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한영이(막달레나 1783-1839)
한영이 막달레나는 가난한 시골 양반의 외교인 집에서 태어난 장성하여 권영좌의 후처로 들어갔다.
권진사는 문장과 명필로 당대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는데, 중년에 이르러 천주교로 개종하여 임종시에는 대세를 받고 선종하였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외에 어린 딸이 있었다. 권진사는 생전에 아내에게 입교를 권고하였고 임종마당에서 재삼 부탁하는 것을 잊지않았다.
남편의 유언에 따라 수계를 타당히 하려는 의도에서 한영이는 어린 딸 권진이를 데리고 교우집에서 붙어 지냈다.
이 집은 한영이 막달레나보다 더 가난해서 여기서 한영이 모녀가 겪어야 했던 비참과 고통은 이루 표현키 어려운 것이었다.
딸이 차차 장성하여 열세살이 되었을 때 시골을 한 교우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혼례식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가난하여 자기 아내를 데려갈 수 없게 되니 한 영이는 부득히
딸을 데리고 사위의 친척인 정하상의 집에 있게 되었다.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여 정 하상의 집에 거처하게 되자 모녀는 신부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미구에 딸과 신부 사이의 나쁜 표양으로 이집을 나와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박해를 맞았다. 1839년 7월 17일 한영이와 딸 권진이와 그들의 친구 하나는 배교자 김 여상의 고발로 그들과 같이
천주교를 믿던 여종과 함께 붙잡혔다.
포장은 그들의 성명을 물은 다음 한영이 혼자만 옥에 가두게 하였고, 젊은 세 여자는 이웃집에 남겨두고 파수를 보게 하였다. 어찌하여 이런 수상한 짓을 하는가 하고 이상히 여기고 있노라니까,
얼마 아니하여 유다스 김여상이 그들을 찾아와서 감언이설로 꼬이기도 하고 엄포하게 하여 권진이가 저를 따라가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권진이는 그저 업신여기는 말투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포교들은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동정하여 도망갈 기회를 주어
유다스의 치근거리는 것을 면해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며칠 후 권진이는 젊은 여종과 함께 도망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이 사건의 내용을 알게 되자 김여상의 말을 들었던 이 관원을 파면시키고 파수병 여럿을 귀양보내고 포졸을 보내어 권진이를 추적시켜 다시 붙잡고야 말았다.
이 사건의 결과로 한영이는 한층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었으니 발에는 착고까지 채워 엄하게 다루었다.
뿐만 아니라 교우 10여명이 새로 잡히게 되었고, 한영이만이 아니고 옥중의 교우들이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도망했던 두아가씨가 잡혀 들어오자, 포장이 모녀를 잡아들여 지난 사건과 관련하여 더욱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종시 굴복하지 않으므로 포청에서 형조로 옮겨 가서 다시 여러 번 곤장을 맞았으나 천주교 신앙에 대한 변함없는 애착심
을 기꺼이 선언하였다.
드디어 사형이 선고되어 1839년 12월 29일에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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