수용에까지 이름으로써, 조선에서 드디어 학문적 대상이었던 서학이 천주교로서 서서히 정착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후반 영조 말엽에 이르러 이벽(李蘗)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勳)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권일신(權日身)권철신(權哲身)등 일부 남인학자들이 천주교를 완전한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어졌고, 특히 이승훈은 1783(정조7)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되어 귀국하기도 했다. 그는 귀국 후 이벽(李蘗) 등과 같이 협력하여 1784(정조8) 천주교회 창설을 해 조선에서 천주교가 종교로 정착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의 천주교 신앙은 선진(先秦) 유교에 제시된 이상적인 유교 국가 건설을 위한 개혁이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으며,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내세사상은 서민층에게도 쉽게 호응을 얻어 차츰차츰 신자가 늘어갔다.

. 천주교 박해과정

천주교는 당시 정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실학자들의 일부가 그 근본에 있어서 유교의 우주관, 사회관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유교의 인륜과 가부장적 가족주의, 신분계급주의를 배격함으로써 조선의 현실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후 더욱 활발해졌는데, 남인 학자와 중인을 중심으로 상민, 부녀자들에게까지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유포되어갔다.

이러한 천주교의 유포에 대하여 정부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천주교의 교사가 확장되자 천주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며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군신, 부자의 의를 경시하여 국왕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도록 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라 단정하고, 인륜을 어기는 것이어서 멸륜지교(滅倫之敎)로 규정하였으며, 천주교도를 패륜지도(悖倫之徒)로 인식하였다. 또 이어 1785(정조9)에는 전통적인 유교윤리를 혼란케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유학자들은 천주가 성리학적 계급 질서에 터전을 한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손상케 할 위험을 내포한 도전적 사고 체계로 의식했던 것이다. (자료4 참조)

<자료4>

선왕(先王)이 항상 정학(正學)이 밝으면 사학(邪學)이 스스로 꺼지리라 하였으나, 지금 듣건대 사학이 옛과 같아 서울과 기호 지방에서 날로 치성하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인륜이 있음으로서이고, 나라가 나라인 까닭은 교화가 있음으로서이다. 오늘날의 사학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어 인륜을 그르치고 가르침을 여겨 스스로 오랑캐나 짐승의 자리에 빠진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에 물들고 속아 그르쳐짐이 마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듯 하니 이 어찌 불쌍하고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감사, 수령은 자세하게 이들을 가르치고 타일러 사학하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도록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조치하여 모든 사람이 평안하게 살도록 힘쓴 선왕의 공을 빛내게 하라. 이처럼 엄금한 뒤에도 개전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모반죄로 다스리라. 수령은 맡은 지역에 오가작통법을 엄히 하여 그 통 안에 만일 사학하는 무리가 있거든 곧 통주(統主)로 하여금 관에 신고하여 다스리게 하고 베어 죽여 남은 종자가 없도록 하라.

-순조실록3, 순조 원년 정월 대왕대비 하교(下敎)

그럼에도 정조 연간 정부는 교화를 강조하여 천주교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고자 하였다. 1784(정조8)부터 시작된 천주교회에 대한 배척이 구체화된 것은 다음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때부터의 일이었다. 이 사건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의 종교집회가 당국에 의해 적발됨으로써 비밀의 한국교회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당국의 설득과 배교 강요의 권명으로 이승훈(李承薰), 이벽(李蘗) 등 초기교회 지도자들이 교회활동을 멀리하게 되었다. 정부당국은 북경으로부터의 한역서학서의 도입을 금지했고 정부소유의 천주교서를 불태워 버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정조 15(1791)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 신자 윤지충(尹持忠)이 모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 의식을 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윤지충을 처형하고, 더 나아가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역서양서적을 소각하는 등 천주교의 전파를 억제하는 데 적극성을 띠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 혹은 신해박해(辛亥迫害)라 한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아직 천주교를 불교나 도교와 같은 황당한 류의 학문이라 여기고, 유교정치에 힘쓰면 자연히 소멸될 것으로 생각하여 극단적인 탄압은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단 유포된 천주교는 교세를 더욱 확산하여 1794(정조18)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입국하여 활동함에 따라 4,000명이었던 신도수가 수년 후에는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영조의 계비)를 비롯한 벽파(辟派)가 시파(時派)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해진산사건으로 조선정부는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구실을 조상제사의 거부라는 데서 명목을 찾았기에 박해의 구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에 순조 원년(1801) 벽파와 정순왕후의 정치적 보복의 복선이 깔려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는 정순왕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에 의해 정략적으로 추진되어 각지에서 많은 교도들이 희생되었다. 이 때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정약종(丁若鍾), 주문모(周文謨) 300여명의 신도가 처형되고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당하였다.

