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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성인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12.29 순교 
신분 부인  지역 한국 


성녀 조증이(바르바라 1781-1839)


조증이 바르바라는 본시 양근 조동섬(유스티아노) 가문의후손이요, 아버지는 조프란치스코라고 불렸다고 하나 동섬과 조증이의 항렬은 분명치가 않다. 명문가문의 딸로서 1781년에 태어나서 1801년 신유박해 이전인 열여섯살 때 열심하고 가문이 좋은 남이 관(세바스티아노)에게 출가하여 4년만에 한 아들을 낳았으나 곧 잃었고 때마침 일어난 신유박해의 풍파로 아버지가 순교하였으며 동섬(유스티아노)도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고 동섬의 아들 토마스 는 양근군 옥에서 옥사하였다. 3년 뒤에는 양근에서 다시 동섬의 일가인 조숙이 참수치명하였다고 한다.

조 바르바라의 할아버지는 박해때 성물을 땅에 묻으며, 바르바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당시 증언에 의하면, 박해가 지나자 바르바라는 위험을 무릎쓰고 성물을 파내어 잘 말리어 소중히 간직해 서울로 가지고 올라 갔가도 전해진다.

한편 바르바라의 남편 남 세바스티아노도 잡히어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 남편이 귀양가게 되자,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수 없어서 부득히 경기도 이천의 친정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과 지냈다.
여기서 바르바라는 실로 형용키 어려운 여러가지 위험과 허다한 시련과 고초를 겪어야 했다. 또한 바르바라의 신앙생활도 냉담자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교회지식이 불충분한데다 박해로 인하여 자연 교우들과의 접촉도 끊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담상태는 10여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811년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다행히 서울의 한 교우 일가 집으로 와서 거처하게 됨으로써 점차 교리를 깨우치고 열심히 수계하게 되었으며 허송세월을 보상하고자, 신심생활에 전념하고 온갖 선행에 전력을 기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에 하루 속히 선교사를 모시려는 열망에서 외가 친척인 정하상(바오로)이 추진하는 선교사 영접 계획이 실현 되도록 힘껏 도왔으며 열심히 벌어서 바오로의 북경 여비를 충당하였다.

1832년 유배지에서 돌아오 남편도 정하상의 일을 도와 이듬해는 중국인 유신부를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바르바라는 유신부를 자기 집에 모시고 남편과 한가지로 신부에게 정성껏 봉사하였고, 3년후 유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따로 집을 마련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지냈다.

여기에서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범주교를 그의 집에 영접 하여 들였다. 그리하여 그의 집은 교우들이 와서 기도하고, 고백하고 미사에 참레하는 공소가 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바르바라는 기구와 묵상을 부지런히 하였다. 그리고 사람앞에서 늘 "만일 군난이 일어나면 죽을 터이니 치명을 잘 준비하여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 영혼을 구하자" 고 입버룻처럼 말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남 세바스티아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내가 한번 서울에 왔을 때 세바스티아 노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이때 나는 바르바라가 어떻게 이웃을 권면하고 수많은 외교인을 입교시키며, 수계를 열심히 하고 있는가를 목격하였다. 당시 교우들은 모두 바르바라를 성녀라고 불렀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이 이천으로 피신해 버리니 집에는 바르바라 모녀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이 때 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6월 9일 남편을 체포하러 온 포졸들이 남편 대신 조 바르바라 모녀를 잡아갔다. 동시에 집에서 많은 성서와 성물이 발각 됨으로써 교우의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포장이 바르바라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배교하라. 그리고 가장이 간 곳과 친척과 동교인을 대라"고 위협을 무수히 하였으나, 바르바라는 단연 거절하여 남편의 잠복소를 대지도 않고 신앙을 배반하지도 않았다.

"만번 죽어도 나의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몇 주일동안에 조증이는 다섯 번이나 같은 문제에 대해서 문초를 당했다.
"죽든지 그렇지 않으며 네 교를 배반하고 교우를 대든지, 두가지 중에 한가지를 택해야 할 테이니 잘 생각하여 보아라"
"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라리 만번 죽을지언정 죄를 하나도 범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굽히지 않으므로 그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하옥된 후에도 군졸들이 제멋대로 끌어 내어 사사로이 학대하기를 20여차례나 하였다. 그 사이에 남편 남이관이 이천에서 잡히어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러나 불과 10일만인 8월 19일 아내에게 비록 동일동사는 못할지언정 동지동사는 하자는 유언을 남기고 먼저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조증이는 포청에서 문초를 받던 중 주리 한번과 대장 도합 180도를 맞았다. 몸에서 계속 고름이 흐르고 온 몸이 상처두성이어서 이제는 더이상 형벌을 가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세 차례나 곤장을 맞고서야 비로소 고대하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옥에 있은 지 근 6개월 드디어 동료 5인과 함께 동지동사나 하자는 남편의 예언대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그는 순교함으로써 남편과 한 가지로 순교의 월계관과 성인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에 조 증이 나이 58세였다.

형장으로 향하는 마당에서 옥정 끊기 어려워 눈물을 흘리며 동정하며 마지 않는 옥중의 동료 교우들을 보고 신심과 애정에 넘치는 말로 힘써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아직 치명시간이 멀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증이는 태연히 자리에 누워 조용히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형장으로 떠날 시간이 되자 일어나 용약하며, 형장으로 향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마음에 조그마한 두려움도 없었을 뿐더러 도리어 평화에 가득 차 있었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