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조신철(가롤로 1794-1839)
조신철 가롤로는 자가 경우로 알려진 강원도 회양사람으로 가족은 전부 외교인이었다. 다섯살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얼마 안되는 가산은 아버지가 탕진하였으므로 앞길이 막연한 소년은 집을
떠나 절에 들어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들과 같이 몇해를 지냈다.
그 후 환속하여 서소문 밖에서 거주하면서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슬살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갓다. 하루는 북경에 왕래하는 사신의 하인으로 들어가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곧 승낙하여 마부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그는 정직하고 사심이 없고 용감하여 동료들이 우러러 보는 모범이 되었으며 사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그는 약간의 금전을 절약하여 아버지와 형제를 도와주고 다시 여러차례 북경을 왕래하였다.
이렇게 왕래하던 중 유진길과 정하상이 그를 눈여겨 보고 입교시켜 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조신철이 30세가 되었을 때 어떤 교우집에 몰래 불리어 갔다.
그때 그에게 천주교에 대하여 처음으로 말을 꺼내는 일은 유진길이 맡기로 했다. 저들이 맨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하였을 때에
조신철은 깜짝 놀라고, 몇가지 교리를 풀어 주는 것도 어리둥절
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였다.
그러나 며칠동안 계속해서 가르치니 그의 정신이 신앙의 빛을
향하여 전심으로 천주교를 믿기로 약속하였다.
조신철은 마두의 역부로서 연경에 들어가기를 15-16차례 하였는데, 1826년부터는 유진길과 동행하게 되어 북경신부를 만나 보고 성세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조선에 돌아오자 그는 기쁨을 걷잡지 못하였고, 겸손과 인내와 천주께 대한
사랑으로 신입 교우들을 자기 힘 닿는 데까지 애긍시사로 도우면서 그중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조신철은 자기 아내를 권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마침내 그녀의 내키지 않는 마음을 움직여 입교시켰으며 아내는 열심한 신자가 되었으나 얼마 후 아내가 선종하자 열심한 여교우 최바르바라와 재혼하여 아주 평안한 가운데 충실히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
참으로 헌신적인 조신철은 비천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조선 천주교회에 대단히 많은 공헌을 하였으니 그 활동력과 그이 이름은
정하상과 역관 유진길의 이름과 함께 더욱 빛난 존재라 할 수 있다.
조신철은 북경에서 영세한 이래 아마도 병술년(1826)부터 북경
여행을 할 때마다 동국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해 마지 않았다. 그 결과 9년만에 결국 선교사 파견을 약속받았다. 이때 중국인 유신부를 위시하여 프랑스 신부들이 잇따라 나오게 되었다.
사실 조신철의 끊임없는 주선이 없었더라면 이같이 중대한 일이
여러번 성사되기는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모방 신부가 처음으로 지방에 성사를 주러 갔을 때에는 아직 신부가 말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그의 통역이 되어 교우들이 성사를 타당하게 받도록 도운 일도 있었다.
조선교회를 위하여 해마다 북경에 왕래하는 교우들을 언제나
앞장서서 인도하던 조신철은 오래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받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다. 1839년 초에 귀국하는 길에
그는 꿈을 꾸었는데, 구세주께서 타불산위에 계신 것을 보았다.
사도 성베드로와 성 바울로가 모시고 있었는데,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올해 순교의 큰 은혜를 내려주마" 조신철은 여러번
감사기도를 드리며 절을 하였다. 그런데 같은 꿈을 두번이나 다시 꾸게 되자 깊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박해의 진행 형세를 보고 그 신비로운 꿈이 오래지 않아 그에게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순교를 준비할 생각밖에는 가지지 않았다.
포교들이 그의 집에 들이 닥쳤을 때에 그는 집에 없었는데 집에 돌아와,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가는 포교들을 만났다. 천주의
섭리의 명령을 앞질러 갈까봐 감히 자수하지는 못하고 잡혀가는
교우들의 뒤를 따라 처음에는 사관청으로, 다음에는 포청으로 갔다. 군졸들이 구경꾼들을 모두 쫓아 버리는데 그만이 혼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등을 밀어 내는데도 저항을 하니, 어떤 사람이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
나는 교우들이 잡힌 집의 주인이요"
이리하여 즉시 잡혀 포장앞에 출두하였다.
