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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성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12.29 순교 
신분 동정  지역 한국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1796-1839)


정정혜는 1800년 6월에 박해를 피하여 아버지가 온 집안 식구를 데리고 고향인 광주 마재를 떠나 서울로 피신해 왔을 때 정정혜의 나이 겨우 네살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정정혜는 어머니그리고 두 살 위인 오빠 정하상과 마찬가지로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하였다.

다음 해 1801년 신유박해 때 일가가 모두 잡혔으나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만 순교하고 그 밖의 모든 식구들은 석방되었다. 석방은 되었으나, 이미 가산은 몰수된 뒤라 그들은 하는 수 없이 ㄱ량으로 돌아가 숙부의 집에 거식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처험 정혜에게는 아주 어려서부터 모진 시련과 고난이 잇달았으며 옥문을 나서는 다섯살의 정정혜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가난과 비참이요,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모범을 따라 시련의 가운데서도 그의 신앙을 보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차츰 빈궁한 생활에도 익숙하였을 뿐더러 도리어 가난을 딛고 용감히 일어나 바느질과 길쌈으로 생계를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그의 착하고 아름다운 표양은 패가망신의 원인이 된다고 천주를 저주하고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친척들에게도 감동을 주어 칠년만에 그의 친척 5,6명이 다시 천주를 믿게 되었다.

가난보다 더 쓰라린 것은 이별일 것이다. 마재로 피신하여 온지 얼마 안되어 올케와 사랑하는 언니를 잃었다. 여덟살 되던 해 오빠 정하상도 집에 남아있을 수 없어 서울로 가버렸다. 그 때부터 남은 모녀는 가난뿐 아니라 외로움마저 참아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북경 주교의 분부도 있고 해서 정 하상이 돌아와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충청도에 내려가 교우마을에 정착하였다. 오래간만에 일가가 다시 한 곳에서 살게 되어 그들은 같이 교리를 배우고 극기하며 공부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이 지방에도 박해의 태풍이 불자 그들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정정혜는 아주 총명하였고 어려서부터 의지가 강했다. 비록 친척일지라도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 없을만큼 수줍었다고 한다. 어쨌든 정정혜는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고 용감히 살아 오던 중 그는 자기 힘을 너무 믿었던 것은 아니나 서른 살쯤 되었을 때에 자기 마음이 약하여짐을 깨달았고 5년 이상이나 강렬한 유혹의 굴레에 빠졌다.

그는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모든 성인들이 사용하고 또 하기를 권고한 방법, 즉 기도와 대재와 편태를 사용하여 드디어 갈망하던 승리를 얻었다. 그는 전교신부들이 조선에 이르기를 절원하여 진심으로 천주님께 간구하였다.

그래서 앵베르 주교와 두 분 신부가 자기 집에 오시자 그의 기쁨은 대단하여 정성들여 그들을 보살펴 드림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교우들과 신입교우들이 자주 그의 집에 모이므로 정정혜는 그들을 가르치고 권고하며 극빈한 자에게는 애긍시사를 하였다. 앵베르주교는 그에 대하여 "정정혜는 참으로 여회장직을 맡을 만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신앙과 신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일어남을 보고 무서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내게는 과한 짐이 될까봐 무섭다"고 말하였다.

주교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신하여 갔을 때 정정혜와 그의 어머니와 오빠 정하상은 힘써 교우를 위로하며 옥에 갇힌 이들에게는 교회의 재산으로 음식과 의복을 장만하여 주었고 그와 동시에 자기들도 순교할 예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정혜는 7월 19일 어머니 유소사와 오빠 정하상과 같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의 순교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정정혜에 관한 문초록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 남편은 어디 있느냐?" 하고 재판관은 물었다.
"저는 시집간 적이 없습니다."
"어째서 아니 갔느냐?"
"저같이 영락한 집 딸을 누가 아내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다음에는 포장앞에 끌려 나갔다.
"네가 천주학을 한다니 참말이냐?"
"그렇습니다."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어려서부터 어머니한테서 배웠습니다."
"천주를 배반하라."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네 오라버니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네가 한마디만 하면 너도 네 어미도 다 살려주마."
"여기서 내가 살려면 천주를 배반해야 할터이니 그렇게 할 수는없습니다."

그의 저항을 꺾으려고 극도록 잔학무도한 형벌을 가하였으나 그는 문초를 당할 때마다 45내지 50도의 곤장을 맞아 문토에 도합 320도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천주를 배반하라는 말은 도저히 들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혹형 가운데서도 그는 평온한 마음과 늠름한 태도를 잃은 적이 없었다.

"천주의 성모의 특별한 안배로 나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것이 오늘까지 무사히 살아온 것은 오주 예수의 수고하심의 만 분의 일이라도 이해하시려 함이니, 적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내 괴로움을참아 받아야 하겠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11월 7일에 형조로 옮기어 가서 여섯차례나 법정에 출두하여 문초를 당하고 다리에 곤장을 세차례나 맞았으나 그는 안색조차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무감각한 것을 이상히 생각하여 연유를 물으니,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장하의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래서 구세
주께서 받으신 괴로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갇혀 있는 동안 정정혜는 기도와 묵상을 계속하고 함께 갇혀있는 교우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드디어 혹독한 문초끝에 사형이 선고되어 1839년 12월 29일 정정혜는 서소문 밖 사형터로 떠나면서 옥중 교우들에게 흉년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한 교우들을 특별히 기구 가운데 기억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처럼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일을 죽는 순간까지 마음아프게 생각하였다.

수레위에 매달려서도 기구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형장에 이르러 칼을 받고 동정과 순교로 이중의 월계관을 차지하니 그 때의 나이 4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