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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현경련 베네딕타    

 

 

 

 

 

 

    

 

성인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12.29 순교 
신분 여회장  지역 한국 


성녀 현경련(베네딕타 1793-1839)

현경련 베네딕타는 대대로 벼슬하던 서울의 중인역관 집안에서태어났다.
역시 역관이었던 그의 아버지 현계흠은 이 나라의 천주교가 퍼지자 오래지 않아 입교하였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게 되자 그로부터 성세 성사를 받았다.

그후 1801년 신유박해의 후기에 이르러 황사영의 백서와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붙잡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백서 가운데 한 교우가 수년전에 동래에 표류한 외국 상선을 가서 보고 서양상선 한척이 우리나라 전선 백척을 당할 만하다고 말했다는 귀절이 나오는데 이 교우가 바로 한계흠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때 계흠이 30세의 나이로 황사영과 함께 순교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아버지가 아주 열심한 교우였으므로 경련도 이미 아주 어려서 베네딕타라는 세례명으로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형제는 모두 4남매였는데 언니들이 출가하여 일찍 죽게 되자 동생 석문(가롤로) 어머니 이렇게 세 식구만 남게 되었다. 아버지의 순교후 그들은 일시 강원도 금성에 피신해 살았으나 얼마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다.

현경련은 나이 17세가 되던 1811년 서울의 총회장이던 영화로운 순교자 최창현의 아들과 결혼했다.
최창현도 신유년에 순교하였으니, 베네딕타는 이 박해로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동시에 잃게 되었다. 불행은 겹쳐, 결혼한 지 3년후에는 자식 하나없이 남편과도 사별하게 되었다.

젊어서 과부가 된 그에게 자식 하나 없고 보니 외롭고 서러운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으나, 경련은 도리어 "내가 보다 자유롭게 사주구령에 힘쓰도록 천주께서 돌보신 것이다." 라고 말하며 늘 천주께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와같은 은혜를 주신 그 분을 찬미하였다는 것이다.

경련은 친정으로 돌아와 늙으신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모하였다. 손으로 버는 돈이 적지 않았으나 몽땅 집안 살림에 사용할 뿐 자기를 위해서는 한푼도 남겨 놓지 않았다.

또한 경련은 바쁜 일손 가운데에서도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기도와 묵상과 영적 독서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이 집안의 완전한 화목과 규칙적인 수계생활에 탄복해 마지 않았다. 경련은 이처럼 자기 성화에 노력하였으나 그것으로 결코 만족하지를 않았다.

원래 퍽 개방적인 성격에 아주 총명한지라 교리지식이 아주 깊었다. 그래서 그는 무식한 교우들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찾아 권면 하였으며, 임종에 대한 많은 유아들을 찾아 대세를 붙이기도 하였다.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경련으로 하여금 신부댁 살림을 맡아보게 하고 동시에 여교우들의 일을 보살피게 하였다.
앵베르 주교가 "베네딕타는 여회장직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것으로 미루어 보아 경련이가 여회장직을 맡아 보았음이 확실하며 김프란치스코의 증언에 의하건대 명도회의 직책까지 맡아 보았을것으로 생각된다.

앵베르 주교는 경련이에게 기해일기를 계속한 사명까지 맡겼다.
미구에 자기자신도 잡힐 것을 짐작하고 앵베르 주교는 이 때문에 자신이 시작한 순교자 행전의 편찬이 중단될 것을 염려하여 현경련과 정하상에게 순교일기의 계속을 위촉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해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동생 가롤로는 집에 없었다. 남쪽지방에 전교중인 샤스탕 신부를 보필하기 위해 그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련은 즉시 고발되었으나 얼마동안 홀로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피신해 있었는데 그해 7월 초에 결국 포졸에게 붙잡혔다.

정부에서는 경련의 동생 석문이 서양신부의 충복인 것을 아는 만큼 어떻게 해서라도 그가 숨은 곳을 누이의 입에서 알아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경련은 그만큼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그는 여덟차례나 문초를 당하였고 포졸들의 사사로운 박해를 20여차례나 받았다. 두번은 주리를 틀렸고 나머지 여섯번은 태형으로써 매번 50대씩 도합 300대를 맞았다.

또 포졸들은 그에게서 선교사들에 관한 정보를 얻어서 그들을 체포하는 자에게 준다는 현상을 탈 생각으로 저희들 멋대로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경련의 강인한 신앙심은 그들의 증오와 탐욕에서 나온 노력을 헛되게 하였으므로, 참고될 만한 말을 단 한마디도 얻어 들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끝까지 굴복하지 않자 9월 23일 형조로 이송되어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어 없다가 10월에 들어서 형관이 잡아 올려 신문을 했다.

형관이 동생과 선교사의 은신처를 알아 내려고 했으므로 여기에서도 경련은 남보다도 한층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상처에서는 피와 고름이 계속 흐르고 기동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염병에 걸리어 병세는 위독해 졌다.

하루는 형관이, "이제라도 배교하는 한마디 말만 한다면 놓아 주겠다" 그러나 경련은, "더 묻지 마십시오. 주를 위하여 죽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경련은 "옥중에서 동생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여러 교우들도 신망애덕의 열심에서 우러나오는 격려의 말로 가득 찬 이 편지를 읽고 감탄하여 한편 슬픈 감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 편지는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

1839년 12월 29일 드디어 동료 6인과 한가지로 서소문 밖 형장으로 나갈 날이 밝았다. 예정보다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말을 듣고 경련은 누워서 편히 잠을 잤다. 시간이 되었으니 나오라는 소리에 일어나 경련은 옥중의 여교우들과 작별하고 기쁜 낯으로 떠났다.
마치 잔치에 나가는 듯 즐거워하였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칼을 받고 순교하니 나이는 46세요, 옥중에 갇여 있은 지 7개월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