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붕당 정치는 원칙적으로 상대 세력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정치였다.
붕당 정치는 사림 세력이 집권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왕이 이끌었으나,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림들은 붕당을
만들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그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추구하였고, 서원과 향약의 보급을 통해 향촌 사회에서 세력을
키워서 붕당 정치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붕당이 만들어진 것은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부터이다.
처음에는
대체로 동인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졌고. 임진왜란 후에는 주전론을 내세웠던 북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였고, 그 후로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모습으로 붕당 정치가
이루어졌다.
서인 정권은 남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여, 비판 세력이 존재할 수 있는 붕당 정치를 추구하였다. 서인이
이러한 정책을 편 것은, 당시 사회가 모순점을 크게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배층의 결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인들은 국방력을 튼튼히 한다는 명분으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의 군영을 새로 설치하고 그 통솔권을 장악하였는데, 이것들을
기반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17세기 중엽까지는 정치 세력이 붕당을 중심으로 뭉쳤고, 상대방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정국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2.붕당 정치의 변질은 17세기
후반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근본 원인이 있었다.
> 양반 지배 세력의 결속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붕당
정치는 붕당 사이에 대립이 심해지면서 변질되어 갔다. 그동안 서인이 정국을 이끌었지만, 남인도 꾸준히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주장했던 북벌 운동이 무모하다고 비판하였으며, 예송 논쟁(성리학적 예법에 대해 벌였던 논쟁)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다투었다. 예송 논쟁에서 처음에는 서인, 뒤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남인이 집권하였다. 이 때까지는 붕당 정치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졌다.
> 그러나 경신환국 (왕권에 의해 특정 붕당이 정권을 잡게 되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에 의해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면서 붕당 사이에 대립하는 모습은 크게 달라져 갔다. 이 때 정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을 철저하게 탄압하여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로부터 붕당 정치의 기본 원칙은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화로 변질되어
갔다.
> 상대편 붕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 (賜死: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는 것)가 빈번하게 행해지고, 외척이
정치에 많이 참여하였으며, 정치적 다툼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에 까지 맞추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가는 가운데 일부
벌열 가문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한 경력이 많은 가문)이 정권을 독차지 하였고, 지배층 사이에서는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였다.
붕당 정치가 변질된 것은 겉으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를 인정하던 공존 관계가 깨진 것 때문에
비롯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17세기 후반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원인이 있었다.
> 17세기 후반에는 농업이 발달하여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고, 장시의 발달과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됨에 따라 상품 화폐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지금까지 지배
세력을 뒷받침해 왔던 지주제와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 그리고 향촌의 농민들은 두레나 촌계를 중심으로 자체적 단결을
강화해 나갔기 때문에 사림의 향촌 지배가 약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림 세력은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권력을 독점하려고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탕평론의 대두 탕평이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극단적인 정치적 다툼과
일당 전제화가 나타나면서 왕권 자체가 불안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탕평론을 내놓게 되었다.
탕평론의 본질은 정치적
균형 관계를 다시 이루는 것이었다.
> 정치적 균형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 붕당이 자율적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거나
, 왕권에 의해 타율적으로 조정되어야만 했다. 17세기 초에 서인과 남인이 공존 관계를 이룬 것은 자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오히려 타율적인 것이 요구되었으므로 탕평론은 왕에 의해 주도되었다.
> 탕평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숙종에
의해서였다. 이 시기에는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노론이 보수적이라면 소론은 진보적이었다. 붕당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하자 숙종은 탕평론을 제시하며, 왕과 신하가 한 마음으로 어진 것을 받들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인사 관리를 공정하게 한다면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 자신이 인사 정책에서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시에 몰아내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맡기는 등 한쪽으로 치우치는 조치를 취했다. 경신환국(서인 집권), 기사환국(남인 집권), 갑술환국(노론 집권)
등의 조치가 계속된 것은 숙종의 탕평론이 지닌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3.> 영조의 탕평책
영조도 즉위하자마자 탕평책을 시도하였으나, 스스로가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붕당의 세력이 커진 상황 속에서 약해진 왕권을 가지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에는 역시 한계가 있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군사 제도와 경제를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인 탕평파를 길러내 그들에게 정국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이래서 치열하던 정치 싸움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정국이 안정된 가운데 균역법이 실시되어 군역의 폐단이 어느 정도
바로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가 부활되었으며, 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론이 편찬되는 등 문물을 다시 정비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이 후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노론이 정국을 이끌었다. 사도 제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다.
> 정조의 탕평책
노론은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나누어졌다.
정조는 즉위하기 전부터 벽파의 압력으로 그 지위가 불안하였으나, 왕이 된 후에는 벽파를 물리치고 시파를 관직에 골고루 기용하는
탕평책을 써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정조는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 만들었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들의 글과 책을 모으고,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학자들을 길러내 붕당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규장각 출신인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조는 문물의 정비에도 힘써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정조는 문물을 정비하면서 절대 왕권을
과시했지만, 붕당 사이의 화해나 붕당 자체를 해체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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