이 천주교 박해는 내부적으로는 정조대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가 남인, 소론 및 노론 시파에 대한 정치적 공세의 일환으로 일으킨 것이었고, 또 한편에서는 홍경래의 난 등 각종 민란으로 표현되는 이 시기의 농민항쟁에 대처하여 공포정치를 감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천주교를 앞세운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한 경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 천주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한편,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천주교회가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된 점도 신유박해와 관계되는 천주교회 발전의 모습이었다.

한편 이때 신도 황사영(黃嗣永) 등이 이에 반발하여 소위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난다. 이들은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몸을 숨겼다. 그러던 중 박해를 피해 배론에 찾아온 황심(黃心)과 함께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법을 상의한 끝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편지로 적어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옥천희(玉千禧)와 황심(黃心)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섞여 중국 황제의 권위와 프랑스의 무역 등 외세에 힘입어 조선 정부의 천주교 인정을 강제해줄 것을 요청한 편지를 가지고 가려 했다. 그러나 920일과 26일에 이들이 체포되고 황사영 역시도 929일 체포되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cm, 넓이 38cm의 흰 비단에 13,311자를 먹으로 썼다고 한다. (자료5 참조)

<자료5>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배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중략)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로,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교종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이요,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요, 한 방의 탄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절대로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의 조약만 맺고는 북치며 춤추며 돌아갈 것이오. 그러나 만약 천주님의 사자를 받들이지 아니하면 마땅히 주님의 벌을 받들어 행하고 죽어도 발꿈치를 돌리지 않을 것이오하십시오. (중략) 서양은 곧 성교(聖敎)의 근본되는 땅으로서 2,000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해져서 귀화하지 아니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홀로 이 탄알만 한 나라만이 다만 명에 순종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강경하게 버티어 성교를 잔혹하게 해치고 성직자를 마구 학살하였습니다. 이러한 짓은 동양에서 200년 이래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이들의 이러한 외세 의존적 반국가적 행위는 조선정부를 더욱 자극시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보다 가혹해지게 하였다. 천주교도는 무조건 모역의 무리로, 통외(通外)의 무리로 단죄되는 등, 박해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하여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어 주문모와 그 밖의 지도적 교인들이 모두 희생됨으로써 조선교회는 빈사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강력한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각지에 교우촌(敎友村)이 생겨나는 등 교세는 점차 늘어났다. 이에 순조 15년에 경상도 지방에서 을해교란(乙亥敎難), 순조 27년에 전라도 지방에서 정해교란(丁亥敎難)의 박해소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도 천주교세의 거선 불길을 잡을 수는 없었다. 순조 31년 조선교구(朝鮮敎區)가 설정된 후 서양 성직자들의 계속적 잠입과 비밀스런 전교활동으로 조직적인 교외활동이 다시금 활발해졌다. 그러자 이에 헌종 5(1839)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 쟁탈의 정권다툼을 배경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 대대적으로 자행된 기해박해(己亥迫害)로 말미암아 교회는 주교 및 신부 등이 순교하는 대타격을 받게 되었는데, 3월부터 시작된 박해는 10월 척사윤음의 반포로 더욱 거세졌고 많은 희생자를 낳게 하였다.

