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의 지배이념

성리학은 송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성립된 유학사상체계이다. 5대 10국을 거치며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 사대부들은 이전의 유학에 결여되었던 우주론·존재론·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공자·맹자 이래 유학을 재해석하였다. 북송 이래의 새로운 유학사상의 조류는 남송대 주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은 대표적인 학자와 경향에 따라 또는 시대사상의 명칭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 성리학이란 용어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이(理)로 보는 학문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리학은 이가 핵심개념이 되므로 이학(理學)이라고도 한다. 또 이전의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유학이란 의미에서 신 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하며, 송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송학(宋學)이라고도 한다. 또 주자(朱熹, 1130 - 1200)가 집대성하였다고 하여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하고, 정이(程 , 1033 - 1107)와 주자를 같이 불러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의 수용 시기에 대한 의견은 다양한 편이다. 그 원인은 성리학을 곧 주자학과 동일하게 보는 관점과 그것이 아닌 중국 북송대 성리학의 발흥단계의 것을 성리학 자체의 수용으로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에 있다. 성리학이 한 국가의 사상으로써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이후 일이기는 하나 그 수용 시기와 수용주체에 대해 알아보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성리학의 수용주체는 새 로운 정치세력인 고려후기 '사대부'이며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이들이 추진한 개혁과 새 왕조건립에 따른 이념적 기반 및 고려 불교에 대한 사상적 극복이다. 이들 사대부들은 권문세가에 의한 고려사회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의 복속국 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3 세기말부터 14세기 전반에 고려에 수용된 성리학은 14세기 후반 에 이르러 사회개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극대화된 사회 모순과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향에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이러한 이념을 제공한 사상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조선왕조가 시작 되면서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유교정치를 추구하였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시대사상으로써 또한 정치적 이념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중심으로 기술하겠다.

성리학의 한국적 변용 내지 발달은 조선조 성립 이후의 일이다. 조선조에서의 성리학의 역사적 응용과 이론 탐구야말로 한국 성리학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의 개창과 더불어 당시 역성혁명의 주체는 그 개창의 합리화의 근거를 대내적으로는 왕 씨 정통의 문란과 대외적으로는 배원친명의 외교정책에서 찾으려 하였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것들이 바로 성리학에 깃든 춘 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리학적 사고의 역사적 응용은 조선 개창의 합리화를 위한 근거 탐색에서부터 본 격화된 셈이다

1.유교정치 기반의 확립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유교정치를 추구하였다. 유교정치는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을 근본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였다. 유교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국왕과 신하가 유교적인 소양을 충분히 갖추어야 했으며 국가 의 제도와 의례도 유교적으로 정비되어야 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왕으로부터 일반 민에 이르기까지 유교의 윤리가 일반화되 어야 했다. 조선의 유교정치는 세종대에 이르러 그 기반이 조성되었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해 많은 학자들을 양성하여 성리학 을 학습하게 하였고, 고제(古制) 연구를 통한 유교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유교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유학자군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적인 의례와 제도가 정비되어갔다. 그러나 세종대의 유교정치와 성리학풍은 세조의 왕위찬탈로 단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하여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유학자들을 축출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 은 성리학적인 명분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조나 그의 즉위에 참여한 학자들은 성리학적 명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종대에 양성된 유학자들 사이의 사상적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비유교적이며 비성리학적인 경향을 띄는 방향에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 세조대에 도모되었다.

15세기 말 성종대에는 세종대 이래의 유교적인 의례제도 정비가 마무리되었다. 유교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법적인 체계가 『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완성되고, 국가차원에서 시행해야 할 유교적인 의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정비되었다. 이 처럼 조선왕조의 기틀이 마련되어가는 과정에서 유교는 서서히 정치이념으로써 발전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지방에서 성 장한 성리학자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과정에서 누적되어온 모순과 사회의 각 부분에 뿌리내 린 불교·도교·민간신앙의 요소들을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의하여 비판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학파를 모태로 하여 형성된 사림파 로서, 관학파를 모태로 한 훈구파를 비판 공격하였다.


2. 관학파의 학풍

고려말의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학으로 계승되었다. 국가에서는 향교, 사학(私學)등의 초등교육기관과 성균관을 설치 하였는데, 이들 교육기관에서의 주요과목은 사서삼경 등 성리학의 경서였다. 또한 과거에서도 사서삼경 등 성리학의 경서가 중심 과목이었다. 국가의 이같은 성리학 진흥책 속에서 고려말의 성리학은 조선에서 관학으로 계승되었다. 관학파는 주로 정계의 관료 로 진출함에 따라 정치적인 변화에 따른 영향도 크게 받았다. 세종대의 학술 진흥과 집현전 설치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는 듯했 으나 단종대와 세조대의 정변은 관학파 내의 분열을 야기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 는 대의 명분에 충실하려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노정되었던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부 류들은 사육신과 같이 죽음으로 대의 명분을 지키기도 하고 생육신과 같이 세상에 뜻을 버리고 지조를 지키려하기도 하였다. 한 편 세조 집권에 참여한 관학파들은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되었다. 이들은 세조의 전제권력과 강력한 중앙집권화정책을 배경으로 무 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훈구파로 지칭되면서 새로이 대두하는 사림파로부터 그 비리를 공 격받게 되었다.

사학파 학자들은 세조의 집권에 반대하고 다시 향촌사회로 돌아갔다. 그들은 세조의 전제정치와 세조에 협력한 관료들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훈구파에 의해 자행되는 중앙정계의 파행성과 향촌사회에서의 수탈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들은 성리 학적인 향촌질서를 통하여 향촌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성종대에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등이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훈 구파의 비리에 대해 공격을 하였다.

