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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의배 마르코         

 

 

 

 

 

 

    

 

성인 성 정의배 마르코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11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정의배 (마르코 1794-1866)


새남터 강변에는 베르뇌 주교와 그 일행들의 시체가 군졸들의 감시 아래 아직도 사람들에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새로운 증거자들 이 순교의 형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정의배 마르코는 서울 창동에서 태어나 과거급제를 위해 유업에 종사하였고 외교인 집안이기 때문에 온 가족들은 천주교를 늘 경멸하며 살고 있었다.

과거공부를 끝마친 정의배는 서울 글방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게 되자 몇 년 동안을 자식도 없이 홀아비생활을 하였다.

그 뒤 1839년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두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는데 천주교를 위험한 도당이며 조상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단죄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선교사들과 갖가지 계급의 천주교인들이 아주 희한한 기쁨을 안고 죽음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내는 종교를 연구할 호기심을 가지고 성교도리의 신통한 효험을 알아보고자 책 몇 권을 장만하였다.

본디 마음이 착한 그는 성교도리 참됨을 깨닫고 아현리에 살던 황생원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즐거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전에는 성교를 믿는 사람들이 착하지 못한 줄로 알았으나 이제 참됨을 알게 되니 사람은 반드시 성교를 믿어야만 착하게 된다"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바로 입교하여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 그가 너무도 열렬한 신앙과 갈고 닦은 덕행을 지니고 있음을 보고 그를 서울 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 직책을 그는 죽을 때 까지 모든 이에게 유익하게 수행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정의배 마르코에 대하여 일종의 외경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차례 선교사 들에게 이렇게말하였다.
"저 노인을 보시오. 저분의 말들은 완전하고 저분의 길은 바릅니다. 나는 천국에서 저분의 자리만큼 훌륭한 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열성은 참으로 놀라와 끊임없이 신자와 예비신자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에게 성사받을 준비를 시키는 일을 했다. 그의 행동에는 항상 변함이 없었고 입술에는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한 주야를 막론하고 그를 부르는 사람들을 도와 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가 성내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면서도 1854년 성영회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버려진 고아를 데려다가 도와 주는 일을 했다.

그는 매우 가난했지만 신자들로부터 아무 것도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식탁은 아주 보잘것이 없었다.

두번째 맞은 부인 피 가타리나(1898년 3월 12일 순교했다는 것을 리델 이주교가 입증했음)는 삯바느질, 품팔이로 살림을 꾸려 갔을 뿐이고 다른 수입은 없었다. 이들은 슬하에 자녀가 없어 처조카 피영록 바오로를 양자로 삼았다. 이 때 그의 집에는 브르트니 에르 신부가 손님으로 잠시 와 있었는데 피바오로는 백신부에게 한국말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기도 했다.

정의배 회장은 변함없이 늘 침착하고 신덕이 깊었을 뿐 아니라 믿음도 대단히 굳세어 모든 신자들이 그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성인처럼 공경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서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울 수밖에 없도다."하고 말하곤 하였다.

미사첨례 때 그의 열심은 "누구든지 미사첨레는 정의배 마르코 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확인할 정도로 대단하였던 것이다.

박해가 시작되자 남대문 자암에 살던 그는 조카 바오로를 우선 피신시킨 다음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가 남아 있는 그 자체가 교우들에게 절대 유익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6년 2월 25일 한때 장주교를 시중들던 이선이 바오로가 고발하여 체포되니 이 때 정의배 회장은 웃으면서 "그대들이 올 줄 알고 있었소. 자, 갑시다"하면서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포장에게로 갈 때에 그의 어깨엔 오라가 걸렸었으나 다만 형식적이었으니 그는 결박되지 않았고 군졸 두 명이 그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것을 포졸 우두머리가 "이 점잖은 노인을 혼자 걷게 내버려 두어라. 이 분이 도망칠 염려는 조금도 없으니 그저 호위만 하고 너무 빨리 걷지도 말라."고 말하였다. 포청에 와서도 아무도 그를 마구 천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도 72세나 된 노인이었는 데다가 그의 인품도 포도대장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고매하고 위풍당당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의배 마르코 회장은 처음에는 구류간에 갇혔다가 의금부로 옮겨져 선교사와 동료 교우들과 4일동안에 걸쳐 신문과 형벌을 받게 되엇다. 특히 그가 천주교인들의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여러 차례 걸쳐 특별한 고문을 가하여 교우들을 밀고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가공인물 또는 외교인들의 이름을 말하였으므로 이것을 안 관원은 더욱 심한 곤장을 치게 하였다. 정의배 회장은 끝내 한 사람의 교우 이름도 대주지 않고 버티었다. 그리고 관장에게 "나으리 눈에는 천주교를 믿는것이 죽어 마땅한 죄로 보이는데 정말 딱한 일이오. 배교할 수 없으니 죽여 주시오."라고 반복하기만 하였다.

이윽고 3월 6일 군문효수라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다음날 즉시 임금의 윤허가 내려졌다. 1866년 3월 11일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길에 정의배 회장은 눈을 밑으로 내리감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의배 마르코는 네번째 칼에서야 비로소 목이 떨어져 순교하니 그의 나이 72세였다.

본시 머리털이 없는 대머리였던 관계로 그의 수염을 대신 이용 해 그의 목을 3일동안 매달았다. 그 뒤 그의 아내로 돈을 주고 그 의 귀중한 시신을 모셔와 정중히 매장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