이밖에도 최초의 조선인 신부로서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김대건(金大建)이 헌종 11년에 귀국하게 되는데 이런 그의 행적은 천주교가 정치적인 위협을 주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실례로 인식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자들은 김대건과 그 연루자들을 처형하는 병오박해(丙午迫害)를 일으켰다. 병오박해가 벌어진 헌종대 뒤를 이은 철종대 15년간은소규모의 박해가 여러 곳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피폐한 농촌사회의 현실에서의 정신적 이탈을 꾀하는 사회추세에 힘입어 거의 전국적으로 교세는 더욱 뻗어나갔다.

이렇게 수많은 박해에도 점점 커져만 가는 교회에 최대의 박해가 가해졌는데 곧 고종 3년부터 6년간에 걸쳐 전개된 병인박해였다. 병인박해는 서구 식민 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자극받아 강경한 위정척사의 쇄국정책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으로 천주교회와 접근을 꾀하던 흥선대원군이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표변에서 벌어지게 된 박해였다. 장기간에 걸쳐 전국으로 확대된 박해로 이어지게 되는 데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남연군 파묘사건,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으로 천주교도는 외적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단정되면서였다.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당시 전체 교인의 3분의 1인 약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천주교는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가치 체계, 정치 제도, 사회 조직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1세기 동안에 걸쳐 사옥을 겪어야 했다. 이 금압으로 1만 명 안팎의 피해자가 발생되었다. 이들은 1876(고종13) 개항과 더불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며 여러 서양 국가들과의 조약 체결로 서양인의 내지여행과 교회활동이 조약상으로 약정됨으로써 국가권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박해는 종식되고 점차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를 맞게 된다. 이리하여 드디어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넘어서서 포교의 무방비 시대를 맞게 되면서 이제 역으로 유학과 전통이 배격되고 공격받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 서학과 천주교가 조선후기에 미친 영향

서학은 실학과는 다른 뿌리에서 나타난 조선 후기의 선진적 학문 활동이라기보다 오히려 실학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외래문명에 대한 적극적 자세에서의 학문 활동이었다는 데 그 특색이 있었다. 서학에 힘쓴 학자들은 모두가 유교적 교양을 철저히 익힌 지식인으로서, 그들의 서학인식도 유교적 교양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신앙의 인식·소화조차도 보유론적 인식이며 수용이었던 점이 조선 서학의 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서학의 흐름은 결과적으로 서학의 전면 배격(안정복·신후담의 흐름), 서학의 전면 수용(이벽·이승훈·정약용의 흐름), 서학의 일면 수용, 일면 배격의 이원적 파악(홍대용·박지원 등 북학파의 흐름)으로 크게 대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초야의 실학자이거나 미직의 관료학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학문내용을 조선 후기 사회에 정착시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대성의 맹아가 서학의 흐름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데서는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서학과의 접촉과 연구를 통하여 전통적인 화이론적(華夷論的)인 세계관에 동요가 일어났으며 근대적 세계관에로의 개안이 진행되었다. 17세기에 도입된 한역 세계지도와 지리서를 통하여 중국 이외의 광대한 세계를 의식하게 되었고, 세계 각국에 대한 인문 지리적 지식이 새로워지는 한편, 한역천문서를 통하여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과는 다른 지구설·지동설이 수용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만이 정계(正界)가 아니라 세계 각국이 모두 정계일 수 있다는 균시정계(均是正界)의 사상이 받아들여, 전통적인 중화적 세계관의 기반을 이루던 화이지분(華夷之分내외지분(內外之分)과 춘추대의(春秋大義)의 명분론이 극복되면서 만방균시(萬邦均是)에 터전한 새로운 세계관이 수용되었다. 이러한 문화의식의 확대와 자주의식의 깨우침을 얻는 가운데 근대성의 사상적 맹아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선진된 서양 과학기술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어 합리적 실용과학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되었다. 북학파의 실학적 의식을 가진 선각자들은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활용을 적극 주장할 정도로 서양 과학기술의 유용성과 합리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의 수용을 위하여 서양인의 초빙까지도 주장하였다.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학문적 이해와 합리적 실용의 개방자세와 더불어 음양·오행을 골자로 한 성리학적 자연철학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도 근대성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서양 자연과학의 경험적 관찰 및 합리적 논리에 접하면서 유가의 음양·오행설에 의혹을 품게 되고, 자연 구조 원리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서양 과학의 주장을 받아들여 경험주의적 자연철학에 접근하게 된다.

