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최영이
(바르바라, 1818-1840)
최영이 바르바라는 아버지 최창흡(베드로)과 어머니 손소벽(막달레나)의 11남매 중 맏딸로서 1818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말이11남매라고 하나 최영이의 형제 자매는 어려서 9명이나 죽었고,어린 여동생만 남게 되었다.
최영이는 본성이 순량하고 충명하였다. 부모와 한가지로 영세를 받고 부모의 열심한 모범에 따라 어려서부터 그의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열다섯살 때, 강론을 들은 후로 기도와 영적 독서에 전념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은 후, 그는 더욱 열심히 분발하게 되었다.
스무살이 되던 해 부모가 그를 출가시키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최영이는 부모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일에 있어서 지위가 높다든지, 부자라든지, 가난 하다든지 하는 것은 보지 말도록 하시오. 저는 그저 열심하고 글을 많이 배운 교우과 혼인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사실 문벌과 나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신철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에 최영이의 나이는 스무살이었고, 조신철은 마흔 네 살이었으니 무려 스물네살이나 차이가 났다.어떻든 3년동안을 같이 사는 동안 한 아들을 낳아 길렀고 서로
격려하여 독실하게 수계하였다.
점차 박해가 치열해지자, 최영이의 양친은 사위인 조신철 집으로 피신와 있었다. 그러나 7월 초순에 최영이는 아버지 베드로와
어머니 손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지극히 엄혹한 심문을 당해야 했다.
포장이 최영이를 불러 문초하기를 "배주하고 일당을 대라"고 강요하고, 또한 집에서 압수하여온 중국물건의 출처를 물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따라서 동범도 없습니다. 물건으로 말씀드리면 누가 그것을 사라고 하였는지 모릅니다."하고 대답하니 주리 일자를 가하고 하옥시켰다.
바르바라는 일곱번의 문초중 두번의 주리와 대장 260도를 맞아야 했다. 옥에서 최영이는 젓먹이를 데리고 있었다. 본능적인 모성애와 허약한 욕적 때문에 유혹되어 순교하는데, 조당이 될까
두려워서, 용감히 어린 것을 떼어 친척에게 보냈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포청에서나 마찬가지로 많은 문초와 혹형을 받았지만 한결같이 굴복하지 않았다. 또 세차례의 형문 가운데 곤장을 맞고 나서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영이는 감옥에서 한 교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대략 다음과 같다.
<부모와 남편과 분자(현분자를 가리킴) 모두 치명하였습니다. 혈육에서 오는 괴로움이 오죽 하겠습니까마는 천당을 생가할 때,도리어 위로가 되고 이 은혜를 주신 천주께 감사합니다. 내 마음은 기쁨에 넘쳐 즐겁기만 합니다>
마침내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참수 치명하니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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