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김노사(로사 1783-1839)
김 로사는 1783년 서울 외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일명 '감곡집'으로 불렸는데 아마도 감곡골이란 곳으로 출가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편이 죽은 후에 비로소 성교를 알게 되었다. 천주교인 친척과 같이 살고 있었으므로 도리와 경문을 부지런히 배워 익혔다. 열심히 벌어 의식이 구차하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회두시키고 그들과 화목하게 살아 나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매양 진실한 통회를 바라고 신공에 아주 충실했다.
신부가 입국하자 예비를 타당히 하고 성사를 자주 받았다. 또한 신부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여 자주 음식을 성의껏 준비하여 드리곤 했다.
김 로사는 이미 5월 24일 순교한 권득인 베드로와 같이 잡혔다고 한다. 김로사는 1839년 1월 16일에 잡혔을 것이다.
밤중에 수많은 포졸들이 불시에 달려들자 처음에는 어디둥절했으나 곧 마음을 수습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위주치명할 결심을 하고 동서와 함께 잡혀갔다.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8명중 맨처음으로 투옥된 김 로사를 포장이 출두시켜 신문하기를,
"네가 천주학을 한다니 사실이냐?"
"네, 과연 그러하옵니다."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포장은 그 앞에 많은 형틀을 벌여 놓게 하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몸을 천조각 만조각으로 내기전에 어서 천주를 배반하고 공범자를 대라."
"천주를 배반할 수도 없고 공범자를 댈 수도 없습니다."
"어째서 못하겠느냐?"
"천주는 모든 사람의 창조자시요, 아버지시며, 덕을 사랑하시고 악을 벌하시며 덕있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끝없는 형벌을 주십니다. 천주를 배반함은 죄악이니 삼가하여야 할것이요, 사람을 해하는 것도 나쁜 일이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이상 더 강권하셔도 쓸데 없습니다. 저는 피를 흘리어 이 진리를
증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왕께서는 이교를 금하시지 않느냐?"
"저는 국왕께 매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보다 먼저 천주께 속하여 있습니다."
이에 포장은 크게 노하여 잔인한 형벌을 가하게 했으나 그의 굳센 의지는 한결 같았다. 세번을 계속하여 이같은 고문을 하였으나
김로사는 "죽을 따름입니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포청에서와 같이 몹시 매를 맞았지만 한결같은 그의 굳은 신앙을 조금도 약화시킬 수는 없었따. 드디어
참수형이 언도된 채, 여러날 동안을 그대로 옥에 머물러 있다가 4월에 붙잡힌 교우들이 갇힐 때 서로 만나게 되었다. 마침내 옥살이 8개월만에 그들과 같이 염원해 마지 않던 순교의 월계관을 쓰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