조신철은 자기집 돈으로 북겨에서 사온 물건을 아직 처분할 시간이 없었다.
이리하여 모든 포졸들의 손에 압수되었다. 거기에는 서적, 묵주, 성패 등 교회에 필요한 물건이 꽤 있었는데 포졸들이 포청에
갖다 바쳤다. 포장은 조신철에게 그 출처를 물었다 .
"이 물건은 누구 것이며 누가 그것을 장만해 오라고 네게 시키었으며, 같이 일을 꾀한 자는 누구냐?"
"이 물건은 몇해 전부터 북경에 왕래하여 장사하는 상품이올시다"
"물건 주인과 공범자를 대라."
"천주의 계명이 사람을 해하지 말라 하였으니 어떤 사람을 막론
하고 도무지 고발할 수 없습니다."
"너는 천주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면서 나라와 재판관이 네게 묻는 말에 거절한단 말이냐?"
이에 포장은 그의 팔과 다리를 주리 틀게 하고 공중에 매달고
마구 치게 한 후 질문을 거듭하였으나 조신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앵베르 주교가 검거되었을 때, 조신철은 그와 무릎 맞춤을 당하였다.
포장은 교회의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는 그의 친구들과 또 정탐꾼들이 아직 찾아내지 못한 두 전교 신부의 처소를 대라고 강박하며 주리를 틀고 줄톱질을 하며 삼롱장으로 다리를 사뭇 내리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혹형을 당하기 무룻 네 차레였으나, 그는 오직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재판관들은 어이가 없어 서로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몸은 살이 아니고 목석인가 보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붙잡힌 후 조신철은 그들과 같이 불려나와 함께 금부로 옮겨 갔다.
거기서 연 사흘동안 문초를 다하고 세 차례에 걸쳐 곤장을 수
없이 맞았다.
여기서 그는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고 증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 영접의 이유와 또한 그것이 결코 역적 행위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였다.
1839년 7월 21일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소위 사서를 강습하여 일심으로 미혹하였다는 죄목으로 부대시참이 선고되었다.
그는 자기의 사형 집행일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 옥졸에게 말하였다. "나는 좋은 데로 가니, 내 가족들에게 어김없이
나를 따라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이 옥졸은 몹시 서글픈 표정으로 조신철 가족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끝까지 참으로 훌륭하였다. 그는 11회나 고문을 당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안온하고 명랑하여 옥졸들과 웃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형장으로 끌려가며 얼굴에 아주 기쁜 빛을 띠고,
큰 소리로 기도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형장에 이르러서는 홀히 웃으면서 칼을 받으니, 때는 1839년 9월 26일 그의 나이 45세였다.
여기에 사형 선교문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그것은 모든 명나라 법률의 조문에 의한 것으로 그 조문을 한번 인용하고자 한다.
유회장 간의
<형조 주청문 부록> 8월 19일(1839. 9. 26)
명나라 법은 주문과 마술에 관한 장에 이르러, 마술과 주문을
만들거나 그것을 전파하여 무리를 속이는 자는 참수를 당할 것이
라고 하였고, 같은 법률에 사형 선고를 받은 자로서 선고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자에, 관헌장에 이르렀으되 열 가지 중죄중에 하나를 범하였다는 확증이 드러나서 사형 선고를 받은 자는 지체없이 형을 집행할 것이라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묘당에 보고하여
죄인 조신철을 지체없이 집행하여야 할지 문의하였나이다.
대답은 "윤(允)이라"하였다. 위의 법문을 베껴 신철을 이 법문대로 처단하기르주청하였는바, 상께서는 "위의 법문대로 하라"는
대답이 계셨다.>
정하상과 유진길이 참수 치명한지 불과 나흘이 지난 8월 19일
(양력 9,26) 같은 형장에서 또 남녀교우 9명이 처단되어 치명되었다. 이들의 순교일은 양력을 9월 26일에 해당되므로 사실상 우리는 그들의 순교일을 시성 이전에는 모든 복작의 축일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날이 복자 축일로 추대된 것도 아마 79위 복자중에서 9월에
순교한 이가 가장 많았고, 또 9월 중에서도 26일에 제일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9명의 순교자는 교회고유의 전통대로 그들의 천상탄일이 바로 그들의 축일로 택일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성인들보다는
행운의 성인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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