한편 기술을 곧 인간의 본래적 특성으로 보고 삼강오륜의 도덕률과 더불어 사람과 짐승의 구별기준이 된다고 느꼈다는 점에서, 성명의리(性命義理)와 도학적(道學的샤머니즘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전통적 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신이 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천주교신앙의 이해와 봉행을 통해 새로운 인간정신을 추구하게 된 점에 근대성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서학연구에서, 특히 서양의 종교·윤리체계에 끌리게 된 선각자들은 고유(古儒)의 상제사상(上帝思想)을 원용하여 정주학의 이신론적(理神論的) 인간당위론(人間當爲論)을 떠나 상제를 인격적 신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 현세의 부조리를 제도개폐나 산업진흥, 관기숙정에서 구하기보다 인간평등과 내세구원의 새로운 종교·윤리체계의 수용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이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여 마침내 교회를 창설하고 조직적인 천주교신앙의 실천봉행을 추진하였다. 비록 신적질서(神的秩序)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 영생·구복적인 신앙운동이었으나 동시에 전통적 신분제·직업관·사회규제의 불평등을 극복할 원리의 수용이기도 하였다.

, 종교적 차원의 표현 형태를 띠고 있으나 전통적 사회의 봉건적·윤리적·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가치체계의 수용이고 인간상의 추구이며, 나아가 근대 서양과의 연계를 가능하게 할 통로의 개설이라는 점에서 근대성으로의 접근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나아가서 서학과 천주교는 민족종교인 동학의 창립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서학이 서양의 힘의 근원적 원천이며 서양의 무력도 궁극적으로는 이에 기초하여 유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제우는 서양의 서학의 힘이 서양의 무력을 매개수단으로 하여 중국을 멸망시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서학의 힘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을 멸망시키게 되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하여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최제우는 서학이 천시(天時)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서학의 창도자보다 뒤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하면서, 서학의 침입에 대한 대결의식에 지배되어 보국안민의 계책의 하나로서 동학을 창도한 것이었다.

이처럼 서학과 천주교는 조선후기 사회에 이기철학(理氣哲學)에 입각한 인간관, 신분원리, 사회원리에 점차적으로 침윤과 부식을 촉구하게 되는 가능성을 가진 변성요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유교적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구하는 역사적 변인으로 조선 봉건사회에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 알아보았다. 서학은 본래 서양의 학문으로서 조선에 전래되었으나 후에는 학문과 종교로 나뉘고, 종교적인 부분은 천주교로서 심화되어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 깊이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 신앙은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지도이념에는 배치되었고, 조선 왕조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지배층에서는 이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탄압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학이 계속하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만인들이 던지는 의문에 그 나름대로 응답하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기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앙이 조선후기 사회를 재편하고 그 발전을 위해 발휘하던 기능은 순기능적 측면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후기 서학도들이 가지고 있던 체제 부정의 논리는 조선왕조에 대한 직접적 거부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 경우에는 흔히 외세와 결탁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후기의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실천은 새로운 문화를 섭취하려는 진취적 자세의 한 면모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만인들의 꿈이 내재되어있던 역사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