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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한이형 라우렌시오      

 

 

 

 

 

 

    

 

성인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46.9.20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 1778-1846)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 고을 양반집 자제로서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희생적 정신이 강하며 열네설 때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몇 주일 후에는 참으로 비상한 열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러 시간동안을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며 전에 범한 죄를 통회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주일과 파공축일에는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집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교우촌이 공소에 가서 본분을 지키었다.

나이 스물한살 때 교우여자와 결혼한 후 아주 산골로 들어가서 살았다. 이때부터 더욱 열심한 것 같다. 그는 신심이 클 뿐 아니라 박애심도 또 대단하여 빈궁한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기꺼이 받아들여 대접하였고, 혹 남루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옷을 주기까 지 하였다.
사람들이 애긍을 지나치게 한다고 말하면 그는, "헐벗은 이를 입히고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은 거저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이
르면 천주께서 이자를 듬뿍 붙여서 모든 것을 갚아 주실테니까요" 하고 대답하였다.

한이형은 밭이 두세뙈기 있어 그것을 자작하고 있었는데 일이 아무리 급한 때라도 주일파공을 완전히 지켰고 사순절에는 날마다 대재를 지켰다.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후 그를 회장에 임명하였는데 그의 학식으로 보든지 평소 덕행으로 보든지 이 직책의 적임자라 할수 있었고, 모든이가 만족하리만큼 이 어려운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당시 그는 얼마되지 않는 그의 땅이 있는 양지 고을 은이에 살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잡힌 후 포졸들은 이재용을 김신부가 거처하던 집주인이라 생각하고 그를 잡기로 하여 그의 삼촌 한명을 잡아 조카가 있는 곳을 대라고 추궁하였다.

이재용이 포교들을 이끌고 은이로 왔을 때는 이미 그 동네 교우들이 전부 도망한 뒤였다. 이통에 그 근동에 살았던 한이형이 붙잡혀 조롱을 당하고 매를 맞았다. 포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들보에 매달아 놓은 후 배교하라고, 하고 동교인을 대라고 닥달하여 매질을 몹시 하였다.

한이형이 거절하자, 두 다리를 매고 양발 사이에는 깨어진 접시며 질그릇 조각을 끼우고 발목을 굵은 줄로 묶어서 앞뒤에서 잡아 당겨 살을 톱질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한 이형이 이 혹형을 얼마나 용감히 참고 견디었는지 형리들까지도 교우들에게 "너희도 천주학을 하려면 이한가처럼 해야 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 후 서울로 압송해 올라올 때 포졸들이 말을 태워주마 하였으나 거절하고 또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 맨발로 일백이십오리 이상이나 되는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올라왔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포청에 와서도 문초와 형벌을 당하는데도 끝까지 굽힐줄 모르는 용기를 드러냈다. 드디어 1846년 9월 20일 교수형에 처하니, 그의 나이는 4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