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한아기(바르바라 1791-1839)
한아기 바르바라는 교우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들에게서 열심한 교육을 받았으나 부모의 지도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청춘을 무질서하게 절도없이 지내며 쾌락을 즐겼다. 마음 어느 한구석엔 봉교할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외교인에게 출가하고 말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딸 바르바라를 찾아가다가 감아기 아가다를 만났는데 아가다가 바르바라에게 개과천선하기를 간곡히 권하는 말에 황연히 깨닫고 이때부터 열심히 배우고 익혔으며 이에 주의 은총이 바르바라에게 내려와 이전 생활을 말끔히 청산하고 새사람이되었다.
천주께서는 그의 굳셈을 시험하기 위하여 나이 서른살에 남편과 3남매를 모두 여의게 하니 친정으로 돌아와 열심히 수계하다가 김아기 아가다 집에 가 같이 거처하게 되어 망건 만드는 것을 거들며 자주 제재하고 냉담자를 권하며 외인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또한 죽어가는 유아만 있다면 쫓아가서 대세를 붙여 많은 영아의 영혼을 구하였다.
이렇게 열심히 수계하므로 당시 교우들이 이 두사람(김아기.한아기)을 뛰어나고 덕행이 있는 교우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한바르바라는 열렬한 마음으로 순교하기를 원하였다. 1836년 10월 체포되어 포청에 끌려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십계도리를 설명하였으며 형벌 중에서도 외모에 혼연한 빛이 역력했다고 한다. 김아기 아가다와 같이 형조로 이송도이 4년 옥고끝에 서소문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48세였다.
기해년 박해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아홉분이 순교하였는데 그중 여섯분이 여교우였다. 이미 기술한 이소사, 박희순, 김아기, 한바르바라 다음에 나올 깁업이, 박아기 등인데 이 중 박희순, 박아기를 제외한 네분은 이미 4년전에 감옥에 갇혀있어 형선고를 한번
받은 분들이다.
형장에서의 상황은 이미 이광헌 때 기술한 바 있어 생략하고 그 때의 것을 앵베르 주교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5월 27일 월요일 새벽에 가까스로 시체를 훔쳐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전히 이들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둔 작은 터에다 함께 묻히었습니다.
나는 행복한 유렵에서와 같이 그들에게 비단 옷을 입히고 귀한 향료를 바르기가 얼마나 소원이겠습니까마는 우리는 가난도 하거니와 그렇게한다면 헌신적으로 이 거룩한 사업을 맡아 하는 교우가 너무나 큰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남녀별로 각각 옷을 입히고 시체를 잘라서 자리에 싸서 묻었습니다.
어제 우리는 많은 보호자를 천국에 보냈고 내가 바라는 바와 같이 어느 때는 조선에 천주교가 왕성하여지면 이 시체들이야말로
국가적인 유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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