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최형(베드로 1813-1866)
최형 베드로는 일명 '치장'이라고 불리었다. 충청도 홍주의 훌륭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20세에 천주교에 들어온 아버지는 매우 열심하였다. 최형은 14세 때 부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큰 누이는 평생 동정녀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 때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웠으나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에 손일을 해서 집안을 도와야만 했다.
모방 신부는 그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인 1836년 당시 스물세살인 최형을 만나 그의 깊은 신앙심과 재능을 인정하고 심부름꾼으로 써서 자기가 순교하는 1839년 9월까지 계속 곁에 두었다.
1840년에 최형과 아버지는 천주교인이라고 해서 붙잡혔다. 그러나 그 때는 박해의 흥분이 가라앉은 때였으므로 그들은 몸값을 치르고 배교하지 않은 채 석방되었다.
그 뒤 마카오에서 돌아온 김대건 부제와 단짝이 되어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에 모셔 들이기 위해 중국으로 가야 하는 배의 의장하는 일을 도왔다. 최형은 그 배에 함께 승선하여 8월 27일 상해에서 거행된 한국의 첫번째 신부인 김대건의 사제서품식에 참여했다.
돌아올 때에 그가 탄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나 돛대가 모두 부러지고 날아가 버려 마치 성난 파도위의 호도껍질과 같았다. 임시변통으로 모은 승무원인 6,7명의 교우는 낙망해서 울며 부르짖었다.
그 동안 주교는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왜들 그렇게 소리치오, 성모마리아께서 여기 계시오. 내일열시에는 그대들이 조선땅을 눈으로 보게 될 거요."
이 말에 교우들은 용기를 얻었고 특히 최형은 아주 기쁜 얼굴을하였다.
과연 이튼날 열시에 제주도 한라산이 보였고 10월 21일 저녁에는 42일간의 항해끝에 여행을 마쳤다.
최형은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에 순교할 때까지 그의 시중을들었다. 그 때 나이가 33세였는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독신으로 남아 있고 싶었으나 혼자 살기가 어려우 가정을 꾸미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서울 남대문 밖에 자리잡고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면서 천주교서적을 베끼고 묵주를 만들며 외교인들과 예비 교우들을 철저하게 맞아들였다. 이 외교인과 예비교우들은 그가 이들에게 다행스럽고 유익한 영향을 미칠 것을 확신하는 교우들이 보내는 것이다.
그는 정식으로 회장은 아니었는데 베르뇌 주교에게서 세례를 줄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주교의 신임을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을 미루어 왔지만 자기 양들에게 견실한 지식을 확보해 주기를 바라는 목자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한 계획을 주교가 1862년 최형에게 밝혔다. 그것은 천주교 인쇄소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계획은 끊임없이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헌신과 숙련이 아울러 필요했다. 베르뇌 주교는 그로 인해서 천주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영혼들에게 이익이 될것이라는 점을 최형에게 강조했고 이에 그는 장애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동의하였다. 그는 인쇄소를 세워 4년동안에 수천권의 책과
소책자를 그의 손으로 내보냈다.
베르뇌 주교의 재판 때 재판관은 포졸들이 압수한 책이 많은 것에 놀라 주교를 넘겨 주었던 배반자 이선이에게 그 책들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이선이는 최형과 그의 동료 이치화 요셉의 이름을 댔다. 최형은 포도청의 수색을 예측하였다. 그래서 딸과 사위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나서 아내에게 어떤 교우의 주막을 일러주었다. 포졸들은
집에서 최형을 찾아내지 못한 데 실망해서 그의 아내를 고문해서
남편이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해보았으나 아내는 그것을 일러바치지 않았다.
그리고 밤에 군사들이 감시하고 있었는데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집에 열네살 먹은 어린 심부름꾼을 남겨 두었는데 이
소녀가 이튼날 아침 매와 무서운 엄포에 못 이겨 최형이 숨어 있는 곳을 일러 주었다.
2월 27일 날이 새기 전에 최형은 포졸들의 손에 붙잡혔다. 포졸들은 그를 마구 차고 때리며 갓과 옷을 갈기갈기 찢고 이런 몰골로 그를 좌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그는 거기서 관례에 따라 성명과 활동에 대한 신문을 받았다. "몇 해 전부터 천주학을 하느냐? 누가 시켜서 그 책들을 찍었느냐? 네가 자발적으로 했느냐?"하는 닥달에 최형은 이렇게 대답했다.
"죄인은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믿습니다. 책은 주교님과 합의해서찍었습니다."
"생계를 위해서 그렇게 했느냐? 또 다른 목적으로 그랬느냐?"
"물론 밥벌이를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마는 그 성서들은 외교인들의 회개를 뜻에 두었습니다."
"흉악한 놈! 너는 주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
"천주 앞에서는 저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법이 금하는 일을 했으니 법대로 판결해 주십시오."
최형은 그가 갇혀 있던 여러 곳의 옥에서 아주 무서운 고문을 훌륭한 용기로 참아받았다.
처음에는 다리뼈에 매를 맞고 머리채로 매달려 세모난 몽둥이로 무섭게 맞았고 그 다음에는 정강이에 몽둥이질 서른번을 당했고 '대장'이라는 형벌에서 또 서른대를 맞았는데 이 형벌은 다리와 어깨와 발가락을 동시에 치는 것이어서 발가락이 문자그대로 으스러
졌다.
그가 범했다고 고발된 두 가지 죄는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과 사악한 책을 찍었다는 것이었다. 교우들을 밀고하고 협력자들의 이름을 대라는 독촉을 받고는 힘있게 거절하고 자기 혼자만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름 하나만을 댔는데 그것은 이미 붙잡혀서
그와 같이 출두한 전장운 요한의 이름이었다.
1866년 3월 9일 형조에서는 법의 시행, 즉 두 죄인에 대한 사형을 요구하는 청원을 임금에게 올렸다.
<이 자들은 사교에 깊이 빠졌으며 사악한 책들을 찍어 내서 전파하며 나라의 금려을 염두해 두지 않고 혼란을 일으켰나이다. 그들의 마음이 사교에 미혹되었고 온 몸이 거기 빠졌사오며 그들의 마음은 쇠와 돌과 같이 단단하여 비록 가혹한 고문을 받아도 그것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나이다. 그 자들은 사실을 고백하고 선고문에 서명하였나이다. 법에 의하면 선고는 그자들이 지체없이
참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성록>에는 이 청원서에 뒤이어 청원대로 윤허하노라 하는 왕록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그날 3월 9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53세의 나이로 최형 베드로는 동료인 전장운 세자 요한과 함께 참수되었다.
최형의 시체는 형장 근처 벌판에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후에 교우들이 남종삼의 시체와 함께 거두어 ㄱ고개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 때 어깨와 다리에 깊은 상처가 여럿 있고 많은 뼈가 부러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모든 신앙증거자 중에서 최형
베드로가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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