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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9.12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24세)
회장 9월 12일, 포청옥에서 옥사

성 프란치스꼬 최경환(崔京煥)은 두번재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의 아버지로 충청도 홍주의 다래골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인의 본분을 지켜왔다. 결혼한 다음에는 보다 열심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곳 외교인들의 탄압으로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몰두하였다.

1836년, 큰 아들 최양업을 모방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성인의 신심은 자신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쳐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믿음의 정신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주위 사람들은 그의 본래 성품이 온순한 것으로 알고 온화한 그의 성품에 탄복했었다 한다.
최양업 신부에 의하면 '아버지는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깊은 묵상과 신심서적 읽기에 열성을 보여 교회의 가르침에 놀랄만한 지식을 취하셨다'며 '또한 아버지는 천주에 대한 열성과 한가지로 사람에 대한 박해심이 열렬하여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가난한 이웃을 위한 몫으로 남겨놓으셨다'고 전한다.
1839년 수리산공소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으며 교우들을 위로 격려하면서 돌보아주던 중 그해 7월 31일에 서울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들과 일가 등 40여 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아들을 나라밖으로 내보내어 신학공부시킨다는 죄가 더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고통과 형벌을 받았다.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안았다.

그해 9월 11일 최후로 곤장 50도를  맞고 그 다음날 옥중에서 일생을 마쳐 순교의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주님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