3.사림파의 대두와 성리학 발달

사림파는 15세기의 사학파에 연원을 두고 형성되었다.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여 은거한 길재에서 비롯되는 사학파의 전통은 김 숙자를 거쳐 김종직으로 계승되었다. 사학파(私學波)의 학풍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중심으로 성리학 이념의 실천 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또한 15세기부터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시행, 사창(社倉)의 보급 등을 통하여 성리학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하여 가고 있었다. 이러한 성리학풍이 성종 연간에 와서 개혁이념으로 주목되면서 지식층에 공감되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연간에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누적된 사회모순과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5세기 말부터는 과전법체제가 붕괴된 후 토지에 대한 수조권적인 지배가 무너지고 소유권에 의한 토지집적이 이루어졌 다. 그리하여 소유권을 매개로 토지집적이 가속화되면서 지주전호제가 본격화되었다. 향촌사회의 구성원인 지주와 전호 사이의 관계를 신분제적인 질서 아래 규정하고 구성원간의 도덕적 화합을 강조하는 성리학적인 사회윤리는 사족지주들의 이해에 부합되 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림파에 의하여 주목된 성리학은 중앙정치의 파행성과 향촌사회의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 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국왕이나 지배관료층의 도덕성과 성리학적인 향촌질서가 주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 여 사림파들은 중앙정치에서는 『대학(大學)』에서 제시된 도덕정치를 구현하고, 향촌사회에서는 『소학(小學)』에서 제시된 향 약적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사회모순을 극복하려 하였다. 16세기에 발달한 성리학은 이러한 사회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강화한 것 으로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이 학문적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16세기 중반에는 성리학의 정밀한 이론들이 제기 되었다. 이언적 (李彦迪, 1491∼1552)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선종 불교적 요소를 비판하였으며,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기를 중시하 여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70)이 등장하면서 성리이론의 수준은 급속히 진전되어갔다. 이황은 조선 의 성리학을 주자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중종 말년 『주자대전(朱子大全)』으로 주자학에 몰입하여 『주자서절요(朱 子書節要)』를 만들었고 『이학통록(理學通綠)』을 만들며 송원 이래의 성리학을 정리하였다. 그는 주자학 이론에 대한 해석의 탁월성으로 사림계를 대표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이와 기가 모두 운동성을 갖는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주장하여 주리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정립하였다.

16세기 중반에 이황에 의하여 성리학의 수준이 급속히 진전하였지만 다른 사림학 자들도 나름대로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기대승(奇大升, 1527∼72)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여 이른바 사단칠정논쟁(四端七 情論爭)을 벌였다. 9년간에 걸친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논쟁은 성리학의 연구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성리 학은 연구와 논쟁을 거치면서 여러학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한편 이이는 이황의 성리설을 발전시켜 이기일원론에 의한 이통기 국론(理通氣局論)을 정립하였다. 이황의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이 현실의 비리를 극복하려는 재야사림의 처지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이이의 이기이원론은 정권을 담당하여 현실을 주도해가는 사림의 입장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이황은 현실비판에 치중했으나 이 이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제기하였다. 이이의 이통기국론은 이러한 사회개혁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 미를 갖는 것이다.

Ⅲ. 結 論


16세기 중반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여러 성리학파가 형성되었다. 16세기 초반 기 묘사림에 의한 성리학자의 증가, 지역적 확산 등으로 이러한 토대가 마련된 후, 16세기 중반 서원등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연구 를 거치면서 성리학파는 서서히 여러 학파로 나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중반까지는 성리학 자체의 연구보다는 훈구세력의 척결 과 성리학적 질서의 보급이 주된 과제였기 때문에 성리학은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의미는 지니지만 성리설에 의한 학파로서는 형성되지 못했다. 또한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에 의한 성리학 이념의 실천이 추구되어 성리학설 자체에 대한 견해 차이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중종 말년 『주자대전』이 간행 보급되고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성리학(性理學 )에 대한 이해와 차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지역적인 특색, 사족들의 지위 등과 밀접한 관련 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16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여러개의 성리학파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 또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소장학자들은 허(虛)의 학문이된 성리학적 유학에 대하여 실(實)의 유학을 찾게 된다. 즉 실학운동이 벌어진다. `실(實)'의 학이란 실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실리(實利), 실정(實定), 실증(實證)의 학문을 뜻한다. 성호 이익 좌파계의 서학자들은 성리학과 훈고학, 즉 후대의 유학을 불신하고서 근본 유학의 입장에서 다시 유학을 인식하고자 했고 공맹사상의 원천적 체득으로 돌아가 진정한 유학의 실재을 찾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상제(上帝) 즉, 천(天)의 문제에 부딪치고 만다. 즉, 뭇 생명을 낳고 오직 혼자만이 위대함을 이루는` 천(天)'이 무엇인가? 그리고 섬겨져야하고, 받들여져야하고, 제사들여져야하는 `천(天)'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그 본질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이를 연구하는 가운데 위격을 지닌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로서의 천(天) 즉, 유신론적 신관을 깨우치게 된다. 이러한 천관(天觀)의 도달에 있어 그들이 학문적으로 탐구해오던 '천주실의', '칠극', ' 성체유요' 등의 한역 천주교서 내에서 `천주'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천주 신앙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고 종교적 실천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의 천주 신앙 이해가 이처럼 유학에 터전한 천주의 수용이었기에 보유론적 천주 신앙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