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조화서 베드로 (1814∼1866)
조화서 성인의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구교우 집안이었으며, 그는 수원 도마지에서 아버지 안드레아와 어머니 권 율리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939년에 치명하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충청남도 신창 남반재의 교우촌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1828년에 아들 조윤호를 낳았다. 그는 한국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마부로 뽑혀 여러 해 동안 모셨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에 사망한다.
그후 그는 최양업 신부의 마부로 일할때 여러 번 와 본 적이 있는 전주 유상리 성지동 공소로 이사했다. 조화서는 수계범절이 극진하고
애주애인(愛主愛人)하는 표양이 출중해서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을테면 마부 조 베드로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866년 12월 4일 밤, 포졸들이 그의 집을 급습했는데 그때 조화서는 다른 마을에 있었다. 그의 아내가 이 사실을 알고 피신하도록 종용
했는데 조화서는 오히려 집으로 가서 체포를 당했다.
포교는 늘상하는 대로 천주교를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그리고 믿는 일당들을 모두 대라고 다그쳤다. 그는 부모에게서 천주교를 배웠고, 나와 아들만이 믿노라고 하며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했다. 그러자
포졸들은 아들이 천주교를 믿는다고 고자질하는 놈이 사람이냐며 욕을
했다. 조화서는 진영으로 끌려가기도 전에 혹독한 매를 맞았다.
조화서는 전주로 압송되면서 아들 에게 전주 감영에 가서 고문을 당하더라도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고 말하자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믿음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당부한다. 이처럼 부자가 마음이 변치않도록 서로 위로하는 말을 들은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들은 죽는 게
무엇이 좋은지 기를 쓰고 죽으려 한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신앙심에 경탄했다. 조화서는 아들 윤호와 같은 날 치명하여
함께 천국에 가고자 했는데 먼저 순교의 칼을 받았다. 그이 나이 5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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