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투쟁이 조선왕조 역사에 끼친 영향

훈구파와 사림파,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

  

이렇게 수백년간 이어진 조선왕조의 당쟁사에서 사도세자 문제를 두고 나뉜 시파와 벽파의 투쟁은, 다른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로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파(時派)란 조선 후기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붕당 대립에서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그 아들인 정조의 정책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 벽파(僻派)와 대칭되어 쓰였다.

  

정조의 정책에 반대했던 벽파에는 대체로 노론의 다수가 참여했고, 반면 정조 지지 입장을 가진 시파에는 노론의 일부 및 소론과 남인세력 등이 참여했다.

 

 원래 벽파는 정조대의 정국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시파가 큰 탄압을 받았다.

  

이에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 정조의 측근이었던 윤행임 등이 처형되었고, 이어진 신유옥사에 의해서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등이 모두 처형당했다.

 

 또한 채제공도 당파를 모았다는 죄목으로 관작을 추탈당하면서, 친 정조세력이었던 시파는 조선왕조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하는 듯 했다.

  

벽파의 시파 공격이 절정에 이르면서 정조를 지지한 시파의 대표적 인물 김조순 역시 제거될 위험에 처했으나 간신히 축출만은 모면하면서 살아남았고, 이어 1802년(순조 2) 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 박씨의 후원과 정순왕후의 결단에 힘입어 정조의 생전 결정대로 김조순이 자기 딸을 왕비로 책립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국구(國舅)의 위치에 올라 기사회생의 기반을 확보하였다.

 
당시 집권한 벽파의 거의 모든 의견이 절대로 이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가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인 것은, 이미 정조가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결정했던 점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며, 또한 이미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만 남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잠시 삼간택이 연기된 것일 뿐인데도 이제와서 김조순의 딸을 내친다면, 다른 혼처를 찾지 못하고 평생 홀로 외로이 독수공방해야 할 것임을 15살의 어린 나이에 66살이었던 영조와 결혼해야 했던 정순왕후 자신의 과거 모습처럼 불쌍히 여긴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정순왕후는 김조순의 딸을 손자 며느리로 결정한 뒤 "'오르고 내리시는 혼령이 좌우에 계신 것 같고 (정조대왕이) 기뻐하시는 표정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 같다. 비록 경사스럽고 다행한 가운데에서도 경신년의 재간택 때 선조(先朝 : 정조)의 기뻐하시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내 감회를 스스로 진정시킬 수가 없다' 고 하시며 오열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다"(순조 2년 9월 6일) 고 실록이 기록할 정도였다.

 
이어 1804년 마침내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곧 승하하자, 벽파의 억압에 한을 품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복수심에 불타던 김조순 등 시파세력이 어마어마한 벽파 사냥을 개시하여, 시파 탄압의 선봉이었던 이안묵을 유배시키는 것을 필두로,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반대했던 권유, 김노충 등 벽파쪽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형, 유배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조순은 김관주를 유배시키고, 이미 죽은 사람인 심환지의 관직을 추탈시키며, 같은 안동 김씨면서도 벽파였던 김달순을 처형하는 등, 읍참마속의 결단과 노력으로 결국 대다수의 벽파를 중앙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807년 이경신의 옥사를 계기로 해서, 정조를 반대했던 벽파는 조선정계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시골, 고향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했고, 마침내 친 정조세력인 시파가 조선왕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거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오랜 당쟁이 사림파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정조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로 나뉜 시파와 벽파의 오랜 분쟁도, 벽파의 억압과 탄압 속에서 끝까지 정조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독기어린 한을 품고 핏발선 눈으로 복수심을 키워왔던 시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리고 순조에 이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가 예전 익종의 장인이었던 풍양 조씨 조만영의 외손자였던 관계로 15년동안 잠시 풍양 조씨 외척이 정권을 잡았던 기간을 제외하면,

실로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시파 유일의 독재체제

 
즉 친 정조세력인 김조순,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명순, 김희순, 김조근, 김좌근, 김홍근, 김수근, 김병기, 김병국, 김병학의 안동 김씨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물론, 6조 판서와 참판, 좌찬성, 훈련대장, 대제학, 대사헌, 함경감사, 홍문관제학, 한성부판윤 등을 모조리 차지하고, "감히 정조대왕께 반대하던 벽파놈들이 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모두 자기 파벌의 사람들로 채움으로써, 거대한 시파 세력의 독기어린 한풀이식 세도정치가 발호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순조와 혼인한 김조순의 딸(순원왕후)도 "그동안 고생하셨던" 친정 부모님과 시파세력을 위해 남편인 순조 승하 후부터 수렴청정을 시작해 이후 아들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할 때까지 수십년간 계속해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철종 2)에는 역시 같은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철종비로 맞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자기 친정인 시파세력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가 그야말로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정조대왕께 반대하던 노론 벽파놈들 모조리 싹 쓸어버리니 속 시원하다. 이제 당쟁 없는 평화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젠 고개들고 큰소리치면서 좀 살아보자", "이젠 우리도 쌓였던 한을 풀어보자", "우리 친정 부모님과 오빠들이 그동안 고생했는데 보답을 해야 한다" 는 시파 세력의 이 한풀이 세도정치는, 고종 즉위 후 외척인 민씨 가문의 등장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