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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최창흡 베드로     

 

 

 

 

 

 

    

 

성인 성 최창흡 베드로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12.29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최창흡 (베드로, 1786-1839)

최창흡 베드로는 1786년 서울서 최초의 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관리노릇을 하던 어떤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교회에서는 여칠이라고도 하였다. 열 세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따라서 서울의 총회장인 최창현 형마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치명하니 보호자나 지도자도 없이 버림받아 외인이나 다름없이 살았다.

최창흡의 성품은 부드럽고 온순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놀라울만큼 겸손하여 언제나 남을 좋게 말하고 자기 자신은 남보다 못한 줄로 믿고 있었으므로 모든이와 아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형이 순교하던 신유년 최창흡의 나이 겨우 열 세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형의 나이 43세였으니 아마도 이복형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뭏든 형의 순교후 파산을 당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나이가 어리어 교리도 잘 모르는데다 지도자도 거의 희생되어 가르침을 받을만한 사람도 전혀 없고 보니 냉담한 상태이었다. 박해 후 3-4년이 지나자 교우들이 차차 모여 들고 다시 일어나게 됨에 따라 최창흡도 교우들을 만나게 되고 교리와 경문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열심히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거의 30세가 되어서 결혼을 하였고 역시 서울출신인 손소벽(막달레나) 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내도 원래 봉교하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역시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도 일찍 여의게 됨으로써 할머니 밑에서 교리를 배우고 차차 수계하게 되었다.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갑자기 많은 사람이 죽어감을 보고 창흡은 부인과 한가지로 대세를 받게 되었고 이때 부부가 함께 열심히 봉교하였다.

그후 1833년 중국인 유방제(파치피코)신부의 입국을 계기로 신부의 교훈과 성상의 은혜로 힘을 얻어 열심히 배가하였다. 이 무렵 모든 교우들로부터 모범적인 교우라고 평판을 듣게 되었지만 베드로는 스스로 한탄하며 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내 행실을 생각하면 내 영혼을 구히기 위해서는 치명하는 길밖에 없다."

순교에 대한 그의 원의는 이렇게 간절하였다. 기해 오월에 박해가 치열해져감에 따라 그이 순교에 대한 소망도 더욱 굳어만 갔다. 그러나 그 는 치명을 피하기로 하고 집안식구를 데리고 일단 사위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의 사위는 당시 교회의 저명한 인물중의 하나인 조신철이었다. 결국 여기서 7월 상순에 붙잡혀 갔다.

최창흡 베드로는 자녀 열한명을 낳았으나 그중 아홉명은 어려서 죽었으므로 이때 베드로와 그의 부인, 큰 딸 바르발, 두살난 어린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잡혔다. 그러나 두살짜리 젖먹이는 육정의 유혹때문에 친척에게 맡겼다.

포장이 창흡을 대령시켜 문초하였다.
"네가 사교를 믿느냐?"
"나는 사교를 믿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만 흠숭하고 믿습니다."
"배교하라, 그러면 살리라."
"나의 창조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성교를 믿느냐?"
"교우인 나의 부모들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창조주에 대한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포졸들이 웃으며 조롱하기를, "여기 큰 학자가 하나 났구나"라고 빈정거리며 그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문초 일곱번에 문초 때마다 주리를 틀고 곤장을 맞았다. 150도의 곤장을 맞으며 동교인을 대라고 위협했으나 창흡의 열심은 더할 뿐이었다.

그는 지난날의 자기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포청에서와 다름없이 똑같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마침내 간문 3차후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형장으로 나갈 때 한 옥졸에게 옥에 있는 부인과 자기딸에게 전해달라고 하며, "눈물과 고통은 욕정에서 말미암은것이다. 도리어 주를 찬미하고 이같이 큰 은혜를 감사하며, 나의 뒤를 따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창흡은 수레위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고 뒤에 있는 사람에게 머리를 돌리어, "천국에서 같이 만나야 합니다. 잘 분비하십시오."란 말을 남긴 다음 칼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의 그의 나이 5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