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하상 바오로(1795 - 1839)(45세) 회장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 바울로 정하상(丁夏祥)은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띠노와 유세실리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워 깊은 신앙을 가졌으며, 한국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다.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순교하자 나이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재:경기도 양주군)의 큰 댁으로 내려왔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조증이 바르바라 집에 머물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였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하여 함경도에 귀양 중에 있던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찾아가 수년간 학덕을 연마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신앙의 열기를 북돋우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 3회나 왕래하였다. 1823년부터는 국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의 일을 보면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 주교를 통하여 교황청에 보내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교구 설정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1831년 9월9일 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성직자 영입에 지속적인 노력으로 유방제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비밀리에 모셨고,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정하상에게 신품성사를 베풀어 한국의 최초 성직자가 되기를 기대하였으나,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는데, 온갖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 나간 모범을 보여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여유있게 나타내었다.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써 실증했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는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박해를 중단시켜야 할 이유와 주장을 밝힌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하였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 산 표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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