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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한재권 요셉    

 

 

 

 

 

 

    

 

성인 성 한재권 요셉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12.13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한재권 (요셉 1835-1866)


일명 '원익'으로 불리는 한재권(요셉)은 태중교우로 충청도 진잠에서 아버지 한언적(도미니코)와 어머니 성주 배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또한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재권은 서 막달레나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 재용의 장남인 정석을 의의 양자로 택하여 후대를 물리었다. 충청도 진잠에도 박해를 만나자 아버지 한언적은 전라도 고산 다리실(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공소)로 피신하였다

이때 그는 재권, 재용, 재식, 재관 4형제를 데리고 왔으나 다시 그곳에서 대성동 신리골(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로 이사하여 살고 있었다. 이때에 회장직을 안 맡은 이유인즉 그이보다 먼저 이 동네에 정착한 손선지 베드로가 그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교인이나 교우 모두가 그를 착실하고 성격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교우본분을 매우 충실하게 지키었으며 그의 먼 조카뻘 되는 최 토마스는 "한재권 요셉은 여러해 전부터, 즉그가 아직 충청도에 살고 있을 때부터 순교하기를 열망했다"고 말했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포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을 때도 그것을 모르고 장작을 패고 있었다. 포졸들에게 잡히자 마자 그는 곧 구진버리 마을의 주막으로 끌려가 대성과 성지의 두 이웃마을에서 잡혀온 교우들과 같이 밤을 새웠다. 이튿날 그는 다른 교우들과 같이 전주의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옥에서 겪은 시련이 그에게는 특히 어려웠다. 그는 동지들과 같은 문초와 고문을 당하고 배교를 시키려는 관리의 반복된 노력을 견디어 내야 했을 뿐 아니라 그를 죽음에서 끌어내기로 결심한 가족들의 간청도 견디어야 했다.

어떤 사람의 말에 따르면 한재권은 한때 마음이 약해졌다가 순교를 하겠다는 매우 굳은 결심으로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복소송의 증인들은 이 풍문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그는 결코 그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굴복한 적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단언하며 그들의 단언을 정확한 사실로 확증하였다.

한재권의 아버지는 박별감이라는 외교인 벼슬아치를 알고 있어서 그로 하여금 감사에게 청해서 아들이 풀러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박별감이 아직 감사에게 교섭을 하지 않았는데 한재권은 아래와 같은 아버지의 전갈을 받았다.
"박가에게 감사를 찾아가서 돈을 받고 너를 풀어주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네가 감사 앞에 불려나갔을 때 그가 '네가 성교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하고 물으면 그저 한마디 '아니오'라고만 하면 일이 잘되어서 네가 풀려날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라."

심부름꾼은 전에 한재권의 아버지와 한 동네에 산 적이 있는 송화인이라는 관리였다. 한재권은 아버지께 이렇게 전해드리라고 했다.
"그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것같이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비록 한재권이 동의는 하지 않았지만 박은 감사인 이근섭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씨의 친구입니다마는 그가 감사님께 아들 원서를 석방시키도록 돈을 드리라고 제게 부탁했습니다. 감사님은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감사는 이 제의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그 한가가 서양교를 좇지 않겠다고 말하면 풀어주겠지만, 비록 죽어야 한다해도 그 교를 믿는다면 줄곧 되풀이하고 있으니 나느 그자를 석방할 수가 없네"
박은 이 일을 흥정하려고 다시 한번 감사에게 가서 교섭을 했다.
그러나 감사는 화를 내며 박에게 썩 물러가라고 명했다.

재권의 아버지는 그래도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관아의 무리들에게 많은 선물을 했다. 이들은 갇히 사람을 내보내는 데 동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재권은 아버지에게, "제가 떠나더라도 아버지께는 아들이 여럿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꼭 붙잡아서 순교를 하려고 합니다."하고 말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과연 그는 함께 갇혀 있떤 동료 5명과 1866년 12월 13일 전주 서문밖 숲정잉에서 참수형을 받고 단칼에 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한재권 요셉의 시체는 남녀교우들에 의해 순교지 근처의 용마루재에 묻혔으나 시체가 이장된 근처에 옮겨지니 곧 전주지방의 막고개가 바로 그곳이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