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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 바르바라  

 

 

 

 

 

 

    

 

성녀 김 바르바라 (1804-1839)


김 바르바라는 본성이 솔직하고 굳세고 정직하여 진주엄마라고 널리 불리었는데 시골에서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이 성교도리를 알고 있었지만 독실하게 믿고 있지는 않았다. 바르바라는 13세에 서울 부자 황마리아 교우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입교하게 되었다.
본시 동정할 원의가 있었으나 하루는 아버지가 서울로 찾아와서 집주인과 딸을 속여 말하기를 "혼인할 마땅한 데가 있어서 허락하였으니 준비하라"고 하자 바르바라는 "동정지키기가 원입니다"하고거절하였다.

아버지는 "혼인하여 부부 한가지로 성교를 봉행하는데 방해가 없을 것이고, 또한 너 자신이나 네 부모와 동생을 위해서도 유익할 것이니 고집하지 말라."이렇게 아버지가 여러모로 말씀하시어 부득히 결혼에 동의하였다.

바르바라는 상대 청년이 교우인지를 알아보니 외교인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뒤 15년동안 바르바라는 남편을 예로서 섬기며 입교를 권면해 마지않았는데 그는 고집불통이었다.

자녀 여럿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사이의 화해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간 겪어야 했던 고초는 이루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많은 자녀들중에 겨우 딸 진주만이 영세시킬 수 있었다.

결국은 남편이 개종하지 않고 말년에 이르러 빌어먹다가 객사하게 되었다.
과부가 된 후에도 바르바라는 딸을 데리고 기구와 선행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선교신부가 입국하여 성사를 받게 된 후부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일층 독실하게 수계하게 되었다.

1839년 4월 중순께 그가 들어있던 집주인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청으로 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의 옥중고통을 말하고자 한다. 기해년 5월에 정 프로타시오에 이어 이번에 김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가 같은 날 옥사하였다. 기해일기는 옥에서 교수하여 죽고, 곤장맞아 죽고, 병들어 죽은 자가 모두 60여명이 된다고 말함으로서 순교자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대개가 열병으로 죽어 갔으니, 사실좁은 감방에다 너무 많은 사람을 가두고 너무 불결하게 두기 때문에 이러한 열병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형태의 감옥에서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옥고중에서 열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곧 기아요. 갈증이었다. 다른 형벌을 받으면서도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이 주림과 목마름에는 넘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에 두번씩 주먹만한 조밥 한공기 밖에는 얻어 먹지 못했으므로 이들은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자는 볏짚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말하기조차 징그러운 일이나 옥안에 들썩거리는 이를 잡아 먹기까지 하였다.

열병과 기아와 갈증이 옥중의 교우들의 고통을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 반면에 설상가상으로 이로 인한 옥사마저 영광된 순교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 당시 순교를 열망하는 교우들의 마음을 불안케 했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자수하는 도상에서 모든 교우들에게 효유하는 편지를 통해 이 문제에 관하여 교우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고자 하였다. "비록 칼아래에 죽지 아니하고 옥에서 죽을지라도 일정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고, 칼아래에서 치명한 사람과 같이 일정영복을 얻을 것이니 마땅히 실망치 말고 주를 배반치 말지어다."

포장이 김 바르바라에게 배교하여라 하였으나, 거절하고 공범자라하여 교우들을 대라고 하였으나, 그것을 단연 거부하였다.

이리하여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몹시 맞아 팔이 부러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종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형조로 이송된 후 고문에 주림과 목마름이 겹쳤고 드디어는 열병에 걸리어 이로부터 두 달 후 옥의 맨바닥에 누워 거룩하게 세상을 떠나니 때는 5월 27일 그의 나이는 3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